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문화재 단상

24.진덕女王을 만나러 가다.

migiroo 2009. 12. 25. 12:25

 

 

진덕女王을 만나러 가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시간이라는 괴물에 붙잡혀 거대한 과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2009년 기축년도 역사 속으로 묻히려하고, 찬란했던 신라도 역사 속으로 묻힌 지 이제 천 수백 년이나 흘러 이제는 희미한 유적지로만 남아 있다.


그 희미한 유적지 중의 하나, 오늘은 신라의 또 다른 여왕 진덕(眞德)왕릉을 찾아간다. 진덕왕릉은 경주 시내(왕경지역)주변에 묻혀 있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시내에서 먼 경주 현곡면 오류리 야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왜? 여왕은 서라벌 왕경지역이 아닌 그 외진 곳에 묻혔을까?
아마도 그 시대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현곡면 진덕여왕릉이 위치해 있는 야트막한 야산 아래에는 또 다른 신라의 러브스토리가 서려 있는 오류리 마을이 있다. 몇 해 전만해도 여왕릉을 찾아 가기 위해서는 마을 주변에 차를 주차하여 현지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등 미안함을 느끼곤 했었는데 이제는 길이 포장길로 바뀌여 있고 릉을 찾는 사람들을 위하여 작은 주차장도 마련해 놓아 이제는 부담 없이 여왕의 능을 찾을 수가 있게 됐다.


 

 


마을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니 울창한 소나무 길이 발걸음을 즐겁게 한다.
겨울철 소나무 밭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화폭을 연출한다.
여름, 가을 내내 소나무 아래 무성하게 자라던 잡초들이 하나도 없고 이리 저리 휘어진 늙고,

젊은 소나무 가지들이 귀갑 같은 껍질에 둘려 싸여 빼곡히 보이기 때문이다.  
    

 

 

날씨는 꽤 차갑지만 소나무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 제법 즐겁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내려앉은 하얀 햇살 위에 청솔모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인기척에 놀라 쏜살같이 나무 위로 숨어 버린다.


능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고적하다. 다만 소나무들이 그 고적함을 달래 주고 있다.
신라의 왕릉에는 왜 소나무가 유독 많은 걸까?
그것은 아마도 비바람을 막는 능의 보호수 역할에 효과적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 든다.

송림 속에 묻혀 잠들어 있는 여왕의 무덤을 찾으니 왠지 애잔한 기운이 무덤 주위를 맴돌고 있다.


여왕의 능은 시간이 정지된 곳에 있는 듯 적막에 싸여 있다.
그래도 무덤 주위에 둘러 처져 있는 호석의 12지신 상이 능의 품위를 말해 주고 있다.


 

 

 

사촌언니 선덕여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그녀...,
27대 선덕, 28대 진덕, 51대 진성. 이 세분의 신라 여왕 중 가장 용모가 아름답고 키가 7척의 늘씬한 미모를 지녔다는 진덕여왕... 그러나 역사를 알고 보면 늘씬한 미모 운운하는 것도 부질없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나이 이순(耳順)이 된 후에야 우연곡절 끝에 왕위를 물러 받았으니 할머니가 다 된 뒤에 왕이 된 셈이다.(요즘 여자 나이 60은 젊은 축에 들지만 그 때 60 나이 이면 어떤 모습였을까?)

 

 


 
그러니 그녀의 미모보다는 탁월한 외교능력(당과의)과 주변국가의 위협으로부터(고구려와 제)나라를 지키려는 그녀의 호국정신이 더 아름다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녀 밑에 김춘추나 김유신 같은 거물급 장수가 있었으니 남성으로부터 여자로서 자긍심 또한 크게 고취했을 것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사상은 조선시대부터 있었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는 남녀평등주의였음이 이 세 여왕을 보더라도 증명(?)이 되는 셈이다.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동생 *갈문왕 국반의 딸이고 이름은 승만이다. (*“갈문왕 국반”이란 신라 초기나 중기 시대 때 최측근 왕족들척에게 주어진 일종의 봉작이다.) 진평왕 아우의 딸이니 선덕여왕에게는 사촌 동생이 된다. 선덕여왕이 647년 비담의 난 중에 병을 얻어 죽자 그녀에게 왕위가 돌아갔는데 왜 그녀가 왕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길 없다. 다만 선덕여왕 이 후 왕위를 계승할 남자 성골이 없어 성골출신인 진덕에게 왕위를 물려 준 복잡한 정치적 사정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로서 진덕왕 때까지 성골 출신 왕이 끝나고 29대 무열왕(김춘추)부터는 진골 출신이 왕이 된다. 진덕여왕의 재위 기간(647∼654)은 7년 정도로 비교적 짧았다. 그러니 김춘추에게 왕권이 넘어가는 과도기 왕으로서 소임을 다했을 것이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에 비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그다지 많지 않다. 아무튼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무난히 정치를 잘한 여왕으로 삼국사기나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능에 호석(護石)에 조성된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돌아 본다.
마모가 심하고 십이지 열두 가지의 상 모두 있지는 않지만 선덕여왕 이후 왕의 무덤에 십이지가 등장하는 변화된 무덤형식을 볼 수 있다. 무덤에 12지 조성 유래는 아무래도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2지상이 우리나라에 무덤에 도입되고 부터는 중국과는 달리 독특한 형식으로 바뀌어 통일신라 시대의 독립된 무덤 형식을 낳게 했다.

