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문화재 단상

20.아! 감은사지 석탑이여~

migiroo 2009. 11. 23. 15:35

 

 

●아! 감은사지 석탑이여!   

 

 

 

  

하늘은 맑은데 바람이 분다.
올 가을 단풍은 비가 적어 색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너무 일찍이 누렇게 퇴색해 버린 나뭇잎 들이 우수수
낙엽이 되어 허공을 맴돌다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느라니...
문득 그리운 그분의 모습이 울컥 가슴으로 파고든다.
차를 몰고 단숨에 그분에게 달려간다.

얼마만인가?
그분을 찾은 지가....?
한 일 년 쯤 됐을까? 
차에서 내리니 가을이 한 폭의 화폭이 되어
그분아래에 내려앉아 있다.

높은 언덕 위에 까만 찰주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그분은 변하지 않고 나를 반갑게 맞아주신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내 가슴에 그리움으로 각인되어 있는 바로 그분이시다.
경주 가면 삼층석탑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분만큼 사람을 감동시키는 탑은 흔치않다.
신라 탑의 시원이고 원조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바라만 보아도 사람의 마음을 여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분께 다가 서니 왁자지껄~
해 맑은 아이들 웃음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외로우실 줄 알았던 그분은 외롭지 않으셨다.
수학여행 온 아이들이 절터에 가득히 모여들어....
그분의 품안에서 즐겁게 뛰어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옛 절터 마당과 금당지 석재 위에서도 철없는 아이들이
신나게 맴놀이를 하고 있다.

 

어른들은 쉴 사이 없이 사진을 찍어대고 있고....
여기저기 단체에서 온 사람들이 열심히 해설사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감은사지....
이제는 더 이상 사색의 장소가 아니다.


감은사지 석탑은 그동안 완전 해체되어
보존 처리 보수 공사를 하고 있던 西 삼층석탑이
새 단장을 끝내고 마지막 주변 정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천년 탑과 현대의 총아 포크레인이 만나 데이트(?)를 하고 있다.
정말 기가 막힌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더 이상의 부식과 마멸을 막기 위하여 보존처리 중인 탑...
조금 있다가 東 삼층석탑도 해체 보수 되리라 한다.
그러나 현대의 첨단 기술로 아무리 보수를 한다해도
어찌 천년 세월을 막을 수가 있겠는가? 
   
아!감은사지 삼층석탑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 장중함과 거장함을 어찌 말로 표현 할 수 있겠으며,
글인들 어떤 형용사나 수식어로도 표현할 수 있겠는가.
도심 속의 초고층 빌딩이 아무리 높다 한들,
백두산, 설악산이 이 나라 땅에서 제일 높다 한들,
동해 바다 수심이 천길 깊다 한들...
감은사지 삼층석탑의 그 장중함고 거장함 보다야 높고 깊겠는가.


감은사지탑! 

 

  

그 앞에만 서면 왜 이렇게 내 자신이 초라해 지는 걸까?
그 앞에 서면 왜 가슴이 두근거리고, 주눅이 드는 걸까?
그저 한낱 돌에 불과 했던 것을 누가 어찌 했기에
이렇게 변모 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오늘 나는 이분을 만나기 위하여 또 찾아 왔다.
아마 이분을 찾아 온 것이 열 번도 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번 찾아 와도
올 때 마다 이분(탑)은 새로운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다.
탑령 천 수 백 년 이나 된 이분이 어떻게 올 때 마다  
새로운 모습이 되여 내게 다가 올 수 있는지 모른다.

 
이분을 깎아 새운 석공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결코 탑이 크다는 이유에서 느끼는 것이 아닌
저 거장 함과  장중함은 어데서 오는 것일까?
어떻게 저토록 고고하고, 단아하고,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어떻게 저 같이 안정적이고, 생동적이고, 역동적인 체감 비율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석공의 손은 신의 손 이였을까?  

