※思索의 窓門/여행~

울산의 '선사문화 탐방 길~'

migiroo 2013. 4. 29. 19:07

 

 >2013.4.21


울산, 국보 찾아 떠나는 여행~

 

 

 


암각화와 공룡발자국이 남긴 선사문화 탐방 길~

▶국보 287호 반구대 암각화
▶국보 147호 천전리 각석


●들어가는 여정


생동하는 4월, 숲의 Festival.... 산하는 온통 연초록 축제 마당이다.
온갖 봄꽃들이 순리에 따라 피고 나면 지고, 지고 나면 또 핀다.
눈부신 노란 유채꽃, 연분홍 진달래가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바야흐로 세상은 온통 봄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오늘은 울산의 유일한 국보, 두 곳에 연결된 문화유적 길을 찾아 떠난다.
인간들이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시간, 수천 만 년 전의 선사시대,
그 미지의 세계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간다.
‘선사문화 길’ 로 명명된 스토리 워킹 태화강의 첫 번째 길이다.


길은 혼자 걸어도 외롭지 않다.
문자도, 문명도 없는 오로지 선사시대 사람이 되어 걷고 싶다.
다만 홀로 걷는 나를 숲이 반겨 주고 길가의 작은 꽃들이 반겨 주면 된다.


오늘 여정은 선사문화 길을 포함하여 대곡천 약 8.5km, 왕복·17km를 걷는다.
일부 짧은 구간을 제외하곤 모두 차 없는 산길과 호젓한 오솔 길이니
숲속에 묻혀 걷는 진정한 문화의 힐링 워킹인 셈이다.


 

 

●선사시대

 

 

선사시대라고 하면 도대체 어느 시대 쯤 되는 세계일까?
선사시대는 보통 구,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하여 청도기 시대 일부까지를 말한다.
그러니깐 기원전 440만 년 전부터 70만 년 전 이후, 인류가 출현하고부터다.
구체적으로 시대를 구분 하자면 대략 이렇다.
구석기 시대는 기원전 12,000년 전,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1,000년 전,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000년 전에서 300년 전까지를 그리고 철기시대는 기원전 300년 전부터

서기가 시작되는 시기로 우리는 이 시대를 비로소 역사시대라 말한다.


그러니깐 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의 그림이고, 천전리 바위그림(각석)은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광범위한 시기동안 그려진 그림인 셈이다.


자! 그럼 선사시대로 여행을 떠나 보자.


우선 대곡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오늘 걷는 선사문화 길이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울산의 대곡 박물관은 대곡댐이 건설 되고부터
그 수몰지역에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한 박물관이다.

 


●울산대곡박물관


 

 

 


‘대곡박물관’ 이름이 좀 생소하다.
그러나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과 도심과 떨어진 아주 조용한 곳으로 오후에 찾으면 사색하기에 딱 좋은 곳이고,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면

더 없이 좋은 교육장이 될 것이다. 전시관에는 선사시대의 유물들이 옹기종기 전시되어 있고, 어린이들은 토기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다.


 

 

 

 

대곡박물관은 대곡댐 건설로 수몰된 대곡리 일대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해 둔 선사 유물 중심 박물관이다. 1999년 9월부터 2004년까지 이루어진 5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원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1,100여 기의 고분군과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시기의 생산유적이 확인되었다.

대곡박물관을 나와 약 1km 정도 포장길을 따라 걸으니 계곡물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온다.
자동차 길은 끊기고 계곡은 차가 더 이상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태곡천은 울산 태화강의 지류이다. 경관이 아주 뛰어난 대곡천에는 국보 248호 반구대 암각화와 국보 147호 천전리 각석이 위치해 있다. 그리고 태고적 중생대의 공룡발자국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래서 문화재청에서는 2013년 대곡천 일대를 한국의 명승지로 선정하기로 했는데 어인 일인지 현지 주민들이 결사반대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대곡천 일대는 그 자체로 보존되어야 할 자연유산이다. 사방 몇 킬로미터 이내에 유물, 유적이 너무나 많다. 청동기시대 집터, 통일신라시대 가마터가 발견되었고, 그뿐이 아니라 포은 정몽주가 유배되어 이곳을 찾아온 사연이 적혀 있는 유허비, 원효가 세웠던 반고사 절터, 정몽주, 이언적, 정구의 위패를 모신 반구서원, 모은정, 집청정 등 역사시대의 유물이 즐비하다. 또 이 일대 바위들에는 중생대 공룡 발자국이 널려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 지질시대와 선사시대, 역사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지역이 바로 이 대곡천 일대라는 것이다. 

