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문화재 단상

11.암즉시불(岩卽是佛)-경주 선도산 마애삼존불상

migiroo 2009. 11. 15. 00:09

 

 

 

●암즉시불(岩卽是佛) [경주 선도산 마애삼존불상]

 

 

 

             ▲우협시 보살                              ▲본존불                               ▲좌협시 보살

 

커다란 바위마다 불상이 새겨져 있으니 아마도
바위가 곧 부처님들이(岩卽是佛) 사시는 불계(佛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천 년 전 신라 사람들은 경주의 선도산 정상 부근을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생각하고 이곳에 '아미타삼존불'을 모셨습니다.
지금은 비록 일부가 풍화에 시달려 깨지고 헐었지만...
불상으로서의 근엄함과 자비가 한없이 넘쳐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암석 위에 깊은 돋을새김으로 새긴 이 불상은
깨진 코와 입술과 턱만 아슬아슬 남아있습니다.
몸체도 다 깨지고 부서져 손인지 옷인지 구분도 안 되고
다리인지 옷자락인지 구분도 안 됩니다.
저렇게 얼마나 모진 풍화작용에 견뎌 낼지 차마 바라보기조차
민망스러울 만큼 그 마멸상태와 파손도가 심합니다.

 

 

 

이 불상을 새긴 사람은 왜 하필이면 아주 석질이 나쁜  파석 위에 불상을 새겨 이

가슴을 이토록 아프게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단단한 화강암 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양 협십보살상은 다른 곳에서 화강암을 갖다가 석불을 새겼기 때문에

본존불 보다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미타 본존불

 

 ▲좌협시 보살 

 

그렇지만 이 부처님들은 지금 외롭지가 않습니다.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서민들은 이 석불을 석불로 보지 않고
오직 부처님으로 보고 절하고 또 절을 하지만...
학식이 높은 유식한 사람들은 이 석불을 그저 오래된
문화유적으로만 여기고 석불 앞에 결코 절하지 않습니다. 
 

 

 ▲우협시 보살

우리는 이러한 문화유적을 대할 때의 태도를 올바르게 행해야 합니다.
우선은 경외(敬畏)하는 마음으로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려 절한 다음에
문화유적으로서 소중함과 예술성을 느껴야 됩니다.
그게 올바른 태도입니다.

 

* 파석-잘 깨져 떨어져 나가거나 부서지는 바위

 

 

>미지로
       

            

            ■ 문화재 정보

 

선도산 마애삼존불상 - 보물 제 62 호 /시대, 통일신라시대 /위치, 경주시 서악동에 위치.

 

찾아 가는 길

 

선도산은 경주시 서쪽에 있는 높이 390m의 낮은 산이다.
그렇지만 이 작은 산은  신라 건국설화와 관련 있는 선도산 성모가 신라 개국
이전부터 이곳에 살면서 신라를 지켜주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 곳 선도산
자락에슨 태종무열왕릉을 비롯해 서악서원, 서악동 삼층석탑, 서악동고분,
진흥왕릉 등이 즐비하게 위치해 있다.

 

가는 길은 무열왕릉 입구에서 도보로 1.5km 정도 올라 가면 선도산 정상이 나타나는데
그 정상아래 커다란 암벽에 마애삼존불 입상이 새겨져 있는데 안탑깝게도 암벽의 석질
이 파석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석불의 마멸이 극심하다.
 

 

이 석불은 통일신라시대의 마애삼존불입상으로 높이는 본존 6.85m, 오른쪽 협시보살
4.62m, 왼쪽 협시보살 4.55m이다. 돌출된 암면에 거대한 본존을 조각하고, 좌우의 협시

 

보살은 별도로 원각 하여 배치하였다. 본존의 암벽의 파손 때문에 머리와 신체
각 부분이 많이 손상되어 있는데, 특히 얼굴의 손상이 심하여 눈 이상의 얼굴과 머리는
모두 탈락해 버렸다. 코는 큼직하며 입은 꽉 다물고, 턱은 날카로워 박력 있는 윤곽과
함께 힘이 충만한데 고졸한 미소가 남아 있다.