탑을 바라본다.
그냥 바라보는 것 만이 아니다.
탑과 대화하고 그분의 마음을 찾는다.
당신을 이쪽에서 바라보고, 저쪽에서도 바라본다.
서서도 바라보고, 앉아서도 바라본다.
가까이 가서도 바라보고, 멀찍이 떨어져서도 바라본다.
바라보는 위치와 상태에 따라서 당신은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진작가들은 나보다도 더 극성이다.
석양이 질 때까지 기다리고,
비 올 때 찾아오고,
눈 내릴 때 찾아오고,
안개 낄 때 찾아 와서 당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이 분을 봐도
그 분에 대한 그리움의 갈증은 채워지질 않는다.
아니 채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비워 진다.
그렇게 당신을 바라보는 나 자신이 헛된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저분과 혜어짐이다.
 

절터 앞 주차장에는 용당리 마을 할매들이
주름진 손을 흔들며 솔잎 가루를 팔고 있다.
한 봉지에 5,000원....
그러나 나를 포함하여 사는 사람이 별로 없다.
우리가 왜 이렇게 인색하게 사는지 모른다.
부르릉 차의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나는 할머니들이 팔아 달라는
솔잎가루 한 봉지 안 팔아준 것이 후회되기 시작한다.
얼굴이 쭈글쭈글했던 그 할머니들에게서
돌아가신 어머님의 주름진 얼굴이 오버럽 되여 떠오른다.
U턴~~~
솔잎 가루 한 봉지를 사고 나니
왜 그렇게도 기분이 좋은지....
 

 

 

 ▶감은사지 가는 길 

 

 

 

>未知路

 

 

 

 

○감은사지와 삼층석탑에 대한 문화재 정보


▶감은사지-사적31호


 

      

 


감은사는 동해안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지금은 3층석탑 2기와 금당 및 강당 등 건물터만 남아있다. 신라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웠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왕이 죽자, 그 뜻을 이어받아 아들인 신문왕이 682년에 완성하였다.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절 부근의 대왕암이며,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강당·금당·중문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금당 앞에는 동·서쪽에 두 탑을 대칭적으로 세웠음을 밝혔다. 이 건물들은 모두 회랑으로 둘러져 있는데, 이러한 배치는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금당의 지하에는 배수시설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죽은 문무왕이 바다용이 되어 이 시설을 통해 왕래하였다고 전해진다. 금당 앞의 탑 2기는 우리나라의 석탑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석탑의 모범이 되고 있다.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나라를 보호하는 호국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언제 절이무너졌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문화재청)

 


▶감은사지 동, 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 


감은사터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두 탑이다.
2층 기단(基壇)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신라의
1탑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양식으로 가람(伽藍)배치가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등장한 최초의 탑이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 곳에 터를 잡았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탑에도 이어져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백제탑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그대로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치밀한 계산을 거친 정교한 비율로
짜 놓았다. 또한 거대함을 잘 살리기 위한 의도이기도 한데, 통돌을 사용하여서는 그러한 연출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탑을 세운 때는 신문왕 2년(682)의 일로, 경주에 있는 3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다.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감은사지 西삼층석탑내유물(感恩寺址西三層石塔內遺物)-보물  제366호 

 

     

 

감은사지삼층석탑 가운데 서쪽에 있는 석탑을 해체·수리하면서 3층 탑신에서 발견된 사리장치이다. 사리를 모시기 위한 청동제사각감과 그 안에 있던 사리기이다. 사리기를 넣었던 사리감은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발견 당시 몹시 부식된 상태였다.

사각형의 깊숙한 상자에 완만한 원뿔모양의 뚜껑이 있는 형태로, 전체 높이가 약 31㎝정도 된다. 사리감의 네 옆면에는 각각 사천왕상이 1구씩 새겨져 있고, 그 양 옆에는 각각 동그란 고리가 달려 있다. 주위는 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이는 모두 동판에 따로 새겨 작은 못으로 고정시키고 있다. 가장자리에는 꽃과 잎무늬로 가득 메운 가는 장식판을 이용해 단을 돌렸는데, 뚜껑의 둘레에도 마찬가지로 단을 돌렸다.

네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은 그 자세나 옷의 무늬가 중국 당나라의 조각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 표현기법에 있어서는 오히려 중앙 아시아의 조각상과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청동으로 만든 사리기는 정사각형의 기단과 사리병을 모셔 둔 몸체, 그리고 수정으로 만들어진 보주의 3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마치 목조 건축물을 연상케 한다. 사리기의 기단과 몸체 부분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하나, 그 윗부분인 보개는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식되었다.