 


●천전리 각석


천전리는 선사시대 사람들은 물론, 신라의 화랑들이 이곳에서 심신을 연마하고 조선시대에
는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 와서 시를 읊고 시화를 그린 곳이 천전리 반구대 일대 이다. 
각석(刻石)이란 뜻은 바위 면에 그림이나 글자를 새긴 것을 말한다.

 

 

 

 

천전리 각석은 신석기 시대부터 신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새겨져 온 바위그림이고 문자이다. 1970년 12월에 동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며,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바위그림을 대략 한번 살펴보자.


 

 

 


먼저 윗부분에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기하학적 무늬가 보인다. 동심원, 마름모꼴, 물결, 나선무늬 등인데 마름모꼴이 제일 눈에 잘 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고 마름모꼴은 곡물의 성장과 숙성, 생명력, 풍요로움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 윗부분에는 주로 육지에 사는 동물 그림도 눈에 띄는데 큰 뿔을 가진 잘 생긴 사슴이 있다. 인물상으로는 역삼각형 모양을 한 얼굴이 보이는데 이는 원시 종교 의식과 연관이 있다.


 

 

 

 

바위 아래쪽에는 기마행렬도, 크고 작은 배, 신라시대 화랑이 새긴 것으로 보이는 글씨들이 있다. 또 ‘영랑’, ‘금랑’ 등 화랑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글씨도 눈에 띈다. 여기에는 또 네모진 테두리 안에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천전리 서석이라 부른다. 오른편에 새겨진 것을 원명(原銘), 왼편의 것을 추명(追銘)이라 부른다.


 

 

 


원명은 525년 신라 법흥왕의 동생이자 진흥왕의 아버지인 사부지 갈문왕과 그 누이가 이곳에 놀러 와 새긴 것이라 한다.  추명은 원명이 새겨진 후 539년에 사부지 갈문왕이 다시 이곳을 찾아 새겨 놓았다. 14년이 흐르는 사이, 함께 왔던 누이는 죽었고 갈문왕의 아내 지몰시혜비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저 세상으로 떠난 아내를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는 내용이 추명에 담겨 있다. 신라시대의 러브레터 인 셈이다.
 


●공룡발자국


 

 

 


대곡천에는 중생대 시대의 공룡발자국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천전리 각석 앞 계곡물이 흐르는 널따란 바위 면에 선명히 보이고, 반구대 쪽에도 남아 있다. 공룡이 번창한 중생대는 고생대와 신생대 사이의 시대로, 약 2억 2,500만 년 전부터 약 6,500만 년 전까지의 1억 6,000만 년간에 해당한다.


 

 

 

 

이러한 공룡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이유는 여러 학설이 제기 되고 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지름이 약 10km 정도인 운석(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면서 핵폭발의 수백 배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 그로 인하여 공룡이 멸종했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운석이 지구와 충돌하면서 대량의 먼지가 대기권으로 날아 올라가서 햇빛이 차단되었고 지구에 '핵겨울'상태가 되었다. 그리하여 기온이 떨어지고 식물은 광합성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먹이가 부족해지자 초식공룡이 멸종하였고 잇달아 육식공룡이 멸종하였다는 학설이다.