 

또한 목은 긴 편으로 삼도가 잘 나타나지 않았으며, 목에서 내려온 어깨선은 둥글어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과 비슷하지만, 어깨를 움츠린 것은 군위 삼존석굴과 비슷하다.
신체는 양감이 거의 없이 원통형으로 되었으며, 이것은 장대한 체구, 시무외인,
여원인의 수인과 함께 부처의 위엄과 함께 힘을 나타내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가슴부근에서 탈락이 심하여 확실한 의문은 알 수 없지만, U자형의
옷 주름이 가슴부근부터 성글게 표현되어 있다.
협시보살은 몇 개의 조각으로 파괴되어 아래 계곡에 굴러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왼쪽 협시보살은 대좌까지 모두 4개로 분리되어 있던 것으로, 머리 부분은
목까지 남아 있는데, 머리에는 중앙에 화불이 조각된 삼산보관을 쓰고 있다. 얼굴은
갸름하며 윤곽선이 부드럽고 우아한 얼굴이다. 신체는 본존불에 비해 훨씬 섬세하고
부드러운 편으로, 상체는 굴곡도 잘 나타나 있는 편이다. 왼손은 내려 정병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는데, 이 인상과 보관의 화불로
보아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양팔에는 천의가 휘감겨져 있으며, 여기서 내려온 3단의 옷 주름이 다리 상단과 하단에
각각 걸치고 있어, 군위 삼존석굴의 관음상보다 훨씬 아래로 내려졌다.
대좌는 원통형의 돌을 앞부분만 파서 여기에 몸의 무릎 이상까지 낄 수 있도록 한 특수
한 것으로서, 표면에는 의문을 표현하고, 발아래는 복판연화문(覆瓣蓮花文)을 伏蓮으로
조각하였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5개의 조각으로 절단된 것으로서 현재는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
왼쪽 보살보다 훨씬 파괴가 심하나 전체높이는 비슷하다. 얼굴은 왼쪽보살과 비슷하지
만 직사각형에 가까운데다 눈도 바로 뜨는 등 보다 남성적인 기풍이 보인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선 끝이 다소 마멸되었다. 신체도 왼쪽 보살과 거의 같으며 목걸이
옷 주름도 거의 비슷한데, 관음보살인 왼쪽보살에 대해 대세지보살로 추정된다.

 

이 마애삼존불상은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통일신라 초기(7세기후반-8세기초)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형태면에서는 기념비적인 양감을 느낄 수가 있는데, 원통형의 체구라든가 어깨가 좀 움츠러든 것

등은 군위삼존 석굴의 본존과 흡사하며, 또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의 본존과도 비슷하다.

또한 선의 표현에서 본존의 각선은 명확하고 힘있게 표현되었으며, 법의의 U자형 옷주름선은 경주

배리 석불입상의 옷자락처럼 장중하고 묵직하게 처리되었다.
그밖에 보살의 천의 주름은 군위삼존석굴 보살상의 천의와 비슷한, 부드러우면서 생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마애석불상은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과 친연성을 가지면서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군위 삼존석굴 불상, 경주 배리 석불입상과 작풍을 같이하는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이라 추정된다.

<내용출처:문화재청>

 

 

 

 

 

■ 대승기신론으로 선도산 마애삼존불 읽기 <상>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952호 [2008년 06월 09일 

●산신각 사찰로 바뀐 설화 불교의 토착화 과정 상징 
                                                                         -기사등록일 [2008년 06월 09일 12:47 월요일]    
 


