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남산 칠불암, 그 불계의 속으로...
-남산에서 가장 완벽한 조각품 칠불암의 마애삼존불과 사방불
1.진달래 붉게 핀 칠불암 가는 길 -2009년 4월에 쓴 답사기
봄이 화사하게 남산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바야흐로 계절은 온 산야를 연초록빛으로 체색 중. 연분홍 진달래꽃이 수줍게 핀 4월의 남산은 짙푸른 소나무와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와 같다.
검은 소나무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피어있는 진달래꽃…. 그 연분홍색이 마치 시집가는 수줍은 새색시 같다. 남산의 진달래는 한 곳에 무더기로 군락을 이루지 않는다. 크고 작은 소나무 사이에 적당히 모여 앉아 피어있다. 키 큰 소나무를 부러워하지도 않고 소나무 아래에 터를 잡고 옹기종기 피어있는 진달래의 모습이 너무도 소박하고 아름답다.
소나무는 또 기꺼이 진달래에게 자리를 내주어 꽃을 피우게 하니 소나무와 진달래가 신랑, 신부인양 정답고 사이가 좋아 보인다. 진달래 사이로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은 여인네들이 지나간다. 여인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봄바람에 실어 숲속의 음악이 된다.
오늘은 봄을 오감으로 만끽하며 남산의 칠불암을 찾아 나선다. 남산하면 칠불암, 칠불암 하면 남산.... 칠불암은 남산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유명한 문화유적이고,
불교 성지이다.
2.시(詩) 같은 칠불암 가는 봉화골 소나무 숲길....
산길로 들어서니 시원한 훈풍이 소나무 사이를 헤치고 불어온다. 봉화골 칠불암 가는 길은 작은 고행을 요구한다. 불계(佛界)로 들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고행(苦行)은 아픔도 아니고 고통이 아니다. 고행이야 말로 진정한 정신 수련이고 행복으로 가는 과정이다. 칠불암 가는 길도 그런 고행이 수반 되는 길이다. 그 길 끝에 다다르면 찬라한 일곱 부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통일전에서 칠불암까지 거리는 약 3.5km. 그리 멀지 않은 길 같지만 처음 길은 원만하나 중간에서부터는 꽤 긴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가파른 계단길이 기다리고 있다. 고행 길이라 하지만 빼곡히 밀집되어 있는 소나무 숲길을 걸으면 짙은 솔향에 취해 속진으로 찌든 심신이 맑아진다.
이 길은 사계절 모두 좋다. 겨울에는 하얀 잔설이 소나무 아래에 내려 앉아있어 걷기 좋고, 봄에는 바람과 진달래와 함께 걸어서 좋은 길이고, 여름에는 솔향이 짙은 시원한 그늘 길이 좋고, 가을에는 떨어지는 낙엽 소리에 취해 걸어서 좋은 길이다.
가다 쉬고, 가다 쉬고.... 드디어 칠불암 거의 가까이 왔을 때 산길은 급경사로 이어진다. 계절은 아직 봄의 첫머리인데도 이마에서 땀방울이 송송 맺힌다. 얼마를 걸었을까 심한 갈증이 온 몸속으로 파고든다. 그때 정말 신기하게도 길옆에 맑은 옹달샘 하나가 나타난다. 그야 말로 칠불암 부처님이 내려주신 감로수임에 틀림없다.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푸니 어디선지 염불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들려온다. 길은 돌계단으로 변했다. 자연석을 이리저리 맞추어 만든 계단이다. 계단은 의외로 길고 경사도가 꽤 가파르다. 6,70도는 됨직하다. 노인이나 다리가 부실한 사람은 계단 오르기가 벅찰 듯싶다.
3.칠불암으로 오르는 159개의 돌계단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스물, 서른, 마흔, 쉰... 계단은 계속 이여 진다. 육십, 칠십, 팔십, 구십, 백... 백을 넘겼는데도 계단은 아직도 이어진다.
스스로 고행을 자초하는 수행자의 마음이 되어 이마의 땀을 흠 치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간다.