무려 1억 만년 전의 공룡발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니 겨우 100년도
못사는 인간이 감히 가늠조차 할 수도 없는 시간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귀중한 자연유산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밟고 다녀 훼손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고, 안타까운 사실은 아무런 보호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는 공룡발자국이 수천만 년 동안의 모진 풍상에 마모되어 닳고 닳아 겨우 윤곽만 보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연적이 마멸이 아니라 사람들의 무분별한 훼손으로 닳고 있으니 완전히 그 흔적이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 싶어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대곡천 어디 선가 공룡들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반고사터(盤皐寺址)


 

 

 

반고사터(盤皐寺址)는 천전리 각석 계곡을 건너기 직전 바로 위쪽 산 아래 논에 있다. 이 절이 언제 어떻게 폐찰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도 이 절터에는 석탑 부재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절터로서의 흔적이 미미하고 그나마도 관리나 정비가 전현 없어 지금은 한 민가의 논으로 경작되고 있는 실정이라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은 거의 찾지 않는 폐사지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몇 개의 석탑 잔재마저 언제 누가 훼손하거나 가져갈지 모르는 실정이니 관계 당국의 옛 절터로서의 유적지를 정비 했으면 좋겠다. 


예전에 이 절터에는 통일신라 중기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석조여래좌상과 그리고 석탑이 있었다고 하나, 석불과 석탑 몸돌 일부는 부산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져 갔다고 하며, 지금은 석탑 부재로 보이는 몇몇 석재들이 논가에 방치되어 있다.
반고사는 원효스님과 관련이 있는 사찰이었다고 도 한다.


반고사터 석불좌상

 

 

 

부산대학교 박물관 별관 뒤뜰에 옮겨진 반고사지 석불좌상은 머리의 윗부분과 두 손, 그리고 무릎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머리와 몸체는 떨어져 있던 것을 다시 붙인 것이고,  수인(手印) 또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환상적인 대곡천 ‘선사문화 길~’

 

 

 

 

나는 오늘 대곡박물관부터 걸어 왔지만 울산시가 정한 ‘선사문화 길’은 천전리 각석‘ 이 있는 기점부터 시작, 반구대 암각화까지 2.8km

구간이다. 길은 내내 대곡천 물소리를 들으며 걷게 된다.
지금은 초입 길에 나무 계단과 일부 구간에 데크로드가 설치되어 있지만 대부분 자연스런 산길로서 그야말로 환상적인 산책길이다.
멀리 도심을 벗어나 국보급 문화재도 탐방하고 봄 향 가득한 4월의 산길을 걸으니 그야말로 심신이 맑아지고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길은 수채화처럼 온통 연두색 초록빛 이고. 길가엔 키 작은 봄꽃들이
피어 반갑게 지나는 길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왜, 선사시대 사람들이 이곳에까지 와서 바위에 그림을 그리며 살았는지....
신라의 화랑들이 왜 이곳에 와서 심신을 닦았는지 이해가 된다.

 

 

●울산 암각화 박물관


 

 

 


숲 향 가득히 가슴에 담아 잠시 걸으니 아쉽게도 길은 포장길로 변한다.
계곡 너머 고래를 형상화한 ‘암각화박물관’ 건물이 길 옆에 누워 있다. 울산암각화박물관은 울산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을 소개하고 국내 암각화연구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위하여 2008년 5월 30일에 개관하였다. 박물관은 고래를 형상화한 목조건물로 중층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전시물은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의 실물모형, 암각화 유적을 소개하는 입체적인 영상시설,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각종 모형물과 사진, 어린이전시관, 가족체험시설 등이 전시되어 있다.(암각화박물관 홈페이지 자료)


암각화 박물관은 도심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시민들이 쉽게 찾기 어렵다.
그러나 주말 같은 날 가족과 함께 드라이브을 한다거나 걷기 운동 삼아 이곳 박물관을
찾는 다면 선사시대 문화도 즐기고 그야말로 스토리가 있는 힐링 워킹으로 최상의
컨디션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암각화 박물관을 지나니 길은 포장길로 바뀌고 대곡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경지인 반구서원 일대가 나타난다.

 


●반구서원


 

 

 


반구서원은 대곡리 반구대 천혜의 절경을 앞에 두고 있다.
그래서 일찍이 겸재 정선(1676~1759)도 대곡천을 찾아 반구대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고 심신을 수양했다 한다.