마애삼존불이 조성돼 있는 선도산의 바위는 정을 대기만 하면 부서져 나간다. 이런 곳에 굳이 마애불을 조성한 신라인들의 마음을 읽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회·종교·예술적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경주 중심가에서 해가 떨어지는 쪽을 바라보면 서천을 끼고 펼쳐진 탑정동 일대의 두드리 들을 지나 불쑥 솟은 산봉우리들이 보인다. 그 산들 가운데 제법 높은 산, 뾰족한 삼각형이지만 둥그런 곡선을 한 봉우리를 한 산이 있다. 그 산의 정상 바로 아래쪽을 쳐다보면 서천 건너편의 도심지에서도 마애불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바라보며 경주 시청이나 터미널에서 서천교를 건너면 바로 서악, 선도산이다. 높이는 380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낳은 어머니, 선도산 성모 사소(娑蘇)의 사당이 있는 산이다. 무열왕릉, 진지왕릉, 헌안왕릉과 이름 모를 고분들이 줄지어 있고, 그 고분군을 지나 오르면 정상의 바로 아래쪽에 성모사유허비(聖母祠遺墟碑)가 있으며, 그 옆으로 100여 미터 오솔길 따라 가면 위패를 모신 사당인 성모사가 보인다. 성모사 옆으로 선도산 마애삼존불(보물 62호)이 있다.


아침 햇빛에 붉게 물드는 마애삼존불을 보기 위해 허겁지겁 산을 올랐다. 예전엔 사람 하나 간신히 걸어갈 수 있는 오솔길이었는데 이제는 자동차도 다닐 만큼 큰길이 성모사 앞까지 뚫렸다. 숨을 헐떡이며 올랐는데 다행히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동살만 희붐할 뿐이다. 서천과 두드리들 너머 경주 시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성모사의 관리인인 노인 한 분이 낙엽을 쓸고 있었다. 숨을 고르며 사진기를 준비하니 막 새벽 햇빛이 번진다. 붉은 빛줄기들이 서서히 조금씩 정상에서 바위 절벽을 훑더니 주불의 상호에 다다른다. 상호는 상반부가 떨어져 나가 코의 아래 부분과 턱, 입만 볼 수 있다. 남은 부분도 균열투성이다. 다른 불상과 달리 인간이 훼손한 것이 아니다. 자연과 시간의 손길 탓이다. 원래 이곳은 불상을 새길 수 없는 터다. 바위는 부서지기 쉬운 안산암이다. 마그마 상태였던 것이 결정화하면서 사각기둥 모양으로 절리를 이루었기에, 정을 갖다 대면 사각형 기둥 모양으로 떨어져 나간다. 아미타불의 몸체 부분도 형상을 간신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여기저기 잘려나갔다. 아미타불만 겨우 조형하고는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은 다른 곳에서 새겨 이곳으로 모셔온 것으로 보인다.
 

중창불사 도운 선도산 신모
 

지금 내 앞에 놓여 눈에 보이는 이 마애불은 상(相)이다. 부처의 진리가 장인의 손을 매개로 하여 이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상과 내가 만나 감동을 하고 그에 담긴 진리를 찾는 감상과 해석 과정은 용(用)이다. 이 용을 통해 불상의 숨은 진리인 체(體)가 드러난다. 용의 과정에서 체를 짐작하기 위해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신라인들은 왜 그 많은 산과 바위를 놔두고 하필 불상을 조성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이 바위에 아미타불을 모신 것일까?”이다.


이를 알기 위해 관련기록을 뒤진다. 그 기록을 종합하여 당시의 사회문화적 맥락, 불상을 조성한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맥락을 재구한다. 논증을 생략하고 간략히 살펴보면, 불교가 들어오긴 전 신라인들은 산신신앙을 믿었다. 신라인은 그 중에서도 경주 인근의 삼산(三山)과 국토의 중앙과 동서남북 네 방위에 있는 산인 오악(五嶽)의 신을 가장 귀중히 여겨 신라가 망하는 순간까지도 나라에서 주관하는 산천제를 지냈다. 사로국 시절 서악은 이름 그대로 이 나라의 서쪽을 지키는 산신이 계신 곳이었다. 이 산의 산신의 이름은 거룩한 어머니란 뜻의 성모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엔 이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세월의 풍파에 훼손된 주불의 두상. 

 
진평왕(眞平王: 579?632) 대에 지혜라는 여승은 행실이 어질었으며 안흥사에 살았다. 그녀가 새로 불전을 수축하고자 하였으나 힘이 부족하여 못하더니, 꿈에 한 선녀가 아름다운 자태로 머리를 보옥으로 꾸미고 와서 위로하여 말하였다.
“나는 선도산의 신모이니라. 네가 불전을 수리코자 하는 것이 반가워서 금 열 근을 시주하여 돕고자 하니 내가 앉은 자리 밑에서 금을 찾아다가 주장 부처님 세 분을 꾸미고 벽에다가 오십삼불과 육류성중과 여러 천신들과 오악의 신들을 그리도록 하라. 또한 매년 봄, 가을 3월과 9월 10일에는 선남선녀들을 모으고 일체 중생을 위하여 점찰법회를 열어 이를 규례로 삼으라.”