이윽고 계단의 끝자락 159계단에 발을 디뎠다. 계단의 수는 정확하지 않았다. 돌계단이 일정한 크기가 아니도 크고 작고, 있다 없다 이어졌기 때문이다. 계단 중간쯤에서 덜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고른다. 그런데 앉아있던 돌이 심상치가 않다. 자세히 보니 분명한 석탑의 부재임이 틀림없다. 화강암 삼층석탑의 기단석으로 보인다.
드디어 마지막 계단, 159 계단에 올라선다. 순간, 눈앞에 전개된 부처의 나라 천계의 문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문 앞에 일곱 부처님이 환하게 웃으시며 나를 맞아 주신다. 병풍 같은 커다란 바위 절벽 면에 근엄하게 생긴 석가여래께서 (아미타여래라고도 주장함) 좌우 협시불과 함께 좌정하고 있는 모습과 그 앞에 네모난 바위 면에 사방불이 좌정하고 계신다. 정말 감격적인 순간 이다.
오불(五佛),이보살(二菩薩) 칠불(七佛)이 사는 부처의 세계가 바위 면에 펼쳐져 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와서 참배를 하고 있다. 나도 경건히 부처님께 절을 올린다. 불자가 아닌 어느 누구라도 절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날 것이다.
4.일곱 부처의 나라 칠불암마애석불
남산이 불교의 성지임을 말해주는 곳이 칠불암이다. 조각 미술적 감정으로 보아도 감탄스럽지만.... 신라인들의 불심이 얼마나 간절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곳 이기도하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절을 올리고 있다. 남자는 한 사람도 없고 모두 여인들뿐이다.
왜 남자들은 절에 인색할 것일까?
나는 한 쪽 구석에 앉아서 물을 마시며 끊임없이 절을 올리고 있는 그녀들을 바라본다. 그녀들은 무슨 염원으로 절을 올리고 있는 것일까?
그녀들의 간절함이 내게 전이되어 오는 듯 가슴이 아파온다.
사람들은 평화롭고 행복할 때는 결코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불행할 때는 기도에 매달린다. 인생은 고해(苦海)라 하지만 어찌 부처님 앞에 절을 올린다고 해서 그 고해가 평온한 바다가 되겠는가. 바로 고해는 부처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절은 간절한 기도가 아니라 바로 자신과 싸우는 자아실현(自我實現)일 것이다.
5.칠불암 마애석불
경주 남산에 마애불은 많다. 그러나 높은 돋을새김(高浮彫)으로 조각한 곳은 칠불암이 유일하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눈에 띤다. 바로 칠불암에는 불상에 꼭 있어야할 목 언저리의 *삼도(三道)와 이마 가운데에 있는 *백호(白毫)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설마 석공의 실수로 빼 먹은 것은 아닐 것인데... 고식불상(古式佛像)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즉 초기 불상 조성 형식으로 5세기경 중국의 남조나 북조에서 공통적으로 유행했던 불상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칠불암에 고식불상을 조성한 것일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이곳 칠불암은 원래 절이 있던 곳이고 바위에 건물을 올렸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680년경의 기와 편들과 불교 경전을 새긴 경석(經石)이 이곳에서 출토된바 있어 칠불암 불상의 조성시기를 5~6세기경으로 잡으면 고식불상 형식을 조성한 의문이 풀린다.
6.석불의 코는 왜 모두 떨어져 나갔나?
보물 200호 칠불암의 공식명칭은 “칠불암마애석불군”이다. 수년전에 왔을 때는 석불의 코끝이 모두 조금씩 떼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말끔히 복원 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석불의 코가 떨어져 나간 불상이 많다. 그것은 예로부터 석불의 코를 떼어 갈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터무니없는 속설 때문이다. 이 또한 조선시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교묘히 이용한 계략임에 틀림없다. 참으로 무지한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석불의 코를 먹으면 득남을 한다니 도대체 부처님 코를 먹고도 아들 낳기를 바란다는 자체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7.칠불암 본존불
칠불암 본존불이다. 학계에서는 석가여래라고도 하고, 아미타여래라고도 주장하지만 아무래도 석존 쪽이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석존이면 어떻고, 아미타면 어떤가...