 

 

 


그런데 서원의 영역에 도로가 나는 바람에 서원의 운치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
길은 있어야 되지만 때로는 길은 자연 경관을 훼손하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이곳에 서원이 처음 생길 때는 반구대와 어우러져 그야말로 절경 중에 절경였는데
서원 대문 앞으로 포장길이 생기는 바람에 수많은 관광객들은 물론, 자동차들이
매연을 내 뿜으며 들락거리고 있으니 그 좋던 절경이 반감 되고 말았다.
그리고 길 때문에 반구대와 서원이 단절되어 버려 경관이 망치고 말았으니
경관 보다는 길이 우선이라는 경제적 논리가 앞섰기 때문이리라.


 

 

 


반구서원은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선생 등 세 분을 배향하기 위해 조선 숙종 때 반고서원(槃皐書院)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 후 영조 4년(1728)에 이르러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듬 해 다시 지었다.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문을 닫게 됨에 따라 유생들이 이를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고종 29년(1900)에 세 분의 선생을 추모하는 유허비(유형문화재 제13호)와 비각을 세웠다. 1967년 사연댐이 건설되면서 1983년 현재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그럼 잠시 공부 좀 해 보자. 정몽주는 초등학생들도 아는 고려의 충신이고,

이언적 과 정구 선생도 어떤 분이였는지 잠간 알아보고 다음 길을 걷자.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 ~ 1392)

 
고려 말기 새로운 이념으로서 주자학을 확립한 삼은(三隱) 중의 한 사람으로 불교이념에 대치되는 주자학의 연구와 보급에 힘썼으나, 온건개량파의 입장을 견지하여, 조준, 정도전 등의 급진적인 개혁에는 반대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되었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였다.
5부학당과 향교(鄕校)를 세워 학문을 진흥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외교정책과 군사정책에도 관여하여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잡으려 노력했으나 이성계의 신흥 세력에 꺾였다. 새 왕조를 세우려는 신흥 세력으로부터 참여의 권유를 숱하게 받았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됨으로써 자신의 유학적 이념대로 고려왕조와 운명을 같이 했다.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의 문신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기리기 위하여 1586년에 건립되었다. 비문의 글씨는 손엽(孫曄)이 썼다. 신도비 인근에 이언적의 신위를 모신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02호 달전재사(達田齋舍)가 자리 잡고 있다.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에 1577년에 건립된 또 다른 이언적신도비가 있는데 건립 연대나 이언적의 역사적 위상 등을 고려하여 두 신도비를 모두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이언적은 1491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한 성리학자로, 15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이조정랑 등을 역임하다가 1530년 김안로(金安老) 일파에 의해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후 복귀하여 경상도관찰사와 한성부판윤 등을 지내고 명종 즉위 후 좌찬성에 이르렀으나 1547년 정미사화(丁未士禍)에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사망하였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 ~ 1620)


한강 정구는 조선 중기의 이름난 유학자다.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의 사상을 유난히 흠모했던 그는, 주희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자신만의 구곡을 설정하고 ‘무흘구곡(武屹九曲)’을 지었다. 무흘구곡은 성주에서 김천까지 걸쳐 있는 9곳의 절경을 읊은 7언 절구의 시(詩)다. 한강 정구는 1곡에서 9곡까지 이르는 과정을 단순히 아름다운 경관을 쫓아 온 것이 아니라, 도학의 근원을 찾기 위한 일종의 실천과정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무흘구곡은 조선선비들의 구곡 경영과 그를 통한 철학과 종교, 그리고 사상의 실천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다.(이상 자료출처:한국의 인물사)

 

 

 

반구서원은 유감스럽게도 대문이 꼭꼭 잠겨 있어 들어 가 볼 수가 없다.
발을 곧추세워 담장 너머로 보이는 건물 일부부만 바라 볼 뿐이다.


현재위치의 반구서원의 불편함을 알고 2005년부터 지역 유림들이 인근 다른 곳으로

이전복원 해 달라고 행정 당국에 건의하고 있으나 부지 등 예산 확보가 어려워 이전

복원 사업이 답보상태에 있다고 한다.


