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문화재 단상

23.진평왕 과 선덕여왕 릉에 가다.

migiroo 2009. 12. 17. 03:42

 

 

●진평왕 과 선덕여왕 릉에 가다.
 

공원 같은 진평왕릉


올 겨울은 비교적 따뜻하다고 한다.
따뜻하다고 해서 좋아 할일이 아닌 것 같다.
모두가 환경오염에 따른 지구 온난화 현상이기 때문이다.
며칠 춥다 했는데 오늘은 봄 날씨 같다.
울산-경주 간 7번 국도를 달린다.

 

오늘은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잠들어 있는 진평왕 과 선덕여왕의 무덤(릉)을 찾아 간다.
이 두 왕은 요즘 한창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 때문에 유명해 졌다.
초등학생은 물론 코 흘리게 유치원 아이들까지   미실, 진평왕, 덕만이, 비담, 유신공 등등....
역사 인물을 줄줄이 외우고 있으니 TV의 위력이 과연 쌔긴 쎈 것 같다.

 

그러나 심히 우려스러운 것은 역사의 진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드라마 내용을 아무런 여과 없이
우리 아이들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역사를 아는 어른들이야 드라마를 그냥 재미로 본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으니 걱정이 되는

것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미실”만 해도 그렇다.


거의 드라마 종반까지 중요 인물로 등장한 미실세주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단 한 마디 밖에 언급하지 않았고 화랑세기에서만 잠시 등장한 인물인데...
그 화랑세기 마저 진위를 알 수 없는 형편이다.
드라마는 온통 “미실”의 이야기로 이어갔고, 정작 주인공 선덕여왕은 미실에 밀려

뒷전으로 밀려났다. 순전히 작가의 상상만으로 각색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먼저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릉부터 가 보자.
진평왕의 릉은 경주 보문동 들판에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논밭에 둘러 싸여 능역이 답답했었는데 근년에 경주시에서 능역을

말끔히 정리하여 마치 무덤이 아니라 아름다운 공원처럼 만들어 놨다.
나들이 가족이 아이들을 데로고 능역 주위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다.
유적지 답사를 나온 사람들이 무덤을 꼼꼼히 살피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무덤과 나무의 조화가 너무 아름답다.
이쯤 되면 무덤이 무서운 곳이라는 인식을 버려야 될 것 같다.
유연하게 뻗어 있는 소나무와 봉분의 부드러운 곡선미가
사람의 심성을 한없이 부드럽게 해 준다.
삭막한 도심지에서 잠시 탈출하여 이런 한적한 능을 찾아
심신을 쉬게 하는 것도 재충전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옷을 다 벗어 버린 아름드리 겨울 나목(裸木)들이 무덤 주변에 서서
묵묵히 왕의 무덤을 지키고 있다.

나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법정 스님의 무소유(無所有)가 생각난다.

때가 이르면 미련없이 잎을 다 벗어버는 나무....

사람들도 나무의 무소유 철학을 배워야 할 것이다.  


신라의 26대 진평왕은 자그마치 52년 하고도 반년이나 왕위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에 기리 남을 최초의 여왕을 탄생 시킨 왕이다.
왕위를 물려줄 성골적통의 아들이 없어서였겠지만 아무튼 선덕여왕은
삼국통일의 기틀을 잡아 준 위대한 여왕이었으니 여식에게 왕위를
물려준 진평왕의 결단이 빛나고도 남는다.
 


진평왕의 원래 이름은 백정(百淨)이고, 왕비는 마야(摩耶)부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아버지 이름이 백정이고, 어머니 이름이 마야였으니

그 이름을 딴 진평왕이야 말로 불교신봉을 뛰어 넘어 자신을 부처로 자처했던 것은 아닌가?
왕즉불(王卽佛), 즉 “왕이 곧 부처다.”라는 사상이 유행한 때가
있었으나 자신의 이름마저 석존의 가(家)의 이름을 따를 정도이니
그 불심인들 얼마나 컸겠는가.


드라마 이야기를 또 해 보자. 그런 진평왕이 드라마에서는
이야기 내내 미실한테 쥐어서 나약한 왕으로만 동장한다.
이 무덤 속에 있는 진평왕이 그 드라마를 봤더라면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찾아 오는 사람많은 선덕여왕릉


 

 
진평왕릉을 뒤로 하고 수확이 끝난 황량한 보문 들판을 가로 질러
낭산(狼山)으로 올라간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선덕여왕릉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너무 좋다.


선덕여왕은 낭산을 수미산의 제석천왕이 사는 도리천(忉藺?)이라 했다.
그래서 자신이 죽으면 낭산 즉, 도리천에 묻으라고 유언까지 했다.
지금 선덕여왕이 잠든 무덤이 바로 도리천인 셈이다.
도리천 아래에는 사왕천이다. 그래서 선덕여왕 능 아래에는
아주 큰 절인 사천왕사지가 있다.