사리기의 기단은 안상을 새기고 신장상을 배치하였으며, 기둥을 세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기단의 맨 위에는 난간을 돌리고, 그 안에 4개의 주악상과 4개 동자상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 사리병은 고리가 달린 그릇모양의 외피속에 넣고, 그 위에는 수정으로 만든 보주를 올려 놓았다. 감은사터의 사리장치는 오랜 세월에 많이 부식되어 원형 그대로는 아니지만 각 부분에 나타난 섬세하고 조각이 아름다운 중요한 문화재이다.

 

 

▶감은사지동탑사리장엄구(感恩寺址東塔舍利莊嚴具)-보물 제1359호


 

        

 

감은사지삼층석탑 가운데 1996년 동쪽에 있는 석탑을 해체·수리하면서 발견된 일괄유물 중 사리기 세트이다. 1959년에 발견된 감은사지서삼층석탑내유물(보물 제366호)인 청동제사리기와 구조가 비슷하며, 바깥을 감싸고 있는 외함과 안쪽의 사리기, 그리고 사리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함의 네 벽면에는 사리를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표현되어 있으며, 사천왕상의 주변에는 구름무늬를 새겼고 좌우에는 귀신의 얼굴 모양을 새긴 고리가 배치되어 있다. 사리를 모셔 둔 내함은 기단부, 몸체, 천개의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부의 네 모서리에는 별도로 만든 사자가 있으며 기단면에는 안상(眼象) 모양의 장식을 크게 투조하였다. 투조된 내부에는 신장상과 공양보살상이 각각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다. 몸체는 사리를 넣어둔 복발형 용기를 중심으로 사천왕과 승상을 각 네구씩 따로 만들어 배치하였으며, 외곽으로는 난간을 돌리고 네 모서리에 대나무 마디 모양의 기둥을 세워 천개를 받치고

있다.

수정으로 만든 사리병은 높이가 3.65cm이며, 정교하게 금알갱이 장식된 뚜껑과 받침, 그리고 원판 수정제 받침, 금동제 투조받침 등과 세트를 이루고 있다. 이 사리기 세트는 제작기법이나 유물 형태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공예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불교조각사와 공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996년 감은사지 동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하던 중 발견된 일괄유물 중 사리기 세트이다. 1959년에 발견된 감은사지
서삼층석탑내유물(보물 제366호)인 청동제사리기와 구조가 비슷하며, 사리를 직접 안치한 내함인 전각형 사리기와 이를 덮고 있는 방추형 뚜껑을 가진 외함, 그리고 수정제 사리병 등으로 구성된다.

사리기 외함의 사벽면에는 사리를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압출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사천왕상의 상하 및 좌우에는 운문을 새겼고 좌우에는 귀면 장식을 한 고리가 배치되어 있다. 사리를 안치한 내함은 기단부, 신부, 천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단부의 네 모서리에는 별도로 만든 사자가 있으며 기단면에는 안상을 크게 투조하였다. 투조된 내부에는 신장상과 공양보살상이 각각 양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기단 상단부인 신부는 사리를 안치한 복발형 용기를 중심으로 사천왕과 승상을 각 네구씩 따로 만들어 배치하였으며, 외곽으로는 난간을 돌리고 네 귀에 죽절형 기둥을 세워 천개를 받치고 있다. 수정제 사리병은 높이가 3.65cm이며, 누금기법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뚜껑과 받침, 그리고 원판 수정제받침, 금동제 투조받침 등과 세트를 이루고 있다.

『삼국유사』2, 만파식적조(萬波息笛條)의 기록과 관련하여 제작연대(감은사의 낙성연대: 682년)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유물로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기와 전각형 사리기인 점은 같지만, 제작기법, 세부문양, 조형물 등에서 다소 다른 특성을 보인다. 문무왕과도 연관된 유물로, 정교한 누금기법 등 당대 최고의 기술과 노력으로 제작된 통일신라시대 불교 공예품의 백미로 판단된다. *이상 문화재 정보는 문화재청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