꿈에서 깬 지혜는 무리를 데리고 신당으로 가서 자리 아래를 파보았다. 꿈 속의 신모 말대로 그곳에 황금 160냥이 있어 그것으로 신모의 지시대로 과업을 잘 성취하였다. 그 사적만은 일연이 살았던 당시까지 남아 있었으나 불법행사는 이미 고려 당시에 폐절되었다.


신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이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체득하여 우리나라에 와서 머물면서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더니 아버지인 황제가 솔개의 발에 편지를 매어 부쳐 이르기를, “솔개를 따라가다 그것이 머무는 곳을 집으로 삼아라.”고 하였다. 사소가 편지를 받고 솔개를 놓았더니 이 산에 이르러 머무르므로 따라와서 이곳을 집으로 삼고 땅 신선이 되었다. 이 때문에 산 이름을 서연산(西鳶山)이라 하였다. 신모가 오랫동안 이 산에 자리를 잡고 나라를 보위하니 신령한 이적이 매우 많았다. 이 산은 나라가 창건된 이래로 언제나 세 개 신당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그 차례도 여러 산천제(山川祭)의 윗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상이 『삼국유사』, 「감통」 편 ‘선도 성모가 불교행사를 좋아하다’ 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서악, 선도산의 산신인 성모 사소는 신라에서 가장 으뜸인 산천제를 지낼 정도의 위상을 갖는 제일의 신이다. 위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산신이 있던 자리가 절로 변하고 산신과 부처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종류의 설화는 『삼국유사』에 수없이 나오며, 한국 사찰의 연기설화를 보면 산신이 직접 부처로 변하기도 한다. 부처님은 왜 산으로 내려왔을까? 산신이 왜 갑자기 부처님으로 변하며 산신이 있던 자리가 왜 절로 변하는가? 위의 설화에서도 왜 선도산 산신이 불전을 수축하는 경비를 대고 불교의 의례인 점찰법회를 열라고 하는가?


이 의문을 풀려면 먼저 불교가 이 땅에 전해져 수용되고 정착하는 과정을 알아야 한다. 수로왕비인 허황옥이 가야에 인도 불교를 전한 것이 48년이다. 그런데 신라문화와 가야문화는 건국초기부터 서로 활발한 교류를 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보수적 산신신앙 순교로 포용
 

고구려나 백제에 없는 각배와 토우가 신라와 가야지역에서 출토되고 있고 금관, 고분, 토기 등을 보면 가야와 신라의 것이 많이 유사하다. 여러 분야에서 문화교류가 있었는데 불교만 교류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또 고려 민지(閔漬)의 금강산 ‘유점사 기문(楡岾寺記文)’에 의하면 천축에서 53불을 모신 배가 안창현(지금의 고성) 포구에 닿은 것이 신라 남해왕 원년(서기 4년, 漢 明帝 永平 11년)으로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보다 65년 전의 일이라 한다. 산둥반도 공망산에서 후한대 마애석상이 발굴된 것은 이미 후한대(23~220)에 인도 불교가 비단길(Silk Road)인 북중국을 경유하지 않고, 인도에서 배를 타고 동남아와 중국 남동해안을 거쳐 한반도로 오는 ‘자기의 길(Ceramic Road)’, 혹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차마고도(茶馬古道)를 따라 중국 서남부로, 다시 양쯔강을 따라 내려와 항주, 명주, 양주 등에서 한반도로 오는 길을 따라 직접 한반도와 신라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음을 뜻한다. 1∼2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제주도의 불교 유적도 이 길을 따라 들어왔을 확률이 크다.


