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 般若 경주 양북면 골굴암 마애여래불
석공의 손에 쥔 정이 바쁘게 바위를 쪼아 내기 시작합니다. 여래의 전체적인 얼굴 윤곽은 무리 없이 쪼아 냈습니다. 양 쪽 귀와 육계도 별로 어려움 없이 쪼아 냈습니다. 여래의 눈썹과 코도 잘 그려 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문제입니다. 석불의 핵심 부분인 눈과 입 모양 입니다. 석불은 눈과 입 모양에 따라 그 표정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석공은 지난 100일 기도 중 꿈에 본 그 여래의 미소를 담아내려고 합니다.
엄숙하면서도 인자한 미소, 근엄하면서도 자애로운 미소, 위엄스러우면서도 인간적인 미소,
이런 여래의 미소는 바로 눈과 입술에서 나타내야 합니다. 정을 쪼는 강도가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합니다. 만약 한 번의 실수라도 있다면 다시 조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석불을 새긴 암벽은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석공은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파란 하늘에 7월의 따가운 햇살이 사정없이 대지 위에 내리꽂힙니다. 석공은 이미 온 몸이 땀에 흠뻑 절어 있습니다. 드디어 석공이 여래의 눈을 새기려고 조금 전에 새긴 눈썹 밑에 정을 갖다 댑니다. 그러나 석공은 손을 파르르 떱니다. 도저히 꿈에 나타나신 여래의 미소를 담아낼 자신이 없습니다. 석공은 할 수 없이 암벽을 내려왔습니다.
그는 석공의 인생을 걸어 온지 30년도 넘은 노련한 석공입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무수한 석불을 조각한 경험이 있는 석공 입니다. 그런데 이번만은 여래의 미소를 잡아 낼 자신이 서질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그 자신도 모릅니다. 그저 불안하고 손이 떨려 정을 때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튼 날도, 그 이튼 날도 석공은 여래의 눈과 입술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한 달, 두 달, 석 달....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습니다. 석공은 정과 망치를 들고 매일같이 암벽 위에 설치된 사다리에 올라가긴 하지만.... 번번이 정을 못 대고 그냥 암벽을 내려오곤 했습니다. 정을 바위에 대기만 하면 손이 떨려 바위를 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100일 지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입니다. 석공이 깊은 좌절 속에 꿇어 앉아 잠들어 있는데 갑자기 석공의 주위에 짙은 안개가 끼더니 안개 속에서 홀연히 지난 날 꿈에서 본 그 여래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여래는 석공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이였습니다.
"그대여! 그대는 석공이 아니고 그대 자신이 바로 여래이니라. 지금부터 다시 암벽에 올라 자신과 꼭 닮은 여래의 눈과 입술을 새기도록 할지어다."
석공은 벌떡 일어나 암벽에 올라 단숨에 여래의 눈과 입술을 쪼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정을 쪼는 그의 손은 석공의 손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여래의 손 이였습니다.
누가 감히 이 골굴암의 마애불의 미소를 흉내 낼 수 있겠습니까? 골굴암 마애여래불의 미소는 영원의 미소입니다. 그리고 그 미소 속에 이런 메시지가 담겨 우리에게 전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화내지 말고, 어떤 일이 있어도 분노하지 말고, 어떤 일이 있어도 질투하지 말고, 어떤 일이 있어도 오만하지 말고, 어떤 일이 있어도 미워하지 말고, 모든 것을 용서 하라는 여래의 미소입니다.
드디어 석공은 해 낸 것입니다. 그 후 천 수 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래의 미소는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은 덕지덕지 쇠 난간을 설치하여 참배객들 보다 몇 배 더 많은 구경꾼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씩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고 있습니다. 석회암 바위는 만지고 밟혀 점점 닳아지고.... 온갖 세속의 오염으로 여래는 숨조차 어려워하시고 있습니다.
<현 골굴사 일주문-근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 글은 지난여름에 쓴 것을 올리는 것입니다,
>2009.8.15) 미지로
문화재 정보
[골굴암마애여래좌상]-보물 제581호(경북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304)
▶골굴암(骨窟庵)
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에서는 흔히 보이는 형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자연환경 때문이다. 석굴을 조성할 정도의 대규모 암벽이 없고 또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대부분이라서 석굴을 조성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석굴암만 해도 자연석굴이 아니라 인공으로 만든 석굴사원인 것이다.