 

 


오솔 길을 지나니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여왕의 무덤이 보인다.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뜻인가?무장 군인들이 열병을 하며 여왕의 무덤을
호위하고 있다. 유신(김유신)의 군사인가?
 

 

여왕! 하면 영국의 에리자베스 여왕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도 여왕을 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멋진 나라다.

신라에만 여왕이 3명이나 있었으니 얼마나 여권(女權)이 보장된
민주적인 나라이었든가. 그리고 얼마나 멋진 민족인가.

 
덕만이로 더 알려진 최초의 여왕“선덕”여왕...

 
선덕여왕이 누구인가.
여왕의 재위기간은 15년 정도로 그리 길지 않았다.
50대라는 당시로서는 늙은 나이에 왕에 올랐으니 왕 노릇을
오래 할래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삼국은 물론, 고려, 조선시대 등 전 왕조를 통 털어 왕에 대한 설화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가장 많은 왕이 바로 신라 27대 선덕여왕이다.
왕은 앞일을 예지하는 신통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삼국유사에서도 그녀의 신통력이 언급 되어있다.
바로 그 유명한 “선덕여왕 지기삼사(善德女王知幾三事)”이야기이다.


여기에 그 이야기는 생략한다.
아무튼 선덕여왕은 그 어떤 남자 왕보다도 예지력과 통찰력이 뛰어난
왕이었고 국가의 통치도 아주 훌륭히 해 나간 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즘 초등학교 고학년들에게 선덕여왕에 대하여 물으면 어른들보다도
더 잘 안다. 선덕여왕의 치적이 무엇인가 물으면 서슴없이 대답한다.


우선 동양 최대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새웠었다.(놀이 약 80m)
그 유명한 천문대 첨성대도 새웠다.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분황사를 지었다.
영묘사라는 큰 절도 지었다.(지금은 없음)

 

 


백성들에게는 조세를 면제해 주는 등 선정을 폈다.
당과의 평화을 잘 유지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막아 내는 등 군사 강국을 만들었다.
말년에 비담의 난 등으로 병을 얻어 죽자 그녀의 사촌 동생
진덕에게 왕위를 물러줌으로서 두 번째 여왕을 탄생시켰다.


선덕여왕에 대하여 이야기 하자면 끝도 없다.
요즈음 경주남산, 무장산은 물론이고 문경, 단양 등에 가면
선덕여왕 촬영지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줄지어 새워져 있다.
과시 전국이 선뎍여왕 열풍에 쌓여있다.
이러한 때 선덕여왕이 잠들어 있는 경주 낭산을 과 진평왕이 잠들어 있는
경주 보문 들판을 자녀들과 함께 찾아보는 것도 멋진 여행이 될 것이다.

 
 

●무덤의 호칭에 대하여

 

무덤에는 능(陵), 원(園), 묘(墓) 등이 있다. 이 능·원·묘는 왕족과 다른 신분을 구분하기 위해 만든 무덤 명칭이다. 능과 원은 왕족의 무덤인데 그 중에서도 왕과 왕위를 계승할 세자, 즉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비, 그 직계 손(孫)의 무덤이고 그 외 왕족 혈통과 일반인의 무덤을 묘라 하였다.능(陵)은 일반적으로 왕과 그 비의 무덤을 말한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세손과 왕세손비나 왕의 생모인 빈(嬪)과 왕의 친아버지의 무덤에 붙인다.
묘(墓)는 기타 빈(嬪), 왕자, 공주, 옹주 등 왕족과 일반인들의 무덤에 속한다. 왕족이 아닌 일반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무덤을 묘라 하였다. 김유신묘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외에도 장군총·무용총과 능산리고분·안악1호분처럼 '총'과 '분' 형태의 무덤도 있다.
총(塚)은 주인공은 누구인지 알 지 못하지만 벽화 등 특징적인 것이 무덤에 있을 경우에 붙인 무덤이고, 분(憤)은 주인공도 모르고 특징점도 없을 때 붙이는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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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8

 

 

 

■진평, 선덕영왕에 대한 문화재 정보

 

●진평왕

 

▶진평왕릉 [新羅眞平王陵]-사적180호
   위치 : 경주 보문동 보문들판

 

1969년 사적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보호구역 4만 3645㎡. 631년경 조성. 구황동(九黃洞) 3층석탑의 동쪽, 넓은 평야 한가운데에 있다. 그 동쪽에 명활산(明活山), 남쪽에 보문사터가 있으며, 서쪽에는 낭산(狼山)이 솟아 있다.