위의 사실을 신빙성이 없다고 무시한다 해도 묵호자가 와서 불교를 전파한 것이 눌지왕대다. 눌지왕은 417년에서 457년까지 재위하였으므로 늦어도 457년에는 불교가 전파되었다. 소지왕은 재위 10년(489)에 까마귀와 쥐의 가르침에 따라 궁궐에 들어가 거문고 집을 쏘니 ‘내전분수승(內殿焚修僧)’과 궁주가 간통하고 있어 처형하였다. 궁주는 왕비, 또는 왕의 친척이나 궁녀를 가리킨다. 왕이 이들을 간통한 죄로 처형한 점, 왕이 먼저 거문고집을 쏘지 않았다면 이들이 왕을 죽였을 것을 감안하면 궁주는 왕비로 보아야 한다. 이는 이미 왕궁 안에 승려와 내불당이 존재했고 왕비가 승려와 간통할 정도로 승려층과 왕족이 가까운 사이였음을 뜻한다. 법흥왕 조의 기록을 봐도 왕과 이차돈 모두 이미 불교신자다. 이들은 불교를 진흥시키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는 신라사회에 1세기경, 아니면 늦어도 457년 이전에 전파되었고, 489년 이전에 이미 왕실에 수용되었으며, 528년(법흥왕 15년)에 귀족과 합의를 거쳐 공인된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불교가 전파되자마자 오래되지 않아 공인되었는데 신라에서는 왜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불교가 거부되었는가? 그것은 새로운 사상을 이단화할 만큼 신라 고유신앙의 틀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 고유신앙이란 다름아닌 풍류도다. 진흥왕이 불교를 널리 일으키려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말썽을 부리며 반대했다고 한다. 왕이 원해도 귀족들이 반대하여 공인을 미루었다는 것은 왕권이 귀족을 압도할 정도로 강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귀족들이 고유 신앙을 더 중히 여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차돈의 순교는 이런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필연적 통과의례였다.
 

별처럼 빛나는 불국토로 승화
 

아무튼 이차돈의 순교를 통하여 공인된 불교는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공인된 지 20년이 못 되어 누구에게나 제 집을 떠나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 상황에 이르고, 왕이 부처의 사리를 맞으러 흥륜사 앞으로 친히 나가며, 황룡사 등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국가 재정이 소요되고 수많은 백성을 동원해야 하는 대형 사찰을 속속 짓는다. 원광이 점찰법회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점찰보를 두자 여신도가 기꺼이 전답 1백 결을 바친다. 진정의 어머니는 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솥을 불사에 희사하고 홀어머니인 자신이 죽고 나서야 출가하겠다는 아들을 꾸짖어 그 즉시 의상대사를 따르게 한다. 400여 미터에 이르는 조그만 남산에 지금까지 발견된 절터만 140곳이 넘는 것을 보면, 『삼국유사』에 “절이 별처럼 들어섰다.”고 표현한 것이 그리 과장은 아니다. 불법은 그렇게 찬바람 이는 설산을 넘어, 폭풍우가 몰아치고 큰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건너, 폭양이 이글거리는 사막을 가로질러 이 땅 신라로 와 찬란한 꽃을 피웠던 것이다.


불교는 이 땅에서 왜 그리 빨리, 깊이 퍼졌을까? 불교 자체의 위대성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불교가 신라 고유의 신앙으로 샤머니즘과 산신신앙의 종합품인 풍류도(風流道)와 결합하였기에 가능하였다. 불교, 특히 풍류도가 포용력이 강하고 다른 문화에 잘 적응하며 창조력이 있기에 양자는 만날 수 있었다. 둘이 만나 하나가 된 것은 풍류도와 당시 불교가 서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대승기신론으로 선도산 마애삼존불 읽기 <하> 
 
부서지는 바위 위에 부처 새긴 신심이여    
 
석굴암 본존불이 원융미의 정점이고 부처골 감실부처상이 질박미의 정수라면 선도산 마애삼존불은 신심과 예술혼의 정화다. 
 