따지기 좋아하는 학자들의 말일 뿐이다.
그저 부처님이면 만족이다. 모두 부처이기 때문이다.
높이가 2.7m, 자연 풍화에 의해 신체 부분, 부분이 깨어져 나간 흔적은 있지만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이다. 넓은 어깨, 풍만하고 박진감 넘치는 얼굴, 건장한 가슴, 날렵한 허리의 당당한 체구에서 본불의 위엄이 서려 있다.
칠불암의 답사는 수도 없이 많이 했다. 그러나 올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르게 다가온다. 답사는 혼자 올 때도 있었지만 전문 해설사나 대학교수의 지도를 받아 답사를 하는 적도 있다. 거대한 동굴사원 인도의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사원의 불적들이 불교미술의 진수라 하지만 밀교적인 색체가 짙게 배인 칠불암의 불적이야말로 비록 작지만 그 뜻과 장엄은 아잔타, 엘로라 석굴 보다 더 깊고 크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칠불암의 조각술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런 불상을 조성한 장인은 단순한 석공이 아닐 것이라 믿는다. 나는 천 수백 년 전에 만든 석불들을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석공의 손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신의 손 일거라고..... 오직 신의 손이기 때문에 석굴암의 본존불이나 칠불암 같은 작품은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칠불암의 부처님은 모두 7곱 분이다. 뒤에 거대한 바위 면에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석가여래삼존불과 앞의 사각 바위를 이용 동서남북 사면에 여래상을 사방불로 새겼다.
이 칠불은 천수백년 동안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 세월을 흘러 보냈지만 비교적 완벽하게 남아 있다. 불단의 돌 축대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불상과의 조화를 이뤘고, 특이한 것은 사방불 위에 기둥을 새웠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상을 보호한 목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8.칠불암 사방불
삼존불 앞에 네모난 바위 각 면에 이른바 사방불(四方佛)이 있다. 사방불이란 동서남북에 각기 다른 여래(如來)가 있다는 것인데 온 세상 어디든지 부처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사방불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사방불은 정확히 사방사불(四方四佛)이라 부른다. 글자의 뜻 그대로 풀이해서 모든 공간에 부처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AD 1세기경 대승불교가 발생하면서 한 시대에 한 명의 부처만 존재한다는 기존 개념이 동서남북 사방은 물론 6방, 8방에도 존재하고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에도 부처가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망라하여 모든 세계에 존재하는 부처들을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이라고 하며 특히 밀교 계통에서 발전하였다.
이러한 개념은 다방불(多方佛)사상과 천불(千佛)사상, 삼천불 사상으로 발전되었으며 결국에는 모든 중생이 본래 불성을 지닌 존재라는 내재불(內在佛) 사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사방불은 경주의 칠불암, 굴불사지 사방불을 비롯하여 경북 문경 사불산의 사방불, 영주 사면석불, 신안사 사방불, 충남 예산 사면석불 등 매우 많다.
그럼 다음 의문을 풀어보자! 칠불암삼존불 앞에 왜 사방불이 와 있는 것일까? “신라의 마음 경주남산”을 쓴 박홍국씨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칠불암은 목조로 지은 차이타이(chaitya), 즉 예배당의 성격을 갖춘 석굴사원이었기 때문이다. 차이타이에는 탑과 상이 다 배치되는데 이 중에 사방불 석주는 바로 차이타이의 탑주이다.
그러니깐 아주 쉽게 말해서 차이타이는 탑을 의미한다. 칠불암의 삼존불 앞에 탑을 새웠다는 의미이다.
지금 칠불암 앞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주워온 석탑 옥개석 잔재를 이용하여 만든 탑 형태로 쌓아 놓은 탑이 있는데 이 옥개석들은 칠불암의 연대를 추정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하는데 시급히 탑을 복원 하였으면 싶다. 탑재로 가늠해 보면 칠불암이 대단히 큰 절이 있었던 것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다.