표식의물(表飾儀物)이 없는 밑둘레 약 10m, 높이 약 7m의 원형 토분으로, 주위에는 몇 그루의 나무만 서 있을 뿐이다. 진평왕릉이라고 구전되어 왔는데,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진평왕의 장지인 한지(漢只)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그 규모로 미루어보아 왕릉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진평왕(眞平王 | ?∼632 | 재위 579∼632) : 신라 제26대 왕


이름은 백정(白淨)이다.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金玄宗)의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 혹은 萬內夫人)이다. 왕비는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화랑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제25대 진지왕(眞智王)이 사도부인과 미실의 뜻에 따라 이찬 노리부와 세종에 의해 제거되고, 그들에 의해 아직 나이가 어렸던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진평왕에 대한 묘사를 보면, 태어날 때부터 기이한 용모였고 신체가 장대하고 뜻이 깊고 굳세었으며, 지혜가 밝아 사리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진평왕은 지속적인 관제정비를 실시하는데 이것이 왕권을 강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즉위년(579) 8월에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고 580년(진평왕 2)에는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해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581년에는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를, 583년에는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고, 대감(大監)과 제감(弟監)을 각각 1인씩 두었다. 584년에는 국가의 공부(貢賦)를 관장하는 조부(調府)를 설치하고 조부령(調府令) 1인을 두었으며, 거승(車乘)을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설치하고 승부령(乘府令) 1인을 두었다. 586년에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禮部)를 설치하고 예부령(禮部令) 2인을 두었다. 591년에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領客府令) 2인을 두었다. 말기인 622년 2월 궁정관부를 총괄하는 내성사신(內省私臣)을 설치하였고, 623년 정월 병부에 대감 2인을 두었으며, 624년 정월 시위부(侍衛府)에 대감 6인, 상사서(賞賜署)와 대도서(大道署)에 대정(大正) 1인을 각각 두었다.


584년에 독자적인 연호 ‘건복(建福)’으로 개원하여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천명하였고, 중국 수(隋)와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특히, 이때에는 승려들이 고도의 불교문화를 수용하기 위해 떠나고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고승 지명(智明)은 진평왕 7년(585)에 남조(南朝)의 진(陳)으로 구법을 위해 떠났다가 602년에 수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상군(上軍)과 함께 귀국하였고, 후에 왕의 존경을 받아 대덕(大德)이 되었다. 589년에 진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원광(圓光)은 600년에 조빙사(朝聘使)인 나마(奈麻) 제문(諸文)과 대사(大舍) 횡천(橫川)과 함께 귀국하였으며, 596년에 수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고승 담육(曇育)은 605년 수나라에 파견되었던 입조사(入朝使) 혜문(惠文)과 함께 귀국하였다. 불교 진흥과 왕권 강화라는 측면에서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승려들은 비단 종교적인 일뿐만 아니라, 원광의 ‘걸사표(乞師表)’작성에서 보듯이 세속적인 국가사에도 적극 관여함으로써 당시 불교는 특유의 호국불교적 성격을 가졌다.
진흥왕대의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당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양국의 빈번한 침입을 받았다. 602년에는 백제 무왕이 내정 안정과 실지(失地) 회복을 목적으로 좌평 해수를 시켜 아막성(阿莫城 :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을 공격하게 했고, 603년에는 고구려 영양왕이 장군 고승을 보내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침입해왔다. 이에 진평왕은 양국의 침입을 방어하는 한편, 만세와 혜문 등을 사신으로 수에 보내 지속적으로 청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정권교체기에 있던 나라 내부사정 때문에 군사를 내는 것이 어렵게 되어 신라는 양국의 공격 앞에 놓이게 된다. 결국 진평왕은 608년 원광(圓光)에게 걸사표(乞師表)를 짓게 하여 재차 청병을 하였고, 612년에 수 양제(煬帝)는 고구려 정벌을 일으킨다. 이후 백제는 611년에 신라의 가잠성(假岑城 :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을 함락시키고, 616년에는 모산성(母山城 :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을 공격하였다. 623년부터는 늑도현 침입을 필두로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 624년에는 신라에 속한 6성(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혈책)을 동시공격하게 되고, 이에 따라 신라는 봉잠, 앵잠, 기현 세 성이 함락당하는 등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 무렵 신라는 618년에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당과 621년부터 조공관계를 수립하고, 지속적으로 외교사절을 파견하였다. 신라는 이러한 외교관계를 고구려에 대한 당의 외교적 견제라는 정치적 방법으로 이용하였다. 하지만 신라는 계속되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어 625년 당에 사신을 파견해 고구려의 빈번한 침입으로 인해 당에 대한 외교통로가 막히게 되었음을 호소하였다. 이에 당 고조는 626년에 사신 주자사(朱子奢)를 신라와 고구려에 보내 양국이 화합하라는 외교적 중재에 나서, 그 결과로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기도 하였다.