당시 신라에는 불교의 여러 신앙체계 가운데 기존의 고유신앙과 크게 맞서지 않고 현실에서 삶의 행복과 즐거움을 불러오며 신이함과 신령스러움을 강조하는 밀교 계통의 신주신앙(神呪信仰)이 먼저 뿌리를 내린다. 신라인이 굳게 믿었던 이 신앙의 실상은 무엇일까? 당시에 왕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지금 기독교도들에게 성경과 같은 구실을 하여 국가 의례에서 개인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삶과 행동의 준거가 된 경전을 살짝 들춰보자.


“1백개의 불상, 보살상, 나한상 등과 곳곳의 대중을 청해 이 경을 즐겨 듣고 … 1백명의 법사가 높은 자리에 앉아 1백가지 향을 피우고 1백가지 빛깔의 꽃을 뿌려 불법승 삼보의 공양을 하면 … 국토 안에 있는 1백부의 귀신들이 … 그대들의 국토를 지키리 … 나라가 어지러우면 귀신이 먼저 난을 일으켜 백성이 혼란에 빠지니 … 또 만일 불의 재난, 물의 재난, 바람의 재난 등 일체의 온갖 재난이 있을 때면 위에서와 같은 법의 쓰임에 따라 이 경을 강독하라. 대왕이여 다만 나라를 지킬 뿐만 아니라 또 복과 덕을 지키는 힘도 될 것이니…”(구마라집 역,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 「호국품」)


신라 최초의 국통인 고구려 귀화승 혜량은 진흥왕 12년(551)에 위의 경전에 의거하여 1백 명의 스님을 청해 1백 분의 부처님을 모셔놓고 공양을 하여 나라의 호국을 기원하는 의례를 열 것을 건의한다. 이에 따라 국가의례로 행한 것이 바로 백고좌회이다. 진흥왕은 백고좌와 함께 전몰장병을 위령하는 팔관재를 열었는데 이것은 고려까지 이어진다. 불교를 처음 전한 묵호자는 향을 피우고 서원을 읊은 것만으로 왕녀의 병을 고치는 이적을 보인다.


불교의 대중교화를 처음 시도한 원광은 중국유학에서 귀국하여 진평왕 15년(613)에 백고좌강회를 열고 경을 읽으며 자신의 업보에 대하여 점을 쳐보고 참회하는 점찰법회를 시행한다. 밀본은 흥륜사 승려 법척이 고치지 못한 선덕여왕의 병, 무당과 승려가 모두 실패한 승상 김양도의 병을 치료하여 무불습합이 불교나 샤머니즘 자체보다도 위대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명랑은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 군사를 물리친다. 이런 신주적神呪的이고 무불습합적인 관념체계는 왕실, 승려, 귀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국가 규모의 의례인 백고좌회, 팔관재회, 점찰법회에서부터 개인의 신앙에 이르기까지 풍류도와 밀교를 융합한 여러 의식이 전적인 호응을 받으며 의례로 정착되었다는 것은 이것이 온 신라인에게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졌음을 뜻한다.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서 업과 고통을 없애고 복을 구하려는 밀교 신앙은 ‘지금 여기’ 현실에서 재앙을 멀리하고 복을 불러온다는 풍류도의 제재초복(除災招福)의 원리와 서로 통하였다. 당시 신라인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복을 닦아 죄를 멸한다는 수복멸죄(修福滅罪)의 길로, 국가의 차원에서는 나라를 흥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흥국이민(興國利民)의 방편으로 불교를 수용하였다.


따라서 왕실은 중세의 왕권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와 호국의 도(道)로, 귀족은 출세하고 명예를 높이는 수단으로, 백성들은 현세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방편으로 불교를 택했다. 오랜 동안 풍류도라는 고유의 샤머니즘을 유지하였던 신라인들은 불교가 들어오자 이것과 융합하였다. 신라인들은 풍류도의 산신이나 천신과 함께 부처님에 기대어 현세에서 재앙을 없애고 행복을 가져다 달라고 빌 수 있게 된 것이다. 정토신앙과 화엄철학이 꽃을 피우기 이전의 시대, 곧 527년에서 675년에 걸쳐 무불(巫佛)을 습합(褶合)하던 세계관을 ‘풍류만다라(風流蔓茶羅)’, 그 시대를 풍류만다라 시대로 명명한다.

