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도갑사 해탈문은 해탈하고....
●길 위에서
경주에서 전남 강진, 영암까지 동쪽 끝에서 서쪽 끝머리 월출산 자락에 있는
고찰 도갑사와 무위사 그리고 월남사지 옛 절터를 찾아 새벽길을 나선다.
조금 흐린 하늘, 회색빛 도심을 탈출하니 차창 가로 스쳐 지나가는
시골정경들이 봄의 절정에 젖어 있다.
개나리, 진달래는 물론 봄의 화신 벚꽃도 벌써 만개해 있다.
여행을 하다보면 새로 난 길이 자주 눈에 띄게 된다.
시원스럽게 뚫려 있는 새 길들을 만나면 느끼게 되는 감정은
반가움 보다는 걱정이 먼저 든다.
“길은 사람을 위한 길인가? ”
“자동차를 위한 길인가?”
국토는 좁은데 길만 자꾸만 생기니 얼마 안 있어 전 국토가 길 반,
땅 반이 되지나 않을까 싶은 엉뚱한 걱정한다.
그러나 아무리 거미줄처럼 길이 많이 생겨도 길을 못 찾는 걱정은 없다.
“네비게이션” 이라는 현대판 눈이 있기 때문이다.
그저 그가 가리키고 있는 화살표대로만 따라 가면 목적지에 닿을 수 있다.
“안녕하세요. 여기 도갑사 가려면 어느 길로 가면 되나요?“
이렇게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길을 묻는 모습은 이제 찾아 볼 수가 없다.
장장 5시간을 숨 가쁘게 달려 차는 월출산 도갑사에 닿았다.
●국보59호, 도갑사 해탈문이 정말 해탈하다.
도갑사 일주문에 닿았다.
화려한 다포계 양식의 일주문은 맞배지붕이 아니라 팔작지붕이다.
그래서 그런지 산문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일주문은 개선문처럼
아스콘 포장길 가운데 우뚝 솟아있다.
버스는 그 일주문을 거침없이 고개를 들이밀고 산문으로 들어간다.
일주문 정면에 “月出山 道岬寺”후면에 "國中第一 禪宗大刹" 과 "德海門"이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그런데 일주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승용차는 물론 관광버스까지 매연을 내 뿜으며 일주문을 거침없이 통과하고 있으니
참으로 민망스럽기가 그지없다.
우리의 산문이 어찌 이 지경까지 세속화 됐는지 모르겠다.
도갑사 해탈문은 국보(50호)급 건축물이다.
그런데 그 해탈문이 정말 해탈이라도 한 듯 기둥만 서있고
얼기설기 철재 거푸집으로 둘러싸여 너덜너덜한 비닐 포장을 뒤집어쓰고 있다.
수리를 하기 위하여 해체 중이라 하니 국보급 건축물과의 만남은 틀려 버렸다.
모처럼 왔는데 그 온전한 모습의 해탈문을 보지 못하다니 서운하기가 그지없다.
옛 해탈문 사진이라도 보면서 서운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다.
그동안 배운 대로 보자면 해탈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맞배지붕의
주심포(柱心包) 형식의 단출한 건물이다.
좀 특이한 것이 있다면 해탈문으로 오르는 계단(석조기단)의 소맷돌에
소용돌이같은 태극 모양의 특이한 문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단 계단의 소맷돌 뿐만이 아니다.
사찰건축물 여러 곳에 이런 태극문양이 들어간 곳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태극문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태극사상은 우주만상의 근원이며 인간생명의 원천으로 진리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불성과 태극을 같은 의미로 받아 들여 태극과 불성은
모두 불생불멸하는 만물의 실체와 우주와 인간의 본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해탈문에 오르는 첫 계단에 언뜻 보면 바람개비 같은 태극문양을
새겨 놓은 것이 아니가 싶다.
도갑사의 해탈문은 1960년 해체 수리 시에 발견된 상량문에 조선 성종
4년(1473)에 중건되었다고 하는데 원래 건물 안쪽에 금강역사상이 있었는데
모두 도난당하여 없어지고, 금강역사가 있던 방 뒷쪽 좌우 칸에 2구의
목조동자상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이런 모습의 금강역사는 처음본다.
쿡쿡 웃음이 터져 나온다.
웃통을 벗은 모습이 마치 육체미를 자랑하는 미스터 코리아 선발대회에 나온 듯하다.
표정도 근육도 얼마나 해학적인가.
어떤 자들이 가져 갔는지 당장 제자리에 갔다 놓아야 천벌을 면할 것이다.