 

 

 

신라왕의 무덤에 십이지신상이 등장하는 때는 33대 성덕왕 때부터라는고 전한다. 그렇다면  그 선대인 진덕여왕릉에 십이지가 등장했으니 현재의 무덤이 진덕여왕의 능이 아닐 것이라는 학자들의 견해이다. 진덕여왕릉의 십이지상은 조각 수법도 아주 후대의 것이라 하여 학자 간에는 현재의 무덤 주인이 진덕이 아닐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 같은 비학자들이야 그런 아리송한 말을 가지고 누구의 무덤이 아니라고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냥 공식적으로 나와 있는 무덤 이름을 믿으면 될 뿐이다.
진덕여왕의 릉 이라고 하면 그렇게 믿으면 되기 때문이다. 
의심이 많아지면 혼란만 가져온다.
무덤의 진위가 어떻게 판정될지 모르나 국가(문화재청)에서 지정한 대로 따르면 될것이다.

 

선덕여왕이라는 인기 드라마가 종영 됐으니 뒤 이어 진덕여왕 드라마도 해 봄직 한데...

어떨지 모르겠다.
 
>미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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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간 (1)


진덕여왕릉 도굴이야기
 
1997년 8월 어느 날...,
여왕의 능에 도굴꾼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능의 동북쪽 호석 하단부에 45도 각도로 길이 3m 폭 1m 정도의 흙을 파헤쳤다. 그리고 그들은 잠시 후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 날 능 관리인이 이를 발견하고 급히 신고를 했다. 황급히 현장에 달려온 경주문화재연구소 및 관계자들....도굴의 흔적을 정밀 조사해 본 결과 능 내부에까지는
다행스럽게도 도굴이 미치지 못하였음을 알고 다시 흙을 덮고 능을 원상복구 해놓았다.

진덕 왕릉은 도심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고, 후미져 항상 도굴의 위험에 처해 있는 곳이다.
경주에는 시가 관리하는 왕릉이 36기나 된다고 하는데...그 중 이미 12기가 이미 도굴된바 있고 나머지도 도굴 여부가 불확실한 상태라 한다.
도굴범들은 파낸 흙을 다시 메우는 등 범행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전문가라 할지라도 도굴사실을 모르기 쉽다고 한다. 문화재를 도굴하는 놈들은 도독놈 보다 더 악질범이다.
법을 고쳐서라도 문화재 도굴범의 처벌을 더 강화해야 할 것이다.
중요 문화유적마다 감시 카메라도 달아야 할 판이다.

 


■또 잠간(2)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왜 자식이 없었을까? 


화랑세기 등 기록에 보면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도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남자를 여러 명 두었다. 그래서 선덕여왕대에는 삼서제도(三壻制度)가 실행 되기도 했다. 삼서제도란 왕녀가 자식이 없을 때 남편을 3명까지 둘 수 있게한 제도이다.
이 제도에 따라 선덕여왕도 김용춘, 흠반, 을제 등의 3명의 남자와 결혼했지만 끝내 자식을 낳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왜 선덕, 진덕여왕 모두 자식이 없었을까?
그 이유를 당시는 몰랐겠지만 현대 의학적 개념으로 풀어 본다. par바로 근친혼에 대한 생식적 유전자의 이상 현상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의 부모는 근친결혼이었다. 진평왕의 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들 동륜태자이고 진평왕의 어머니는 진흥왕의 사촌 여동생 만호부인이다.
 par이렇게 거듭된 근친결혼은 생식 유전자에 이상을 가져올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지게 된다.
일반적 유전 법칙으로는 우성 유전자는 1세대에 나타나고 열성 유전자는 2세대 이후에 더 뚜렷이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par이런 것들을 고려해 보면 선덕여왕이 자식이 없는 주된 이유는 거듭 반복되는 근친혼의 결과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불임은 성골과 진골로 대표되는 신라의 골품제도에 기인한 피해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註

●우성 유전자(優性遺傳子 , dominant)은 멘델의 유전법칙에서 도입된 단어이다. 서로 다른 대립형질(allele)의 순종끼리 교배한 잡종 제1대에서 나타나는 형질을 우성이라 한다.
●열성 유전자(劣性遺傳子, Recessive gene)는 서로 다른 대립 형질 중에서, 두 형질이 동시에 있을 때 나타나지 않는 형질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