 
‘선도산 성모’ 귀족 세력 연합 상징
 

풍류만다라 세계관에 따라 풍류도와 불교는 빠르게, 그러나 평화적으로 융합한다. 풍류도의 신격과 부처님은 사이좋게 어우러진다. 산신이 내려오던 자리에 부처님이 내려온다. 산신과 부처님이 함께 섬김을 받고 산신이 부처로 변하기도 한다. 산신을 섬기던 산왕당이나 산신당은 그대로 놓아두고 그 주변에 절을 세운다. 신라계 사찰을 가면 산신각이나 삼성각이 없는 절을 보기 어렵다. 사찰의 연기설화를 보아도 사찰을 짓기 이전의 재래 신격의 설화에 불교적 포장을 한다. 진평왕대에 여래상이 새겨진 돌이 하늘에서 산의 정상으로 떨어지거나 산 아래 땅에서 사방불이 나타나거나 하여 이들 산에 절을 세운다. 문무왕대에 영취산의 산신은 불교의 천신 가운데 하나인 범천의 비가 되는 변재천녀로 묘사되고, 신선이 미륵선화로 변모하기도 한다. 지리산신 성모천왕은 석가모니의 모후 마야성모로 승화한다.


산신 중에서도 하필 왜 서악의 성모일까? 지금 전임 교황이 불교도로 개종했다 상상해보라. 당시 신라에서 재래 신앙 가운데 최고의 신격이 불교를 받아들인 일은 혁명적이었으리라. 이런 까닭에 선도산 성모가 나타나 비구니 지혜에게 불전을 수축하도록 금 열 근을 시주하고 선남선녀를 모아 점찰법회를 열라고 한 것이다. 점찰법회는 먼저 목간을 만들어 그 위에 죄과의 명칭을 적어놓고 이를 던져서 나온 죄과목을 보고서 자기 죄과를 지장보살에게 참회하여 모든 죄를 씻는 의례이다. 지장보살은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까지 부처가 없는 시대에 중생교화를 맡겠다고 서원한 보살이다. 그러니 점을 쳐서 현세의 죄를 없애고 행복을 비는 것은 풍류도적이며, 길흉이 운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선악, 나아가 전세의 업(業)에 관련된 것이라며 참회하여 깨우침으로 이끄는 것은 불교적이다.


산신각과 절의 공존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산신을 믿던 세력과 불교 세력이 평화적으로 연합하였음을 의미한다. 생략하였지만, 인용한 부분에 이어지는 『삼국유사』 이야기에서 선도산 성모인 사소는 중국 황실의 딸이라 하였다. 이것을 그대로 믿으면 중국 유민이 신라에 와서 지배 세력을 형성하다가 죽은 후 신격화한 흔적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선도산 성모인 사소가 혁거세를 낳았다고 하였으니 혁거세는 중국계 이주민 세력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혁거세가 천신족이자 밝사상을 가진 기마민족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이 괴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선도산 성모 세력이 중국계 이주민임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사실이지만, 혈연적으로 혁거세의 어머니라 보기는 어렵다. 신라 사회는 사로국을 형성한 6촌 사이에도 어머니와 아버지, 아들과 딸의 관계를 설정하였다. 그러니 선도산 성모 세력과 혁거세 세력의 관계는 혈연적이라기보다 정치적, 문화적으로 모자관계일 것이다. 혁거세와 알영 세력이 혼인관계로 연합하였다면, 선도산 성모 세력은 모자관계로 동맹을 맺은 것이리라. 지리적으로 보아도 알영정과 나정이 이웃해 있고 바로 서천 건너편이 선도산 성모의 세력권이다. 혁거세와 알영세력이 혼인으로 연합한 다음, 중국 유민 집단으로 선진문명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선도산 지역의 사소 세력과 모자관계로 동맹을 맺어 경주평야 중앙으로 진출하여 사로국의 맹주가 되어 신라를 건국한 것이다. 사후에 혁거세는 시조신으로, 사소는 선도산의 성모로 신격화한다.(이상 『삼국유사』의 해석은 졸저,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에서 많은 부분 인용함)


