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未知로 가는 땅/예슬이의 인도여행

10,양심없는 인도의 부자들...

migiroo 2009. 10. 18. 00:52

 

 

 

호화로운 궁전을 보고 있노라니
수많은 가난한 인도인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적대감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본문 중에서....)

 

 

아침 9시40분에 아그라 켄트 역에서 괄리아르 행 열차를 탔다. 원래 8시 15분 발 기차였으나 1시간 30분정도 연착을 하였다. 인도의 기차는 딜레이 되는 것이 다반사라 도착해야 왔는가보다 생각해야 한다. 현지인들은 아무리 열차가 늦게 와도 누구 한사람 신경을 쓰거나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이 없다.

 

타즈마할의 식당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만났을 때 우리가 탄 기차가 3시간이나 연착을 했다고 말했더니 자기들이 탄 기차는 무려 9시간이나 연착을 했었다며 3시간을 기다렸다면 많이 기다린 것도 아니라고 한다. 정오가 다 되어서야 괄리아르에 도착했다. 저녁 6시경 다시 "잔시"로 가는 기차를 타야하는 관계로 짐은 역사에 있는 물품 보관소에 모두 맡기고 오토릭샤를 타고 괄리아르 성으로 향했다. 성 근처에는 가게가 없다 하여 한 나절이 걸리는 관광을 위해 미리 시장에서 양배추와 생수 등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서 배낭에 넣었다.

 

괄리아르 성은 둘레가 무려 3킬로에 달하고 평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무척이나 웅장해 보였다. 6 개의 궁전과 3개의 힌두 사원, 1개의 시크 사원이 있고 특이하게 성안에 사립학교인 신디아 스쿨이 있었다. 그 중에 만싱팰리스는 괄리아르의 황금기 때 마하라자(왕)였던 만싱이 지은 궁전으로 30년 동안이나 공을 들여 지은 곳이라 한다. 건물 외벽에는 당시의 하려함을 말해주듯 색체도 선명한 타일 장식이 아직도 남아 있었는데 무려 500여년이 흐른 지금도 푸른색이 변치 않고 유지되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지하2층으로 건축된 이 건물을 보기위해 지하로 내려갔는데 어둠 컴컴한 좁은 미로를 손전등에 의지하여 내려가니 커다란 원형의 넓은 장소가 나타났다. 벽에는 각종 무늬의 조각들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고 천장에는 연꽃 모양의 웅장한 조각이 선명하게 조금의 마모도 없이 남아있었다.


 

 

지하실까지 정교하고 섬세하게 꾸며놓은 그들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대의 왕인 아우랑제브가 왕위 찬탈에 걸림돌이 되는 형을 이 지하실의 어느 공간에서 살해 했다는 생각이 떠올라 갑자기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지상위로 올라올 때 미로를 잘못 들어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자니 억울하게 죽은 아우랑제브 형의 혼이 이곳에 머물면서 우리들을 못나가게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주립 고고학 박물관에는 힌두교와 자인교의 신상들이 전시 되어 있었는데 조각 상 여체들의 몸매가 얼마나 관능적이고 율동적인지 마치 당장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춤을 추는 듯 우아한 곡선의 자태는 여자인 내가 봐도 무척이나 매혹적 이었다.
풍만한 가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의식중에 만지고 싶은 충동을 들게 하여서 일까 수많은 방문객이 만진 기름때로 인해 모든 조각상들의 가슴부분은 새까맣게 되어 있어 실소를 머금게 하였다.

 

 

 

고고학 박물관에서 나온 우리들은 자이빌라스 궁전 안에 있다는 신디아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 박물관에는 길이가 13미터나 되고 무게가 3톤에 달하는 세상에서 제일 긴 샹들리에가 있다하여 호기심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기네스북에도 올라있다 하니 어떻게 생겼는지 무척이나 궁금하였다.

 

 

 

몇 백 년을 거처 영화를 누리는 신디아 가문은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도 영국에 우호적으로 대해 핍박을 받지 않고 지속적인 부를 유지하였다는 마하라자(왕)의 한 후예들이다.
자이빌라스 궁전 한 귀퉁이에 위치한 이 박물관은 개인 소유로 입장료도 비싸서 150 루피나 달라고 한다. 박물관 안에는 신디아 가문이 얼마나 호화롭게 사는지를 과시한 진열품으로 가득했다.

인도 고유의 유물은 거의 없고 영국과 유럽, 중국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고가의 외제품들이 셀 수도 없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들의 조상은 전부다 사냥이 취미인 듯 건물 벽에는 사냥하여 죽인 호랑이를 앞에 놓거나 밟고 서서 거만하게 찍은 사진들로 도배를 해놓았다.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는 샹들리에는 시커먼 먼지를 뒤집어쓰고 초라한 형색으로 엄청난 무게로 겨우 매달려있는 모습을 보자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이런 한심한 것들을 보려고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 왔는가 싶어 후회가 막심했다.


박물관 옆에는 지금도 신디아 가문이 살고 있는데 정문에는 두 명의 호위병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으니 어느 한 귀퉁이를 가르쳐 준다. 방문객을 위한 화장실은 얼마나 더럽고 엉성한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비싼 입장료를 받아 챙기며 자기네들은 호화로움의 극치를 이루고 살면서 방문객에게는 이런 더러운 화장실을 제공하며 홀대하는 인도 부자들의 인간성이 한심스러웠다. 호화로운 궁전을 보고 있노라니 수많은 가난한 인도인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적대감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괜스레 정문을 지키는 호위병에게 눈을 아래위로 치켜뜨며 못 알아듣는 한국말로 한마디 쏘아 붙였다.

 

 

 

“이런 양심도 없는 사람들아 정신상태가 이 모양이니 너희 나라가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 알겠냐?"... 너무 심했나?

괄리아르 관광을 마치고 일행들과 만나기로 한 역전으로 돌아오니 아직 시간이 남았다. 기차역 뒤의 인디안 커피 하우스에서 도사(쌀가루 반죽을 기름에 구운 것)와 홍차를 마시면서 그 동안 밀린 여행 기록을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저녁 6시 출발이라는 "잔시"행 기차는 3시간이 넘도록 모습이 보이지 않고 기다리다 지친 우리들은 인솔자인 스님의 사회로 오락 시간을 가졌다.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며 춤도 추고 무료한 시간을 잊기 위해 플랫폼에서 작은 공연(?)을 시작 하였다.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니 주위에 호기심 많은 인도인들이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인도의 모든 것이 신기하고 호기심이 생기듯 그들도 우리의 춤과 노래가 신기하기만 할 것이다.

기차의 연착으로 밤 11시가 넘어서야 "잔시"역에 내렸다. 한밤중에 다시 "오차"로 가는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시간은 그 다음날로 훌쩍 넘어 버렸다.


오늘은 인도에 온 후 제일 고생을 많이 한 날이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먹은 것이라고는 양배추 몇 조각과 인디안 커피 하우스에서 먹은 도사와 홍차뿐이었다. 기차의 연착으로 플랫폼에서 모포를 두르고 몇 시간을 추위에 떨어야 했다. 그동안 너무 편안한 여행을 한 것 같았다. 이렇게 고생스럽게 다녀야 인도식의 배낭여행이란 생각이 들면서 고생스런 와중에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새벽 2시가 넘어서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였다.


>글 : 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