이 곳 함월산의 골굴암 석굴에는 수 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에 12개의 석굴이 나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 돋을새김으로 새긴 마애 불상이 있다. 조선시대 화가 정선이 그린 [骨窟石窟]이라는 그림을 보면 목조전실(木造 前室)이 묘사되어 있고, 숙종 12년(1686)에 우담 정시한이 쓴 { 山中日記} 에 의하면, 이 석굴들의 앞면을 목조기와집으로 막고 고운 단청을 하여 화려한 석굴들이 마을을 이룬 듯 하였으며, 법당전이니 설법굴이니 하는 구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굴은 법당굴 뿐인데 굴 앞면은 벽을 바르고 기와를 얹어 집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북쪽 벽에 감실을 파고 부처를 모셨으나 마멸이 심해 얼굴표정은 알길이 없다. 법당굴 말고는 여러 굴들이 모두 허물어지고 그 형체만 남아있다.
굴과 굴로 통하는 길은 바위에 파놓은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로 오르려면 자연동굴을 지나게 되어 있다. 절벽 꼭대기에 새겨진 마애불상은 오랜 풍화로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다. 바위를 이루는 석회암의 약한 성질 때문에 더 쉽게 부셔지고 있다. 지금은 철재 보호각을 설치해 놓긴 했지만 어쩐지 보기에 흉한 꼴이다.
골굴암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기림사 사적기에 따르면, 함월산의 반대편에 천생석굴이 있으며 거기에는 굴이 12곳으로 구분되어 각기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하였으니 골굴암은 기림사의 암자였던 것 같다. 원효대사가 죽은 뒤 그 아들 설총이 원효의 뼈를 갈아 실물크기의 조상을 만들 었다는 기록이 { 三國遺事} 에 보인다. 또 설총이 한때 아버지가 살고 있던 동굴 부근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골굴암이 원효대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골굴암 마애여래 좌상
골굴암이 있는 함월산의 석회 암벽에 정동남향의 여래조상을 양각하였다. 이곳은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의 행적이 이어졌음을 지금도 남아 있는 부윤의 이름과 인명의 낙서등으로 알 수 있다. 전체높이는 4m로 소발의 머리위에 육계가 큼직하고 상호는 원만하며 미소가 잔잔히 배어 나온다. 또한 백호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어깨부터 얼굴의 뒤쪽 암벽을 많이 깍아 내어 본존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무릎부분부터는 바위면에 음각만하여 자연에 조화롭게 했다. 양어깨를 덮어 물결모양으로 무릎아래까지 덮었고 가슴에는 승기지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비스듬히 흘러 있다.
의문은 음각으로 처리하였는데 약간 투박하다. 손의 모양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오른손은 풍화로 떨어져 나가 볼 수 없다. 왼쪽 손은 모지와 인지를 잡고 있다. 대좌는 구름문양위의 연화좌에 좌불 하도록 되어 있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형상을 하고 있다. 마모가 심하여 가운 데 일부분만 구름 문양임이 확인 되고 있다. 광배는 암벽을 다듬어 음각으로 하였으며, 머리 주변에는 단판연화문이 조각되고 밖앗으로 유려한 화염문이 거신광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의 석질은 모래가 많이 섞인 석회암이어서 비바람에 많이 파손되어 있으며 양어깨와 무릎 쪽이 특히 심하다. 몇 년의 보호 작업 끝에 1988년 비를 맞지 않도록 둥근 돔형의 천정을 만들고 암면에 화학처리를 하였다. 이 여래좌상은 통일신라전성기인 8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찾아 가는 길
경주시내에서 4번 국도를 타고 계속가면 추령터널이 나오고, 길 오른편으로 흘러가는 대종천을 만나게 된다. 거기서 윗 쪽으로 가면 장항리 절터이고, 동해안 쪽으로 계속가면 안동리 마을 삼거리가 나온다. 그 삼거리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서 좌회전하여 약 1km 정도 가면 왼편으로 꺾어지는 길이 나오는데 바로 골굴암 일주문으로 들어가는 초입이다. 차량은 일주문 앞 주차장에 세우고 도보로 일주문을 지나 700m 정도 들어가면 골굴사 건물이 나타나고 조금만 더 가면 거대한 철재 보호막으로 덮여 있는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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