우리 문화재를 흠쳐가는 자나 도굴하는 자는 특별법을 만들어 엄벌해야 한다.
사자를 탄 동자상은 문수동자이고, 코끼를 탄 동자상은 보현동자이다.
특이하게도 동자상의 앉은 자세가 동물들의 정면으로 앉아 있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수, 보현보살은 거의 연화좌 위에 앉아 계시지만 벽화에서는
문수보살은 푸른사자를 타고 있고, 보현보살은 흰 코끼리를 타고 있으니
아마도 이 목조동자상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도갑사 해탈문이 국보로 지정된 연유는 아무래도 건축형식상 특이한 점이 있을
터인데 여기서는 그 복잡한 전통한옥 구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도갑사의 해탈문은 주심포집 양식에서 가장 많은 다포집 양식의 수법을
혼용한 보기 드문 산문(山門) 건축이라고 한다.
그러나 저러나 이제 옛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여 수리에 들었으니 새 단장을 한
해탈문이 과연 국보로서 계속 인정 되는지 궁금하다.
마치 불에 타 버린 국보 1호 숭례문을 다시 짓고 나서도 국보로서 유효 하는지
궁금한 것처럼 말이다.
●화려함의 극치 도갑사 대웅보전
도갑사는 신라 시대 고승 도선 국사가 창건한 대 가람이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6.25등의 참화에 대부분 전각들이 소실되기도 했지만
그 중 대웅보전은 1977년 한 참배객의 부주의로 화재로 없어졌는데
2004년 월우 주지스님의 발원으로 복원 공사를 벌려 2009년 4월에 화려한
중층(2층) 양식의 팔작지붕에 정면5칸, 측면4칸의 대법당으로 탄생했고,
주불로서 석가모니불,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삼존불을 모신 대웅보전이 됐다.
●도갑사 대웅보전의 화려한 현판
우선 까마득한 이층 누각에 걸려 있는
현판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고개를 한껏 고추 새워 카메라 줌을
최대한 앞으로 당겨 현판을 찍는다.
그리고 카메라 LCD 화면에 나타난
현판의 화려함에 놀란다.
금박이로 쓴“大雄寶殿”현판 가상 자리
에는 세 마리의 용이 현판을 휘감아
금방이라도 하늘로 올라 갈 듯한 모습
이고 현판 윗면에는 동자상인지,
비천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두 사람이
손을 합장하고 옷깃을 휘날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글 또한 용처럼 힘차게 꾹꾹 눌러 썼는데 어느 분의 글씨인지 알 수가 없다.
●도갑사 대웅보전의 화려한 단청 그림들...
대웅보전 정면 창호의 화려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각의 솟을빗살문 창호이다.
법당문은 대부분 빗살문 양식의 문으로 화려하게 꾸민다.
이를 솟을빗살문, 여기에 여러 꽃 조각을 겹쳐 더욱 화려하게 조각한 것을
솟을빗꽃살문이라 한다. 그러니깐 도갑사 대웅보전 법당 문은
솟을빗꽃살문 창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적, 청, 백 삼색의 연꽃과 국화 그리고 여러 추상문양을 연속적으로 나열,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간결한 창호의 화려한 무늬가 질서정연함을 느끼게 한다.
●사찰 귀면 과 동물 문양
문의 하단(궁창)에도 귀면과 꽃, 여러 동물상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중 사찰의 귀면은 보통 잡귀나 재앙을 쫒아 준다는 귀면(鬼面)의 귀신(鬼)자로
알기 쉬우나 사찰의 귀면은 “낯휘“ 라고도 부르며 얼굴이라는 뜻으로
광채, 빛난다는 휘(暉)자를 쓴다고 한다.(허균의 사찰 장식에서)
그러니깐 사찰에 장식된 귀면은 금강역사처럼 법당을 지키는 수호신인 것이다.
또 궁창(문 하단 면)에는 거북이를 비롯한 여러 동물형상의 그림이 있는데
그 중 달에서 토끼 두 마리가 방아를 찧는 전래동화의 모습도 있다.
왜 법당 장식에 토끼가 들어가 있는 것일까?
토끼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한다는데 하나는 헌신과 희생의
상징형으로 달에 살고 있는 토끼이고,
또 하나는 부처의 전생설화와 관련된 토끼이라는 것이다.
어느 날. 여우와 원숭이와 토끼가 불심을 터득한 것을 자랑하려고 제석천을 찾아갔다.
