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문화재 단상

경주 천관사지, 천관녀 그녀를 그리며~

migiroo 2015. 6. 28. 11:37

 

>2015.6.25

 

경주 천관사지, 천관녀 그녀를 그리며~

 

 

 


다시 찾은 천관사지, 개망초만 무성하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려 경주에 간다.
하늘은 잿빛, 그러나 비는 오지 않는다.
극심한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대지....
6월의 대지는 갈증으로 목이 타고 있다.


경주 남산 도당산성 아래 천관마을 논두렁 옆 폐사지 천관사 터.....
그녀의 애틋한 사랑이 무참히 무너진 체 천수백년 시간이 정지되어
그녀는 보이지 않고 속절없는 개망초들만 무성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녀의 원혼은 어디 갔을까?
허리 위까지 올라온 잡초더미를 헤집고 어딘가에 있을 그녀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개망초와 잡초에 묻힌 폐사지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30여분을 헤맨 끝에 잡초 더미 속에 묻혀 있는 그녀의 흔적을 겨우 찾는다. 바로 60고령(?) 태대각간 김유신 장군이 사랑한(?) 옛 연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지었다는 절 ‘천관사’터이다.


천사백년 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 천관사는 황량한 폐사지로 방치되어 실연에 애통해 하는 천관녀의 흐느낌 소리만 바람에 실려 들려온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개망초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더욱 서럽게 울었을 것이다. 나도 울고 그녀도 울고.....


오늘 나는 왜 천관사지를 찾는가?
천관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다.
오늘만이 아니다 경주만 오면 나는 그녀를 찾아간다.
애마의 목을 장검으로 무참하게 내려친 연인 김유신을 보고 
무너져 버린 그녀 천관녀....
그녀를 생각하면 내 자신도 무너진다.


그녀를 김유신만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나도 그녀를 사랑한다.
김유신은 입신출세를 위하여 단칼에 그녀를 베었지만....
나는 그녀를 영혼으로 사랑한다.
청년 김유신은 과연 천관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을 것이다‘이다.


수년전 나는 천관녀에 대하여 두 차례 불로그에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모두 픽션형식으로 쓴 단문이지만 나는 아직도 천관녀에 대하여 연민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실연의 여인, 사랑에 배신당한 여인으로 내 가슴 속에 각인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천관녀의 출신은 기녀였을까?


김유신과 천관녀에 관련한 현대의 많은 글에는 한결같이 입신출세한 김유신만 부각되어 있고 그를 사랑했던 천관녀에 대해서는 너무 인색하다. 천관녀를 기생이나 천한 신분의 여인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천관녀는 창녀였었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또 어떤 글에서는 천관녀는 제사장(祭司長)인 천관(天官)의 딸이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천관녀는 젊은 시절 김유신의 연인이었지만 그녀의 출신은 천한 기녀 출신으로 보편화 폄하 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학자들이나 글을 쓰는 사람들의 책임이 있음을 부인 할 수는 없다. 그들 말대로 천관녀가 정말 창녀나 기녀였을까?


과연 그럴까.
물론, 천관녀의 신분에 대하여 기록상으로 명확하게 나온 것은 없다. 그러나 김유신의 신분으로 봤을 때 천관녀의 신분을 유추해 볼 수는 있다. 과연 청년 김유신이가 기녀나 창녀를 상대로 사랑을 나눴을까. 하룻밤 욕정을 푸는 단순한 상대였었다면 몰라도....
어느 누구도 천관녀가 김유신의 애인이었음은 부정하지는 않는다. 만약에 천관녀가 단순히 기녀나 창녀로서 김유신과 사귄 사이였었다면 후에 김유신 장군이 어찌 그녀의 이름 따 천관사 라는 큰 절을 지어 그녀의 넋을 위로 했었겠나.


김유신과 천관녀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곳에서는 전혀 언급 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잠간 언급 되어 있는데 천관녀가 떠나 버린 김유신을 원망하며 지었다는 ‘원가’한 수가 있었다고 하나 그 내용은 알 수 없고 그들에 대한 사랑이야기는 민간설화로서만 전해오고 있다한다. 그러나 김유신 장군이 천관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천관사라는 절을 지은 것은 사실일 것이니 단순히 설화로서만 취급할 수도 없다. 그러니 김유신 장군의 체면을 봐서라도 천관녀의 신분을 기녀나 창녀로 폄하 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냥 ‘천관녀(天官女)라고 했으면 싶다.