불교 수용 이전에 신라인은 삼산오악(三山五嶽)신앙에 따라 성모사(聖母祠)를 세워 서악의 산신으로 성모를 섬겼다. 불교 수용 후, 특히 본지수적설에 따라 이 땅 신라를 불국토로 간주하면서 경주의 서쪽에 있는 이 산을 서방정토로 비정하였다. 여기 서악이 극락정토이니 당연히 아미타불이 계셔야 하며, 그 아미타불은 서악의 돌 속에서 화신으로 나투셔야 한다. 이런 까닭에 성모사 옆에 있는 바위가 하필 안산암이라 부처를 새길 수 없는 상황임에도 굳이 아미타불을 조성한 것이다.


정을 대자마자 툭툭 돌이 덩어리로 떨어져나갔을 터인데 어떻게 하여 아미타불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불상을 새길 수 없는 바위에 불상을 만든 장인은 과연 누구이고 그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노력과 정성으로 이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상호도 잘 보이지 않고 5미터가 넘는 높이인데다 가슴도 당당하게 넓어 장중하지만 일견 투박해 보이는 저 불상 앞에서 최고의 예술미에 달한 불상보다 더 숙연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상 최고의 불상을 새긴 예술가도 정만 갖다 대면 균열이 가고 돌덩이가 떨어져 나가는 이 바위 절벽에 저 불상을 새긴 장인의 솜씨와 극락정토를 향한 지극한 염원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말리라.

 
천진한 미소년 얼굴의 관세음보살상. 
 

원융미의 정점에 석굴암 본존불이 있고, 질박미의 정수가 부처골 감실 부처상이라면, 신심과 예술혼의 정화가 바로 이 불상이라는데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장인은 돌이 떨어져나갈 때마다, 자신의 손가락에서 핏방울이 솟을 때마다 자신의 신심이 부족함을 탓하며 더욱 지극 정성을 다하여 불상을 새겼을 것이다. 장인이 정질을 하는 동안 아마 이 바위 아래에서 장인의 아내는 매일 삼천 배를 드리지 않았을까. 현재의 모습만 보고 미술가들이나 불자들이나 이 마애불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예술혼이 부족한 예술가들, 신심이 부족한 신자들은 당연히 이곳에 와서 영감을 얻고 신심을 다시 일으켜야 하리라.


아니, 적당주의에 빠진 한국인 대다수가 이곳에 와서 장인을 떠올리며 통렬하게 자신을 성찰하여야 한다. 결국 어려운 과정을 거쳐 불상이 서자 이곳은 공히 정토가 되었다. 이 산자락에 그리 고분이 많은 것도 신라인들이 이곳을 극락정토로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조성하니 비로소 정토
 

아침 햇빛은 이제 삼도를 지나 가슴을 훑고 내려간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정토요, 나는 지금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있다. 저것은 바위에 불상을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 속에 숨은 불상을 드러낸 것이다. 사바세계의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여 정토에 왕생하게 하리라는 아미타불의 서원이 체(體)라면, 그 마음이 지극한 장인을 통해 형상을 띠고 저 마애불로 자리한 것이 상(相)이요, 장인과 아미타불의 공덕으로 중생들이 구제를 받는 것이 용(用)이다. 그래서 저 불상은 1천여 년이 넘는 풍화 속에서도 모든 중생의 두려움이 없게 한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중생의 모든 소원을 다 이루어준다는 시여원인(施與願印)만큼은 남겼으리라.

천진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년의 얼굴을 한 관음보살은 “이곳에 오는 누구에게든 자비를 베풀리라.”며 그리 잔잔하면서도 신비로운 미소를 띠고 옆에 서 계신 것이리라. 굳은 의지를 가진 청년의 모습을 한 대세지보살은 “정토가 바로 여기이니, 한량없는 힘을 북돋아 주겠노라.”며 입을 꼭 다물고서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이리라. 양 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의 발은 지상에서 떨어져 있음에도 아미타불만은 지상에 발을 붙이고 있다. 내세인 정토로 인도하는 아미타불의 발이 땅에 붙은 의미는 현실에 굳게 발을 디딘 채 이상을 지향하는 신라인의 미학과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