이들을 시험하기 위해 제석천이 시장기가 든다고 하자, 여우는 즉시 잉어를 물어오고,
원숭이는 도토리 알을 들고 왔는데 어인일인지 토끼는 아무 것도 없이 빈손으로 왔다.
그리고 토끼는 제석천 앞에서 모닥불을 피우더니 불 속에 뛰어들며, 내 고기가 익거든
잡수시라고 하였다. 제석천이 토끼의 진심을 가상히 여겨 중생들이 그 유해나마 길이
우러러보도록 토끼를 달에다 옮겨놓았다. 이렇게 하여 토끼가 달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허균의 사찰장식에서)
●도갑사 대웅보전의 화려한 불전(닫집과 수미단)
▶불전 안의 궁전 닫집
도갑사 대웅보전에 모셔진 삼존불(석가, 아미타, 약사)은 각각의 닫집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이 머무시는 궁전, 바로 닫집의 화려함은 법당 장식 중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
도갑사 닫집은 만들고 단청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더욱 화려하고 아름답다.
아마도 용궁이 그러할 것이며, 극락정토의 보궁이 그럴 할 것이다.
용궁이나 보궁을 직접 가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지만 이 지상에서 꾸밀 수 있는
최대한의 상상력으로 만든 궁전이 바로 법당의 닫집이 아닌가 여겨진다.
닫집 가운데에는 각기 “적멸보궁, 칠보궁, 만월궁” 이라 쓰여져 있다.
보궁 안쪽에는 천용이 똬리를 틀고 고개를 내밀어 보궁을 지키고 있고,
찬란한 닫집 처마에는 극락조가 날개 짖을 하고 있다.
한 가지 흠이라면 닫집 옆에 위험스럽게 매달려 있는 ‘쌍드리에’이다.
법당 안의 조명을 위한 전등이겠지만 그 쌍드리에가 오히려 화려한
닫집의 위상을 깎아 내리고 있는 듯 했다.
법당 환경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흉한 전등이 보이지 않도록
특별한 설계로 간접 조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봤으면 좋은 듯 싶다.
▶불단(수미단)
부처님이 좌정하고 계시는 불단 즉 수미단의 아름다움도 빼 놓을 수가 없다.
온갖 동, 식물 문양의 조각으로 가득한 불단은 보통 목각으로 만든
예술품의 극치이다. 도갑사 대웅보전의 불단도 예외가 아니다.
먼저 도갑사 대웅보전의 불단 조각 모양을 살펴본다.
(*사진을 찍지 말라는 작은 푯말이 불단위에 있었지만 특별히 부처님께
허락을 받고 찍음)
아름다운 연꽃과 모란꽃 등을 비롯한 갖가지 꽃은 물론이고,
가릉빈가, 코끼리, 원숭이, 인두호신, 익룡, 봉황 등등
날개 달린 사슴이 있는 가하면 익어(날개 달린 물고기)도 있다.
불단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은 대구 팔공산 백흥암 수미단이 으뜸이다.
백흥암 수미단의 조각은 오래 됐기도 하지만 그 조각이 너무 정교하여
국가의 보물로 지정되기까지 했다.(보물 제486호)
그렇다면 왜 불단에 이런 신비로운 상상의 꽃이나 동물들을 조각했을까?
그것은 신령계의 환상적인 동물들과 현실세계의 상서로운 상징물을
동시에 배치함으로서 부처의 세계를 더욱 신비롭게 꾸미기 위함이다.
도갑사의 불단은 비록 근년에 만든 것이지만 정말 아름답고 정교하게
정성을 들여 만든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분의 조각품인지 그 분의 공력에 감탄하고 찬사를 보내고 싶다.
아무튼 이렇게 법당 밖이나 안쪽에 화려하게 단청그림으로 장식하는 것은
부처님의 세계, 즉 극락세계나 서방정토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다.
●도갑사 미륵전
미륵전도 그 동안 중창을 했는디 오래된 건물이 아닌듯하다.
미륵전은 도갑사 전체 가람 한 단 위쪽에 자리하여 층층 돌계단을
힘들여 올라야 이를 수 있다.
우선 전각의 문의 문양이 대웅보전 창호 뭇지 않게 아름답다.
대웅전의 문양이 화려하다면 미륵전의 문양은 단조로우면서도
간결하고 질서정연하여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해주는 듯 하다.
