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문화재 단상

폐사지, 그 적멸의 시간여행~

migiroo 2016. 7. 3. 21:16


폐사지, 그 적멸의 시간여행~





오랜만에 옛 절터를 찾는다.
천년시간이 정지 되어 있는 적멸의 공간, 폐사지....
이 세상에 나타나서 잠시 존재했다 변화한 후 한 순간
사라져 버리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무상함.....
폐사지는 그것을 일깨워 준다.





8세기 신라시대 절터, 경주 외동 원원사지, 숭복사지....
비가 올 듯 말 듯 하늘은 온통 잿빛이다.
늙은 노송에 둘러싸인 절터는 그야말로 적멸의 지대인 듯
억 겹의 시간들이 두꺼운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 있고,
이 세상의 존재가 얼마나 무상한 것이지를 절감케 한다.





다만 변함이 없다면 상처투성이의 두 삼층석탑만이
천 년 전의 원형을 겨우 유지한 체 서 있다.
6월의 절터는 푸르지만 무거운 적막에 싸여있다.
석탑을 바라본다.
그리고 천 년 전으로 적멸의 시간여행을 떠난다.

물소리도 들리고, 바람소리도 들린다.
새 소리도 들리고 절의 풍경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스님들의 발자국 소리도 들리고
독경소리도 바람에 실려 들려온다.
전각이 몇 체인가. 규모가 제법 크다.
법당 마당에는 작은 연못도 보이고 연꽃이 드문드문 피어있다.
금당 문을 여니 근엄하신 비로자나불 부처님이 좌정하고 계시고,
그 좌우에 문수, 보현보살이 앉아 계신다.


한 늙은 스님이 내게 다가와 물으신다.


“처사는 어데서 오셨는고.....”
“의복을 보니 지금 사람은 아닌 듯싶으니....“
“아, 스님 저는 천년 후의 세계에서 왔습니다.”
“천 년 후의 세계....?”
“그렇다면 바로 앞 시대이군 그래,,,,”
“네? 바로 앞 시대이라니요?”
“여기서는 천년이 하루쯤 대는 시간이거든....”
“......???”
“빨리 돌아가시게, 늦으면 순식간에 늙어 질 걸세....”


스님은 홀연히 사라졌다.



원원사지 遠願寺址





원원사지 삼층석탑 기단부에는 보기 드문 십이지신상이, 탑신부 사면에는
사천왕상이 양각되어 있는데 금방이라도 탑에서 튀어 나올 듯 고부조의
돋을새김으로 조각 되어있다. 한뜸 한뜸 정으로 쪼아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조각한 신라 석공의 솜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탑은 금당(金堂) 앞에 동, 서로 배치되어 있는 쌍 탑이다.
두 탑은 무너진 체 방치되어 있던 것을 일제강정기 중 복원한 것이다.
왜, 두 탑이 모두 무너졌을까?
혹자는 지진이 일어나서 무너질 수도 있다고 했지만.....
숭유억불, 조선시대에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처참하게 깨지고
망가져 무너졌을 것이라는 추정에 더 설득력이 있다.





탑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예는 그리 흔치 않다.
호랑이·토끼·용·뱀·말·소·원숭이·닭·돼지·개·쥐·양 등의 십이지신...
얼굴 모습은 짐승이지만 몸은 사람의 모습으로
열두 방향 불교의 약사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능묘는 경주의 성덕왕릉, 경덕왕릉, 헌덕왕릉,
김유신장군 묘 등이 있는데 석탑에 새긴 예는 흔치 않다.





잘 관리된 절터는 온통 녹색의 정원 같다.
이리저리 휘어진 노송들의 두꺼운 목피를 보면 그 비대칭적이고 크고 작은
문양이 거북이의 귀갑무늬 같기도 하고 현대의 그 어떤 문양보다도 우수하다.
온통 초록빛 잔디밭은 흐르는 강물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있지만....
울창한 송림으로 햇빛이 차단되어 무거운 분위기가 폐사지에 서려있다.





