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는 단종의 청령포 눈물
“血淚春谷落花紅”
(혈누춘곡낙화홍)
2010년2월24일. 이른 새벽, 길을 떠난다.
내일부터는 비가 내릴 것이라는 기상예보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다.
비가 올 확률이 20%라 했으니 아마도 조금은 비가 내릴 지도 모른다.
아직 날씨가 추운데 비까지 내리면 어쩌나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오전 10시 영월 땅에 도착했다.
영월이 어떤 땅인가.
어린 임금 단종의 한이 서린 땅이 아니던가?
나는 오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영월 땅을 찾아 단종을 만나려 왔다.
2월의 영월 땅은 비도 안 오는데 온통 질퍽질퍽 끈적거리는 진흙땅이다.
땅을 밟을 때마다 진흙이 덕지덕지 신발 밑에 집요하게 달라붙는다.
겨우내 쌓였던 눈과 얼음이 녹고, 꽁꽁 얼었던 땅이 해동 되면서 땅이
슬슬 풀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그 질퍽거림이 해동(解冬)의 꿈트림이 아니고
단종의 한과 눈물이 되어 내 깊은 심연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청령포에 가다.
어디선가 단종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강 쪽이다.
단종이 유배되어 죽은 청령포을 끼고 흐르는 서강...
강물은 죽은 듯, 산 듯 깊은 적멸 속에 흐르고 있다.
어린 단종이 세조에 의해서 유배된 그 때에도 강물을 이렇게 흘렀을 것이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왔다 하기를 되풀이 한다.
단종어소.
▲단종이 유배생활을 했던 집 단종어소
,
▲시녀들이 살았던 초가집
건물이 두 체,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다.
한 체는 기와집이고 또 한 체는 초가삼간이다.
기와집은 단종이 유배 생활 중에 쓰인 집이고,
초가집은 단종을 시중하던 시녀들이 기거하던 집이란다.
물론 단종이 기거했던 기와집도 원래는 초가집이었을 터...
허물어 없어진 것을 근대에 들어서서 새로 지은 집일 것이다.
방문을 여니 단종 임금이 거기에 앉아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임금 아니고 노산군(魯山君)이다.
단종이라는 임금의 직함은 이미 세조(世祖)가 강탈해 갔기 때문이다.
나는 차마 대군(大君)이라 부르지 못하고
깎듯이 임금의 칭호를 사용했다.
“전하 어찌 아직도 거기에 앉아 계시옵니까?”
“전하 울고 계시는군요.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 있나이까?”
그러나 단종은 말이 없다. 그저 눈물만 줄줄 흘리시고 계실 뿐이다.
겨우 나이 17세, 세조는 단종을 이곳에 유배 시켜 죽여 버렸다.
단종은 고아나 마찬 가지였었다.
할아버지(세종)도 죽었고, 아버지(문종)도 죽었다.
심지어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문종 비 현덕왕후)마저 자신을
낳으면서 난산 끝에 죽고 말았다.
물론 형제도 없었다.
다만 힘없는 작은 아버지들(안평, 금성대군 등 세종의 아들들)이
수두룩 있었지만 오히려 이들 때문에 죽음을 재촉한 빌미가 돼 버렸다.
그랬으니 야망에 눈이 어두웠던 숙부 수양대군이 잽싸게 어린 왕권을
날름 삼켜 버린 것이다.
세조는 참으로 영악했던 모양이다.
어찌 이런 천혜의 유배지를 찾을 수 있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청령포는 동·북·서쪽이 깊은 강물로 막혀 있고 남쪽은 천길 절벽이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구의봉이 요새처럼 버티고 있고, 숲이 울창하여
사람들이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마치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곳이다.
이런 곳을 용케도 발견하여 단종을 유배 시키고도 안심이 안 되어
겨우 유배 생활 2개월 만에 서인으로 신분을 강등시켜 죽여 버렸다.
세조는 그 것으로도 부족하여 단종의 시신을 청령포 강물에 버리리라
명하고 누구든지 시신을 거두는 자는 3족을 멸할 것이라 엄명했다.