창호의 문양을 보면 녹색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배열한 후에 합각점에
적, 청, 백의 국화(?)무늬 같은 꽃을 어긋나게 배열하여 도식적인데도
도식적이지 않고, 정연한데도 지루하지 않은 문양을 하고 있어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청청해 진다.
전각 안으로 들어가 보자.
도갑사 미륵전에는 특이한 불상이 모셔져 있다.
바로 보물 제89호인 “석조여래좌상”이다.
이 석불은 몸체와 광배(光背)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어
마치 바위에 직접 불상을 새긴 마애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조각의 표현이 다소 경직된 느낌을 주고 어쩌면 현대적 감각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얼굴표정에서 훈훈한 정감을 느끼게 하는 불상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투박하고
생략이 강한 고려적 요소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는 고려 중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도갑사 오층석탑
도갑사오층석탑은 2002년 2월 현 대웅보전 앞에 2중기단의 5층석탑으로 복원되었다.
(높이 5.45m) 조각 및 구조수법 등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균제된 체감율과 안정된 조형미가 돋보이는 석탑이다.
●도갑사 도선수미비 (道岬寺道詵守眉碑)와 수미왕사비(守眉王師碑)
도갑사 도선·수미비는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이首)를 구비한
온전한 조선시대의 석비로(보물1395호) 현재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승려인 도선국사와 조선시대 수미왕사의 행적을 기록한
석비이다(높이 517㎝).
●도갑사 부도밭
도갑사에 부도밭에 마지막 마음을 두고 간다.
부도의 형식이 모두 제멋대로 인 것 같이 보이는 것은 아마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한 곳에 모아 적당히 맞춰 쌓아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석종형 부도 같기도 하고, 승탑형 부도 같기도 한데 확실하지가 않다.
아무튼 도갑사를 지켜 오신 고승들의 부도임에는 틀림없으니
한 낱 돌덩이가 아니라 역사와 스님들의 숨결이 배여 있는 살아 있는
승적(僧跡)들이매 틀립 없다.
●엄청나게 큰 도갑사 사적비.
마지막으로 도갑사를 나오면서 산문 입구에 있는
도갑사 사적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우선 그 크기에 놀랐고, 괴물 같은 비좌의 귀부(돌거북)의 모습에 놀랐다.
용머리 귀부는 송곳니가 아닌 어금니 이빨 두 개가 어긋나게 밖으로 튀어
나와 영물(靈物)의 용(龍) 모습이 아닌 괴물형상처럼 보인다.
우리의 옛 석공들은 귀면이나 용, 귀신같은 괴물 같은 석조물조차도
절대로 무서운 괴물처럼 만들지 않고 해학적으로 친근감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은 것이 특징적이다.
도갑사 사적비는 2003년에 신축 불사를 완료했다는데 그 크기가 현존하는
국내의 사적비 중에서 최대 규모 이고, 비의 석재도 우리나라에서 돌의 품질이
제일 우수하다는 충남 보령 웅천의 오석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사적비 비신의 총 길이는 자그마치 8m 70cm로나 된다 했다.
비문에 새겨진 내용은 도선국사가 도갑사를 창건한 이래 조선 세조의 왕사
수미왕사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도갑사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비의 전체적인 모습이 천 년 전 신라 장인이 만든 것과는
너무도 거칠고 투박하다. 귀부의 용머리 모양이 무슨 괴물 같기도 하고,
비신 위에 얹혀 놓은 용 조각 이수(머리돌)도 너무 투박하고
전체 비석의 체감율도 잘 맞지 않는 등, 영 감정이 일어나지 않음은
너무 인색한 평가일까. 무엇이든지 크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작지만 섬세하고 후대에 길이 남길 만한 걸작의 조각품으로 만든 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현대와 과거의 작품을 서로 비교 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여 참고로
천 년 전 신라 석공이 만든 태종무열왕릉비의 비좌(귀부)와 이수를 여기에 싣는다.
비석은 없어지고 없다.
도갑사를 방문 하려면 요즘 가면 좋지 않다.
1,2년 후에 가는 것이 좋다.
경내 여기 저기 불사을 위한 건축 자재들이 널부러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어수선한 불사는 도갑사 뿐이 아니고 전국의 모든 사찰에서
일어 나고 있는 현상일 것이다.
물론 불사도 필요하다. 그러나 좀 신경을 써서 산사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조용하고도 은밀히 진행한다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도갑사를 나와 무위사로 향한다.
도갑사 사적비 용머리 귀부가 으르렁 거리며 소리를 지른다.
내가 너무 혹평을 한 탓일 거다.
>未知路
다음 무위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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