 

 

 


반구서원을 지나니 대곡천에서 가장 절경인 삼각지대가 나타난다.
마침 계곡물이 꽤나 많이 힘차게 흘러가고 있다.
삼각지대는 계곡이 한번 U자(下廻)로 휘돌아 가기 때문에 생긴 곳으로 그야말로 물과 바위와 숲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런 위치에 서원을 이전했더라면 기막힌 장소 될 듯한데 그런 명당자리엔 민가 몇 체와

현대식 공중화장실이 떡 하니 앉아 있으니 행정당국의 안목이 얼마나 어두운지 알만하다.


 

 

 


이제부터는 암각화가 위치한 곳으로 가는 외길이다.
이 길은 비록 암각화까지 1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길이지만 울산시가 정한 ‘선사문화 길’에서 가장 멋진 산책길이다.
오른편으로는 대곡천이 흐르고 계곡 너머로는 첩첩 산세가 가물가물 시야에 들어온다.
길은 황토 길이고 물을 건널 때는 데크로드가 설치되어 있다.
주말이면 수 백 명의 탐방객들이 반구대 암각화를 찾는다.


 

 

 

 

오늘은 나 혼자 걷는 길이지만.....
이런 길은 혼자 걷기엔 너무 외로운 길이다.
친구와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걷던가,
사랑하는 이와 손잡고 추억을 만들며 걷는다면
가장 멋진 길이 될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반구대 암각화가 시야에 들어온다.
오늘은 다행히 암각화가 물에 잠기지 않았다.
한해에 몇 번씩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 면이 물에 잠겼다가 올라오는
자맥질을 해 대니 바위그림이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이리라.
벌써 많은 사람들이 와서 암각화를 보고 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바위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고성능 망원경을 전망대에 설치 해 놓았다.
그러나 망원경을 들여다봐도 숨은 그림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야말로 숨은그림찾기다.

 

 

 

이는 훼손정도도 심하지만 계곡 너머 멀리 위치해 있기 때문에 작은 그림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망원경에 눈을 붙이고 보아야 비로소 한 두 개 그림을 겨우 식별할 수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와 보고는 실망하고 가곤 한다.


반구대 암각화의 내용은 너무도 유명하여 여기에서는 상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울산에는 ‘반구대암각화’와 ‘고래’ 형상으로 만든 조형물이 공원이나 도심지 곳곳에 널려 있다. 심지어는 길바닥 보도 불럭에도 고래가 새겨져 있고, 가로등도 고래 형상이다.
관공서의 건물이나 새로 짓는 공공건물 등에도 어김없이 암각화 그림과 고래 등이 새겨져 있다. 어디 그뿐인가, 반구대 암각화 그림은 각종 의류나 생활용품에도 현대 감각에 맞도록 디자인되어 사용되고 있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현대인 보다 디자인 감각이 훨씬 뛰어나다는 증거이다.

 

 

 


울산시에서는 매년 봄이 되면 떠들썩한 고래축제도 열린다.
고래를 보호 하자는 축제인지, 잡아먹자는 축제인지 모호 하지만....
고래박물관도 있다.
대형 고래관광선도 두 척이나 있다.
배에 관광객들을 가득 싣고 동해바다로 나가
고래들이 유영하는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울린다.
그러면서도 한 쪽에선 고래 고기를 버젓이 팔고 먹는다.


근대 해양사에서 울산 앞 바다는 선진국들의 고래잡이 각축 장 이었다한다.
5,6,70년대 만 해도 울산의 장생포 항은 고래잡이 포경선이 즐비 했었다.
선창가엔 고래를 잡아 가마솥에 삶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렇게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고래는 울산과 땔려야 땔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그래서 반구대 암각화 같은 세계적 문화유산이 생겨 난 것이리라.

그러나 정작 반구대암각화의 보존 문제는 10년 넘게 서로 싸우고만 있는 실정이다.
암각화 보존과 연관 되여 지금도 세계적인 암각화가 중병을 앓고 있는 중이다.
바로 울산 시민의 식수원인 사연댐이 건설 되고부터 생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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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시내 돌고래 형상 가로등


식수원 사수냐, 세계적인 명승지와 문화유적지의 우선 보존이냐, 하는 문제로 행정부와 문화재청이 십년도 넘게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위급환자(반구대 암각화)를 수술대에 눕혀놓고 수술 방법을 두고  두 의사가 (행정당국과 문화재청)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갑론을박

싸우기를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 바람에 환자의 병세는 점점 위태로워지고 수술은 지연되고....
한해에도 몇 차례씩 물에 잠기는 바위면 그림의 훼손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현실을 알면서도 싸움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이명박)도 왔다 가고, 국무총리도 다녀가고, 국회의장도 왔다 가고.....
선거철이 대면 뻔질나게 왔다 가는 정치인들.....
그러나 한번 왔다가 가면 그것으로 끝..... 감감 무소식이다.


