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문화재 단상

18.반월성의 봄

migiroo 2009. 11. 22. 23:35

 

 

● 경주 반월성에서...

 

 

월성(반월성)에 들어서려니 해자(垓子) 입구 쪽에
만개한 노란 유채꽃이 가슴을 한없이 설레게 한다.
노란색은 밝고 건강함을 느끼게 한다는 색 이지만....
4월의 노란 색은 무엇이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넓은 노란 유채 밭을 바라보며 반월성으로 들어갔다.

 

 

 

반월성은 한 달에 몇 번씩이나 들락거리는 경주박물관 코앞에 있지만....
수년 전에 한 번 와 보곤 오늘이 두 번째 길이다.
사람들은 가까운 곳일수록 멀리하는 습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월성은 신라시대 왕궁 터이다.
그러나 지금은 옛 영화는 간 곳이 없고
그야말로 잔디가 깔린 축구장과 다름없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월성 외곽 주변에 설치된 해자> 

 

반월성 안에 있는 석빙고 앞이다.
내부는 청문으로 닫혀져 있어 창살 틈으로 안을 들려다 볼 수 있다.
 

 
전에는 석빙고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고 함부로 벽을 훼손 하는 바람에
지금은 단단한 쇠창살문을 달아 안으로 못 들어가게 해 놓은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한 떼의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석빙고 앞으로 몰려든다.
인솔 교사(여교사)가 석빙고 안을 가리키며 아이들에게 설명을 한다.
그런데 그 설명이 걸작이다.


"애들아 여기는 옛날 냉장고야 알겠니....?"

 

냉장고? 그럴듯한 비유인가?

옆에 있던 나이 지긋한 한분이 나에게 말한다.

 

"아니 냉장고라니.... 냉장고가 아닌데..."
"냉장고는 음식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는 곳이고,
석빙고는 단순히 얼음만을 보관하는 창고인데..."

 

듣고 보니 맞는 지적이다.
그리고 나는 그분께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이 석빙고를 냉장고라고 비유한 것은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석빙고가 냉장고 역할을 했다는 말이겠지요. 뭐~" 

"아니지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똑 바로 가르쳐야지.... 왜곡하면 되나..."

 

내 변명(?)에 그분의 단호한 부정의 대답이다.
 

 

 

5월의 반월성 잔디밭에는 아이들 천국이다.
싱싱한 초원 위에 노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밝은 희망과
싱싱한 환희를 느낀다. 
 

 

 

■ 반월성 문화재 정보 

 

            

 

 

 반월성은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흙과 돌로 쌓은 도성으로 둘레 2,400m이며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성내에 건물지가 있습니다.

이 성은 모양이 반달 같다 하여 반월성(半月城)·신월성(新月城)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곳이라 하여 재성(在 城)이라고도 하는데,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서의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101년(파사왕 22년) 에 쌓은 것으로 둘레는 1,423보(步)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월성을 궁 성으로 쌓은 뒤 금성(金城)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성 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 되었으며 나라가 커짐에 따라 부근 일대가 편입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문무왕때에는 안압지(雁鴨池)·임해전(臨海殿)·첨성대 일대가 편입, 확장되는 등 신라의 중심지였습니다.

 

동서길이 900m, 남북길이 260m이며 성안의 면적은 약 19만8000㎡ 이다. 성벽의 동·서·북면흔 대체로 흙과 돌로 기초를 다져쌓고 그 위를 정토로 덮었으며, 남면은 절벽인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거의 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경잡기(東京雜 記)>에 의하면 290년(유례왕 7년)에 큰 홍수로 인하여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에 보수하였으며, 487년 (소지왕 9년)에 다시 왕이 이곳으로 이거했다고 합니다.

 

신라의 제성 가운데서 가장 오랫동안 왕의 거성 이었던 반월성을 왕의 거처지로 삼은 것은 탈해왕 때부터 였습니다. 원소(元素)는 왜인(倭人)이라고 전하는 호공(瓠公)의 주거지였으그 땅이 명지(名地)임을 안 탈해가 계략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왕이 된후 거기에 왕실을 조영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왕을 축조하게된 것은 제5대 파사왕(婆娑王)22년(AD 101) 2월이며 7월부터는 왕도 여기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사기의 기록과 월성에서 출토된 기와 에 새겨진 글씨를 보면 월성의 중수중 에는 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고 태평을 누리던 문무왕 19년에 가장 대규모였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하의 하례를 받던 조원전(朝元殿), 숭례전(崇禮殿)과 정청(政廳) 이었던 평의전(平議殿), 그리고 외국 사신을 접 대하고 연회를 베풀던 임해전(臨海殿)과 그밖에 강무전(講武殿), 동례전 (同 禮殿)등이 있었고 여러개의 누각도 있었습니다. 또한 여러 궁전은 크고 작은 궁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귀정문(歸正 門), 임해문(臨海門), 인화문(仁化門), 현덕문 (玄德門), 준례문(遵禮門), 남문( 南門), 북문(北門)등의 이름이 남아있습니다.


 


>미지로(2008.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