9.칠불암과 석탑
원래 이 자리에 신라 시대 때 큰 절 하나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절 이름은 알 수 없다. 그대신 지금은 칠 마애불 옆에 칠불암이라는 아주 작은 암자가 하나 있다. 암자 건물은 지붕 위와 허리 여기저기에 비닐 포장을 뒤집어쓰고 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빗물이 방안에 뚝뚝 떨어지기 때문이란다. 건물의 모양은 절집 모양이 아니라 일반 여염집 모양이다. 암자는 너무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 보인다. 칠불암의 유명세에 비하여 암자가 너무 초라하다.
칠불암의 유명세에 비하여 암자가 너무 초라하다. 작아도 좋으니 칠불암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아담한 암자 건물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다행히 지금 기와 불사를 하고 있는 중이란다. 암자 마당 한 켠에 새 기와 한 무더기가 쌓여 있다. 언젠가는 아담한 암자가 새로 지어 질 듯 한데.... 빨리 단청이 예쁜 작은 암자 한 체가 칠불암 옆에 지어지길 바란다.
그러나 암자안의 법당은 너무도 정갈하다. 티끌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속진(俗塵)이 덕지덕지 묻은 나 자신을 돌아보니 차마 방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는다. 법당에 따로 모신 불상은 안 보이고 그 대신 창문으로 칠불의 마애불이 보인다. 스님들의 표정이 왜 맑은지 그 이유를 알듯하다. 비록 암자는 가난하고 초라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깊고도 한없이 넓어 보인다.
암자에는 너무도 맑고 아름다운 분들이 머무르고 계셨다. 물처럼 맑은 예진, 동조, 효공 스님(비구니)이다. 이 중 효공 스님은 파란 눈의 외국인이었다. 엉뚱하게도 러시아인이라는데 우리말이 아주 유창하다.
절 살림이 가난해도 불만하나 없으시는 분... 암자가 초라해도 늘 웃으시며 슬퍼하지 않으시는 분...
나는 그런 예진 스님께 물었다.
“스님 암자 건물 여기저기에 왜 비닐이 씌워져 있나요?” 예진 스님이 부끄러운 듯 대답을 하신다.
“네, 비가 새기 때문이랍니다.” “아무래도 새로 암자를 지어야 하는데....”
스님은 말꼬리를 흐리신다. 그리고 스님은 맑은 얼굴로 하얀 차 한 잔을 내 주신다. 그러나 암자 살림이 너무 가난해 보인다. 아무리 물질을 배제한다는 불가이지만 그래도 최소한도의 재화(財貨)는 필요한 것이다. 남산 아래 불국사의 일 년 예산은 얼마나 될까?
칠불암을 나서는데 뒤에서 맑은 스님의 목소리가 발기를 멈추게 한다.
“처사님, 이것 좀 드시고 가세요.”
하얀 스님의 손에 빵(카스테라)이 가득 들려져 있다.
“스님, 왠 빵을.....”하고 얼떨결에 빵을 받아 든다.
스님이 안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으시며 말하신다.
“저희들은 수행 중이라 속가의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방문객들이 불단에 공양한 것인데 드시면서 내려가세요.“ 시장기가 잔뜩 했는데 정말 맛있게 빵을 먹으면서 하산 한다. 늦은 오후 남산을 내려와 차의 시동을 걸고 속계를 향하여 도망치듯 악셀를 밟는다. 너무나 나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 가난한 암자의 불전함에 작은 보시마저도 하지 않은 내 인색함에 분노한다.
칠불암 예진 스님의 맑은 목소리가 훈풍에 실려 차창으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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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기
칠불암마애불은 보물에서 2009.8.28일 국보 312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당연한 조치이다.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아울러 예진, 동조, 효공 스님의 소원도 성취됐다.
너무나 초라했던 암자 건물을 헐어내고 새로 지었기 때문이다.
새 암자는 결코 화려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작은 건물이다.
마치 암자는 새색시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축하, 축하~~~
국보로 승격되어 축하하고...
암자를 새로 지어서 축하한다.
>칠불암에서 미지로
*첨언 - 내 카메라가 구닥다리라서 선명한 사진이 없어
부득이 사진 일부는 남의 사진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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