 

 

 

천관사지, 그 황량한 적막 속에~

 

 


현재의 천관사지는 국립경주박물관 지척에 위치해 있지만 그야말로 관리가 되지 않아 황량하기 그지없는 폐허지로 방치 되어 있다. 잡초는 자랄 대로 자라 사람이 들어가기도 어렵다. 특히 여름철에는 뱀조차 나타날까 두려워 사람의 접근을 망설이게 한다.


2011년쯤인가(?) 천관사지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후 절터는 다시 흙으로 덮여져 지금은 잡초 밭으로 방치되어 있다. 안내판은 있으나 낡고 헐어 잘 보이지 않고 김유신이 천관녀의 집 앞에서 애마의 목을 단칼에 베는 장면이 담긴 그림 안내판도 색이 퇴색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현재 천관사지에 남아 있는 것은 폐탑 기단석(基壇石) 잔해와 석탑부재 일부 그리고 불상대좌가 땅위로 노출되어 있어 그나마 여기가 천관사 터였음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름철이면 잡초더미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찾는 이 없으니 천관사지는 더 쓸쓸한 적막 속에 묻혀있다.

 

 

 

천관사지 출토 유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건물지 7동, 문지, 탑지, 석등지, 우물3개소 등이 확인 됐고, 발굴된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2기 이상의 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출토된 유물로는 석탑 기단부에 있던 팔부중상(가루라상)이 조각된 석재 1점과 금동여래입상, 지붕 기와 막새, 기마인물형 토기 그리고 수많은 기와조각이 출토 되었다 한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청년 김유신이가 애마의 목을 날려 천관녀와 이별 후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신라의 최고 관직인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오르고 난후 천관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天官寺(천관사)’라는 절을 창건했다 했으니 그 규모가 결코 작지는 않았을 터이다.

 

 

 

월정교 복원과 방치된 천관사지

 

 


현재 천관사지 앞 남천(南川)에는 신라시대 다리인 월정교터가 남아 있다. 아마도 김유신과 천관녀가 손잡고 데이트할 때 한두 번쯤 다녔을 다리였는지도 모른다. 그 월정교를 근년부터 수백 억원을 들여 복원공사에 들어가 2014년도에 화려한 야간 조명시설까지 갖춰 1차 공사가 마무리되고 2차 공사가 한창이다. 천관녀와 사랑에 빠졌던 김유신의 살던 집터 ‘재매정(財買井)’도 잘 관리되어 월정교 인근에 있다. 그런데 젊은 김유신의 러브스토리가 담긴 천관사지는 왜 방치해 놓는 것인지 당국의 처사가 원망스럽다.

 

 

 

에필로그


언제나 그렇지만 쓸쓸하고 처연한 마음으로 천관사지를 나온다.
아무리 애틋한 마음으로 그녀를 생각해도 그녀를 위로하지 못한다.
한 남자를 지극히 사랑했던 천관녀.....
사랑 앞에 출신성분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 후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


김유신이가 애마의 목을 베었을 때의 끔찍한 충격으로 그를 원망하는 ‘원사(원가)’하나를 남기고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는 설도 있고, 실연의 절망에 빠져 약사발을 마시고 자진했다는 설도 있고, 머리 깎고 여승이 됐다는 설이 있지만 어느 쪽도 분명한 것은 없다. 만약에 그들 말대로(역사학자나 작가들) 그녀가 창녀나 기녀였었다면 김유신과 헤어진 후 아무 미련 없이 김유신을 잊고 그녀는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다시 웃음과 몸을 파는 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김유신 장군이 그런 그녀(창녀나 기녀)를 잊지 못해 후에 그녀를 위한 천관사라는 사찰을 새울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얀 개망초로 뒤덮인 천관사지....
그 마저 없었다면 더 황량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그녀 천관녀....
내 마음속에 천관녀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이 글은 순전한 필자 개인의 생각임을 밝혀둔다.

 

 

 

 

 

 

 

 

 

 

 

 

 

>미지로 떠나는 길 未知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