진평왕은 재위 54년인 632년에 별세하니,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 당 태종(太宗)이 국서를 보내어 진평왕을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로 추증하였으며, 왕위는 둘째딸인 덕만(德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에게 돌아갔다. 가족으로는 정비 마야부인과 후비 승만부인, 후궁으로 이화랑의 딸인 화명과 옥명 넷이 있었고, 마야부인에게서 천명공주와 덕만공주를 얻었다.

 

 

 
●선덕여왕

 

▶선덕여왕릉 [善德女王陵] -사적 182호
   위치 : 경주 낭산 기슭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능으로 646년경에 조성되었다. 1969년 8월 27일 사적 제182호로 지정되었으며, 낭산(狼山) 보호구역에 포함된다. 사천왕사(四天王寺) 위 낭산의 정상에 있는데, 현재의 상태는 봉토(封土) 밑에 둘레돌을 쌓은 원형의 토분(土墳)이다. 둘레돌은 잡석을 비스듬히 2단으로 쌓았고 그 밖으로 드문드문 둘레돌의 높이와 비슷한 대석을 기대어 놓았다. 이로 미루어 무열왕릉의 봉토 밑에 노출된 자연석의 한 부분은 결국 이러한 형식의 둘레돌이 봉토에 의하여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는 다른 표식의물(表飾儀物)이 없고 다만 전면에 상석(床石)이 있으나 이것은 후세에 설치된 것이다.


▶선덕여왕(善德女王 | ?∼647) : 신라 제27대 왕

 

진평왕과 마야(摩耶) 사이에서 태어나 신라 제27대 왕이 되었다. 성은 김(金)씨이고 이름은 덕만(德曼), 호는 성조황고(聖祖皇姑)이며, 시호는 선덕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32년에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국인들이 장녀인 그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리며 왕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형제로는 천명(天明)이 있었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는 천명과 덕만을 자매관계로 전하고 있는데, 『삼국사기』는 선덕을 장녀로 전하는 데 반해, 『화랑세기』는 천명을 장녀로 전하고 있는 데에서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에는 선덕여왕의 용모를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는 것과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龍鳳之姿 天日之表)을 지녔다고 전하고 있다.
『화랑세기』에는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이 선덕의 언니로 되어 있다. 진평왕 재임시 적자가 없어 용춘의 형 용수를 사위로 삼고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하지만 천명은 용수의 동생인 용춘을 보다 사랑하였고, 결국 용춘이 천명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명의 동생 선덕이 성장하면서 용봉의 자태와 태양을 위용을 보이자, 진평왕은 그에게 더욱 마음이 가서 천명으로 하여금 그 자리를 선덕에게 양보하게 하였고, 이에 천명이 출궁을 하게 되었다. 한편 용춘은 진평왕의 명으로 선덕을 받들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선덕이 즉위 후에 삼서의 제도에 의해서, 을제공과 흠반공이 선덕을 모셨지만 이들 또한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
즉위년(632)에 대신 을제(乙祭)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사자(使者)를 파견해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며, 633년에는 신궁(神宮)에 제사를 지내고 주(州)·군(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해 주는 등 일련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634년에 분황사(芬皇寺),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634년부터는 진평왕의 ‘건복(建福)’ 연호에 이어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신라 왕실의 자주성을 천명하였다.
신라는 642년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인 침공을 받았다. 같은 해 7월에 백제 의자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 성을 빼앗아 당으로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다.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도 고구려·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또한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낙동강 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쳐서 성이 함락되었고 성주인 품석과 죽죽, 용석 등이 전사하였다.
외환의 위기에 직면한 선덕여왕은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군주(軍主)로 임명해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였다. 643년에는 당에 사신을 파견해 고구려와 백제가 침범함을 아뢰고 군사를 빌려 구원함을 요청하는데, 이에 당 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양국의 침범을 받게 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자신의 종친 한 사람을 보내 신라의 임금으로 삼으라는 등의 전혀 수용 불가한 계책만을 일러주었다. 한편 644년에 당태종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裝)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신라를 공격하지 말것을 촉구하는 등 외교적 견제를 가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끝내 이를 거부하여 전운이 고조되었다.
645년에 당 태종이 친히 고구려를 공격하니, 선덕여왕이 군사 3만을 내어 그를 도왔다. 백제가 그 틈을 노려 신라 서쪽의 7성을 빼앗았다. 647년에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만에 왕이 죽고, 흉조라 일컬어지는 유성이 월성 쪽으로 떨어지는 등 불길한 일이 생겼지만, 김춘추와 김유신의 계략으로 이를 진압했다.
선덕여왕은 재위 16년 만에 죽었으니, 시호(諡號)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 지냈다. 선덕여왕은 후사가 없었으므로, 이후 진평왕의 친동생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과 월명(月明)사이에 태어난 딸인 승만이 신라 제28대 왕에 오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