참으로 세조의 악행이 더럽고도 치사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550여 년 전, 1457년 10월 24일(음). 영월 땅에는 빨리도
겨울이 찾아 왔다. 겨울 찬바람 씽씽 불던 날 조선의 제6대 왕 단종(端宗)은
17 세 어린 나이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피 눈물의 시 한 수를 짖는다.
이른바 단종의 어시 자규시(子規詩)이다.
" 혈루춘곡낙화홍(血淚春谷落花紅)"
피 눈물 흘러서 봄꽃이 붉다.
어시 중 한 소절이다.
소쩍새(자규,子規) 울음소리는 그저 애달프고 슬프다는 것에 지나
비탄의 소리, 신음소리에 가깝다고 단종 홍위는 느꼈던가.
어쩌면 피눈물처럼 흐느껴 우는 소리 같다고 홍위는 생각했던 것 같았다.
어시의 전문은 이렇다.
< 血淚春谷落花紅 >
一自寃禽出帝宮 弧身隻影碧山中 假面夜夜眼無假
窮恨年年恨不窮 聲斷哮岑殘月白 血流春谷洛花紅
天聾尙未聞哀訴 何奈愁人耳獨聽 -端宗 子規詩-
< 피 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
원통한 새가 되어 제궁을 나오니
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
밤마다 잠들려 해도 잠 못 이루어
어느 때 되어야 이 한 다 할꼬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
하늘도 저 애끊는 소리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시름에 찬 내 귀에는 잘도 들리는고...
단종이 잠들어 있는 장릉(莊陵)
▲단종이 잠들어 있는 영월의 장릉
잠들어 있되 결코 잠들어 있지 않은 단종의 장릉...
단종이 죽은 지 무려 240년 후 서인 홍위는 왕으로 다시 복위되었다.
임금 숙종은 1681년 드디어 단종을 서인 신분에서 노산군으로 추봉하고,
1698년 숙종 24년에 다시 단종 왕으로 추복, 능호를 장릉으로 정했다.
▲단종 무덤 장릉으로 오르는 길
단종 릉은 높을 구릉지에 조성됐다.
조선왕릉은 모두 한양(서울) 인근에 있지만 유독 단종 릉만 영월 땅에 있다.
장릉의 묘역도 얼었던 땅이 스믈스물 녹기 시작하고 있어
온 땅이 진흙으로 질퍽거려 신발 속으로 물이 새어 들어 올 정도였다.
그야말로 단종과 그를 추종하던 신하들의 눈물 바닥처럼 보였다.
▲사육신 등 단종을 위해 목슴을 바친 충신 264인의 위패가 모셔진 배식단소
장릉 묘역에 있는 그 때 그 시대 사람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한 사람들이다.
충신 엄흥도, 박충원, 사육신 등 단종을 위해 순절한 264인의 위패가
장릉 묘역에 모셔져 있으니 그들의 한 서린 눈물이 영월 땅에 서려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엄흥도 정여각(嚴興道 旌閭閣)
▲엄흥도의 정여각
그 중 충의공 엄흥도 이야기를 빼 먹을 수가 없다.
세조는 단종을 죽여 청령포 강물에 버리고 절대로 시신을 거두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영월의 일개 호장(戶長) 이었던 엄흥도가 아들과 함께 밤에 몰래 강물에
들어가 단종의 시신을 거둬 자신의 선산에 암매장하고 야밤에 도망을 갔다.
그 200년 후 현종 때(1665년) 송시열의 건의로 엄흥도의 공적이 인정 되어
그의 신분이 복권되고, 그 후손들의 벼슬길이 열리면서
영조24년(1758)에는 엄흥도가 공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1791년 정조 15년에 엄흥도를 기리는 정려비가 새워지고
장릉의 충신단에 그의 위패가 배향 되었으니 역사는 이렇게
어느 때엔가는 바른 길로 가기 마련이다.
박충원 낙촌비각(朴忠元 駱村碑閣)
▲박충원의 낙촌비각
엄흥도가 목숨을 내 걸고 단종의 시신을 거뒀다면
박충원은 단종이 죽은지 30여년 후에 영월군수로 있으면서
엄흥도의 후손의 도움으로 엄흥도가 암매장한 단종묘을 찾아내어
봉분을 쓰고 예를 갖추어 제를 올린 공로를 인정받았다.