 

 

 

이제 지역 주민들까지 들고 일어나 반구대 일대의 명승지 지정을 반대하고 나섰다는 소식이다. 이는 겉으로는 식수원 문제라 하지만 그 이면에는 주민들의 재산권 행사에 제한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구대 암각화는 주변 일대를 포함하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될 날이 그리 멀지않았다. 이런 와중에도 불구하고 행정당국과 문화재 그리고 주민들까지 서로 자신들의 주장만 앞세워 갈등을 일으키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반구대 바위그림은 바위 면을 쪼아낸 면쪼으기 기법과 윤곽만을 쪼아낸 선쪼으기 기법으로 새겨진 그림이다. 그림의 종류는 크게 바다 동물과 육지 동물 그리고 사람, 각종 생활 도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바다 동물로는 고래, 물개, 바다거북 등이 발견됐으며, 육지 동물로는 사슴, 호랑이, 멧돼지, 개 등이 다수 새겨져 있다.
최근에 또 11점의 그림이 발견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세계적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마음이 왜 이리도 착잡할까, 반구대를 나온다.
좀 더 걷고 싶어 좁은 농로를 따라 반구마을을 지나 민박마을까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온다. 시골길을 걸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바로 시골집에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다. 그러나 생각만 그렇지 아파트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어찌 땅 파고 생활이 불편한 시골에서 살 수 있겠는가.


새가 새장 밖으로 나와 봤자 살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리라.
 


●에필로그


늦은 저녁 다시 왔던 길을 걸어서 대곡천 선사문화길을 벗어난다.
세상의 모든 길은 아무리 걸어도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인생의 길은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길이다.
나는 지금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길...
그 막다른 길 어귀까지 와 있다.
길 끝이 저 만치 보이는 듯 하다.
결코 돌아 올 수 없는 그 짧은 길을
나는 어리석게도 너무 빠른 걸음으로
뛰어 온 것은 아닌지 후회스럽다.
그러나 이제는 늦었다.

 

 

사진으로 보는 선사문화 길~

 

 

 

 천전리 각석으로 내려 가는 돌 계단 길

 

 천전리 각석 앞 대곡천

 

 천전리 각석- 보호 철책이 너무 허술하다.

최근에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이 낙서를 하여 한바탕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누구던지 마음만 먹으면 이 귀중한 문화재를 훼손할 수 있다.

시급한 보존 대책이 강구 되어야 한다.

 

본격적으로 선사문화 길로 오르는 계단이다. 여기서부터 반구대 암각화까지 길이 나 있다.

 

 

 

 

 

 

선사문화 길이 계곡을 따라 숲속 길로 이어진다.

 

 

 

반구서원 일대의 대곡천이다.

 

 

이 일대를 명승지로 지정하려는 문화재청에 대하여 지역 주민들이 반대하고 있다.

 

 

 

 

 

 

 

 

 

 

반구서원 옆에 있는 '집청저'의 이런 저런 모습이다.

 

 

 

반구대 암각화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선사문화 길을 걸으면서 만난 꽃들이다.

양지꽃

 

광대나물

 

유채꽃

 

대곡마을 정자

 

만첩홍도

 

왕벚곷

 

 

자목력

 

명자나무

 

휴대폰으로 찍은 것이라 화질이 좋지 않다.


■글과 사진정보

 
▶사진
촬영일자 : 2013.4.21
카메라 : Samsung smartphone S3
일부 사진은 인터넷 사진 공유장에서 켑처 한 것임


▶글: 본인 글 외에 일부 글은 관련 문화재 자료를 인용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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