원원사지의 두 삼층석탑은 1900년 초에 이미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1931년 일제강점기 중 탑을 복원하였다. 원원사의 창건에 대하여는 분명한 기록이 없어 확실히 밝힐 수는 없으나 삼국유사에 보면 안혜(安惠) 등 4 대덕(大德:安惠 ·朗融 ·廣德 ·大緣)이 김유신(金庾信) ·김의원(金義元) ·김술종(金述宗)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절이라 전하지만 삼층석탑의 양식과 새겨진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초기양식이라 할 수 없고 8세기 중엽 이 후의 조성된 것으로 보여 진다는 학계의 추정이다. 절터 동쪽 계곡에 석종형(石鐘形) 부도(浮屠) 3기(基)가 있고 서쪽 계곡에도 부도가 있지만 모두가 고려 이후의 것으로 보인다.


 
숭복사지崇福寺址





숭복사지는 원원사지 보다 더 휭~ 하다.
소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 벌판에 덩그러니 탑 상륜부가
모두 결실된 삼층석탑 2기가 동, 서로 서 있을 뿐이다.
절터에는 하얀 개망초가 여기저기 피어있다.
왜 하필 꽃 이름이 개자가 붙은 개망초 일까.





누가 개망초를 폄훼 하는가?
유월이면 어김없이 폐사지 가득 피는 개망초.....
개망초도 꽃이다, 꽃은 다 아름답다.
이 황량한 폐사지에 개망초마저 없었더라면 더 삭막할 것이다.


서 탑은 일층 탑신과 삼층 옥개석마저 없어지고, 동탑만이 겨우 삼층석탑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사람들은 온전한 탑보다 깨지고 마멸된 탑을 더 좋아한다.

적막한 폐사지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옛 탑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 한 켠에 짠한 애잔함과

아련함 같은 감정이 일어나고 세월의 무게를 진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동, 서 쌍탑은 모두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특히 위층 기단 4면에는 일부는 마멸되었지만 불법을 수호하고 대중을 교화한다는 8부중신(八部衆神)이 조각되어 있다. 

 
숭복사지는 경주 외동읍 말방리 동쪽 토함산 자락에 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말방리사지(末方里寺址)'로 불리던 곳인데 그 후 발굴조사에서 곡사(鵠寺)라는 작은 절을 신라 헌강왕 때 크게 중창하여 숭복사(崇福寺)라 하였다는 기록에 의해 이름이 ‘숭복사지’가 되었다. 이 절터에는 아주 커다란 대숭복사비라는 비석이 있었는데 비석의 비문이 신라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이 쓴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아주 유명하다. 지금은 비석과 비석머릿돌 이수(螭首)는 없어졌고, 그중 비편일부와 비석을 받치고 있던 쌍귀부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다. 
 


사산비명(四山碑銘)


*최치원의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지은 4개의 비문을 말한다. 그 4개의 비문은
지리산의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만수산의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희양산의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그리고 경주 초월산의 대숭복사비로서 금석문이다.
이 중 대숭복사비는 현재 일부 비편과 필사본 비문만 전해지고 있다. 



숭복사지 쌍귀부(雙龜趺)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하고 있는 쌍귀부는 거북 두 마리로서 머리 부분은 용이고 몸통은 거북이다, 등에는 두 겹의 귀갑문(龜甲文)이 새겨져 있으며 목에는 알이 굵은 목걸이를 걸었다. 두 거북의 등을 이어 붙여 비석 좌대를 두었다. 좌대 위에는 최치원(崔致遠)의 비문이 새겨진 웅장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숭복사비의 복원





없어진 대숭복사비는 최 근년(2015)에 경주 시에서 다시 복원하여 원래 자리인 숭복사지에 세워 놓았다.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앞의 3비는 고승들의 부도탑비이지만 숭복사지의 비석은 신라왕실과 관련되어 특히 지금의 괘릉이 원성왕릉임을 밝혀 주는 등 신라하대의 역사를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진다.
늦은 저녁 절터를 나온다.
절터에 머문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은 긴 시간이지만
천 수 백 년 폐사지의 한 시간은 한 찰나에 불과한 시간.....
눈으로는 석탑 밖에 볼 것이 별로 없는 폐사지이지만
그 안에서 나는 아주 긴 적멸의 시간여행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여행을 마친 소회는 역시 존재(存在)의 무상함이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무상함....
후드득 빗방울이 굵어지고 많아진다.
나는 언제 존재의 허울을 벗어 던질 것인지....

 

















*위의 사진은 휴대폰으로 찍은 것으로 선명도가 좋지 않다.(삼성 겔럭시 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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