현재의 낙촌비각은 그의 후손들의 박충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72년에 지은 비각이다.
▲장릉의 정자각
단종 이야기를 하자면 시작도 끝도 없다.
그야말로 단종 애사(哀史)다.
그래서 영월에 와서는 차마 웃을 수가 없다.
어린 임금 단종의 피 눈물이 가슴을 후비기 때문이다.
이쯤 하고 단종 능역을 나오기로 한다.
단종 비 정순왕후
그런데 막 능역을 나오려는데 또 한 사람의 한(恨)과 눈물이
발목을 잡는 게 아닌가. 그 사람이 누구일까?
바로 단종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이다.
정순왕후의 능은 사릉(思陵)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남양주에 있다.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정순왕후의 릉 사능
우리는 단종하면 멀리 영월 땅에 있는 장릉과 청령포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단종보다도 더 비극의 주인공이 있으니 바로 정순왕후 이다.
단종은 유배생활 2개월 만에 죽음을 맞아 살아서의 모든 한과 고통을
마무리 했지만 그의 아내 정순왕후는 무려 82세까지 한과 눈물로
평생을 지새운 비극의 주인공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될 때 동대문 밖에서 단종과 생이별한 정순왕후는
지금의 서울 숭인동 청룡사 터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서 시녀 세명과 함께 살았다.
이때 단종비 송씨의 나이 18세였으며 이때부터 그녀는 날마다
남동쪽 가까이에 있는 바위산에 올라 단종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애절한 삶을 차마 죽지 못하고 연명해 나갔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60여 년 동안 오직 단종의 명복만을 빌면서 시녀와 함께
초근목피로 살았으니 차라리 단종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못했음을 한탄했다 한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얼마나 애절하고 아팠겠는가.
그녀의 이야기도 모두 하자면 소설책 한 권은 족이 될듯하여 이 쯤 멈추려한다.
세조의 악행은 단종에 그치지 않고 정순왕후를 이 지경까지 만들었으니
그가 어찌 제대로 왕 노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세조는 자신의 죄를 깨우치고 말년에 불교에 의존하여 많은
불사를 일으켜 죄업을 닦으려 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임을
아시는 부처님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세조는 그 죄업으로 평생을 종기라는 병에 고생했고
환상에 시달려 편안한 삶을 한 순간이라도 살지 못했음이리라.
단종과 그의 비 정순왕후는 지금 없지만....
그들의 한과 눈물은 영월 곳곳에 마르지 않고 남아 있으니
역사는 흘러가되 결코 없어지지 않는 사실로 우리들에게 전해진다.
세조의 대한 원망이 그 때 그 시절에만 국한 되지 않고
수백년이 흘른 지금까지도 아니 미래의 수백 년 후까지도
세조에 대한 원망은 지속 될 것이니 지하에 묻힌 세조가 알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것임이 틀림없다.
▲청령포에 있는 관음송
단종의 죽음...,
단종의 한과 눈물...,
그리고 아내 정순왕후에 대한 그리움...,
이런 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청령포에 있는 소나무 관음송(觀音松)이다.
관음송이란 이름은 단종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觀),
울부짖는 소리(音)를 들으며 자란 소나무란 뜻이다.
지금도 그 관음송은 청령포 서강을 바라보며 두 가지로 뻗어 서 있으니
한 가지는 단종일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정순왕후 일 것이다.
▲홍살문
유적지 답사 행위는 유적이라는 물질적 시각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그 유적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 보이지 않는 영혼과 만나는
감성으로서 유적을 대하여야 한다.
특히 영월의 단종 유적지는 그 무덤과 유배지 만으로만 봐서는 깊은 의미를 느낄 수 없다.
유적지 앞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주인공 시대로 달려가
그 때의 상황을 직접 보고 느껴야 비로소 진정한 그 유적지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된다.
영월 방문은 먹고 마시고 구경하는 관광의 목적으로 가면 안 된다.
단종을 만나 그와 함께 울고, 그를 위로하고,
잠시 일망정 그의 친구가 되어 주는 방문이어야 한다.
>未知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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