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南山 斷想

4.경주남산, 천년 선정에 들어 계신 선각여래좌상

migiroo 2015. 11. 21. 22:54

 

 

>2015.11. 16 

4.경주남산, 천년 선정에 들어 계신 선각여래좌상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연꽃 대좌 위에 앉아 계신 부처님은 서향을 하고 있다.

얼굴 부분과 가슴 부분은 얕은 양각(돋을새김)으로 처리했고,

가슴 아래와 연꽃 대좌는 선각으로 처리했다.

 

 

 

 

그런데 여래의 얼굴 모습이 영 마땅치가 않다. 근엄하고 자애로운 여래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이목구비가 서로 비율이 맞지 않아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석공이 만든 느낌을 준다. 귀는 있는지 없는지 그 윤곽이 뚜렸지 않다. 눈썹과 눈이 너무 가늘고 미간이 좁다. 코가 너무 커서 매부리코를 닮았고 입술은 부르터 부은 듯하다. 불안(佛顔) 전체에 서려야할 엄숙함이나 자비의 미소가 보이지 않는다. 코와 입술, 손 등은 돋을새김으로 새겼지만 옷자락이나 두광 등은 선각으로 처리하여 선각과 양각이 혼합되었다. 이 선각여래좌상도 조각의 예술성이 많이 뒤떨어진다.

 

 

 

 

한마디로 얼굴이 좀 못 생겼다고 보이지만 감히 부처님을 두고

어찌 잘 생겼다 못 생겼다 할 수 있겠는가.

불가에서는 색(,)에 대한 미()와 추()를 구분하지 않는다고 했다.

눈으로 보이는 물리적 형상보다는 정신적 형상을 중히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석불이나 석탑의 조형성이 점차 뒤떨어진다.

 

이 마애불의 조성 시기는 신라 시대가 아닌 고려 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인데 이는 신라 시대 마애불과의 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렇지 고려시대에 조성한 마애불이라 그런지 조각 솜씨가 서툴기가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왜 고려에 들어서 조각 솜씨가 신라나 고구려, 백제보다 못해 진 걸까.

 

불이나 탑, 부도 같은 불교의 조형물은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면 그 섬세함이라든가 예술성이 간결해지고 볼품이 없이 변해간다. 석탑의 조형성도 조잡해지고 석불도 예술성이 떨어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좀 더 심해진다. 불교 쇠퇴의 영향인지 모른다. 문명의 이기 첨단 장비를 사용하는 현대에 들어서는 그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시대가 지날수록 문명은 발전하는데 왜 종교적 조형물의 예술성이 떨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간절한 신앙심과 정신력이 깃든 장인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첨단 장비로 현대인이 만든 불상이나 석탑 같은 불교 조형물이 아무리 조각이 세밀하고 반듯반듯 빈틈없이 만들었다 해도 혼이 담겨 있지 않았으니 예술성이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고려청자 같은 비색의 아름다움을 현대의 도예가들이 재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혼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첨단 기계화의 농간(?)이다. 

 

 

 

남산의 바위들...

 

 

 

 

남산에는 기기괴괴한 바위가 많다. 신라의 김대성이가 불국사를 건축할 때 모두 남산의 돌을 사용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남산에는 바위마다 불상이 있고 절경마다 석탑이 서 있다. 남산의 바위가 곧 부처라는 말이 생길 정도이다.

 

그러나 지금은 숲이 너무 많아 바위도 잘 안 보이고 숲에 가려 유적지도 찾기 어렵다. 산 아래 멀리서 보면 숲 밖에 안 보인다. 적당히 나무를 속아 주었으면 싶지만 관리주체인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숲이 먼저지 문화유적은 그 다음인 모양이다. 신라시대는 물론이고 현대의 5,60년대까지만 해도 남산에 나무가 별로 없었다. 나무를 연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산에 나무가 많지 않았으니 바위나 석탑 같은 것이 훤하게 잘 보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경주남산의 문화유적을 보려면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동절기에 봐야 비교적 잘 보인다.

 

마애불과 헤어져 이 바위 저 바위를 돌아 다음 유적지로 향한다.

잠시 더 걸으면 남산에서 가장 잘 생긴 석불을 만나게 된다.

 

4편 끝, 5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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