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전국문화재 斷想

적멸보궁 법흥사에 가다.

migiroo 2010. 2. 27. 22:00

 

●적멸보궁 법흥사에 가다.

 

청령포에서 옮겨온 홍위(단종)의 슬픔과 분노와 연민으로 심란해진 마음을 다스리고자 영월의 법흥사를 찾는다.
법흥사가 적멸보궁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거기에 가면 단종으로 인해 얻은 우울한 마음을 부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후 법흥사 일주문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일주문이 보여 차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려니 했는데 버스가 일주문을 그대로 통과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일주문을 버스로 통과 하다니....

그러나 어찌 하랴

카메라의 샤터조차  누르지 못하니 할 수 없이 남이 찍은 사진을 여기에 싣는다.

얼핏 보니 일주문의 기둥은 나무가 아니고 거대한 석용과 코끼리 상이 일주(一柱 )를 대신하고 있었다.

 

 

 


법흥사가 어떤 사찰인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아니던가.
더 정확히 말하면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가 중국 종남산 운제사에 모셔져 있는 문수보살의

석상 앞에서 7일간의 정진 기도 끝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 발우 등을 전수

받아 지금 영월의 사자산 연화봉에 불사리를 봉안하고 흥녕사라 개창한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이고

양산 통도사와 같은 불보 사찰이다. 그래서 법흥사는 여느 다른 사찰과는 그 품격이 다를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막상 와 보니 안타깝게도 법흥사는 점점 그 고귀한 품격을 스스로 낮추고 있은 듯 느껴졌다.
몇 년 전에 비하여 새로 지은 전각들이 즐비해 졌고 지금도 또 다른 불사를 계속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역(寺域)이나 가람의 전각 건물이 늘어남을 탓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왠지 전체적인 가람배치에서 안정감이 부족한 느낌이 들고 속세의 냄새마저 풍겨옴은 웬일일까?
앞마당에 차들이 즐비하고 관광버스까지 붕붕거리고 있어서 그럴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든다.


적멸(寂滅)에 싸여 있을 사찰 분위기가 점점 참배가 아닌 단순 관광객들을 위한 분위기로 변질 되 가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좀 지나친 과장된 비약일까? (물론 이런 현상은 모든 큰 사찰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극락전 앞마당에는 거대한 칠층석탑을 새우려고 반쯤 미완성인 탑이 서있다.
탑 이름이 “흥녕대탑”이라 쓰여 있다.
흥녕 이라는 이름은 자장스님이 처음 이곳에 세운 절 이름으로 지금 법흥사의 옛 이름이다.


그런데 탑의 조감도를 보니 탑의 형식도 모양세도 전혀 이질적이다.
탑재 일부는 이미 완성 된 상태인 듯 임시로 세워 놓았다.
완성된 탑재들을 보니 우리나라의 전통 형식이 아닌 팔각형의 탑신과 옥개석(지봉돌)들이다.
탑재에 새겨진 연화무늬 조각상을 보니 주름진 장인(석공)들이 수개월씩 정성들여 혼과 정신을

불어 넣어 쪼은 조각 솜씨가 아니라 첨단 기계로 깍은 조각들로 보였다.

 
적멸보궁이라는 고귀한 명성을 어디에 두고 있기에 저런 형식도
애매한 대탑을 새우려는 것인지 고개가 갸우뚱 거린다.

 

 


우리나라의 오대 적멸보궁은 양산의 통도사를 제외하곤 모두 강원도 오지에 위치해 있다.

왜 깊고도 깊은 산간벽지에 위치해 있을까?
그것은 바로 적멸 속에 진신사리를 모셔야 겠다는 자장스님의 깊은

뜻이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자장스님이 진신사리를 모실 때 다섯 곳에 모셨는데 그 중 4곳이 모두 강원도 오지의 산간벽지에

모신 것이다. 양산 통도사는 산간은 아니지만 불보(佛寶)사찰로서 그 위상이 높고도 높기에 산간

보다 더 깊은 금강계단이라는 적멸의 세계에 모셔졌다고 불 수 있다.

 


적멸(寂滅) 상태란 무엇인가?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청정한 상태를 말함이다.
그럴진대 진신사리를 모신 곳은 바로 적멸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결코 속세의 요란함과 화려함을 배제한 고요의 세계, 공(空)의 세계여야 한다.
그래서 적멸보궁에는 불단에 불상을 모심이 없이 빈 방석만 놓여있는 것이다.
바로 아무 것도 없는 공의 세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법흥사는 불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이 문을 열고 위세를 떨쳤던 큰 사찰이었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 1912년 산불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됐고, 17년의 중건불사를 마치자
마자 1931년에는 산사태로 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939년 적멸보궁만을 중수한 채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최근에 들어서 비약적으로

대찰의 모습을 회복해가고 있다. 그래서 요즘도 불사가 한창이다.

 

 


최근에 중수된 법흥사 적멸보궁은 단청의 화려함이 그지없다.
그래서 고찰로서의 운치가 조금은 떨어진다.
전각 처마 밑의 용머리 장식이나 뜰에 있는 한 쌍의 용머리 난간석도
새것으로 아직 세월의 고졸한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적멸보궁 뒤로는 자장율사가 기도하던 토굴(석분)이 있고
그 옆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부도 한 기가 있다.
부도는 팔각원당형 연화무늬를 가지고 있으며 탑신에는
신중상이 새겨져 잇는데 고려시대에 만든 것이라 전한다.


법흥사 적멸보궁의 진신사리는 확실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전한다.
적멸보궁 뒷산 어디엔가 있다고 해서 산 전체를 사리를 봉안한 대상으로 삼는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인위적인 불탑이나 불상보다도 산이 더 성스럽고 위대하다고 여긴다.

 
혹자는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불사리의 진신 여부에 대해 의심을 하기도 한다.

세존이 열반한 뒤 1000여년이 지난 그 때에 어떻게 100과나 되는 사리를

가져 올 수 있는가? 하는 의심 때문이다.
인간은 의심이 많은 동물이니 그런 의구심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었던 사실이 아니었던 무슨 상관인가?
정작 불교에서는 사리를 그렇게 주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사리란 구슬 같은 뼈 조각에 불과 하다고 여긴다. 
다만 그것들이 부처님 몸에서 나왔으니 소중하고 귀하게 여길 뿐이다.
내 아버지 몸에서 나온 뼈 조각을 소중히 여기듯이 말이다.
물질에 불과한 사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불보(佛寶)에 대한 신앙이 중요한 것이다.
사리는 단지 부처의 상징일 뿐이다.

 

 

 

법흥사 적멸보궁 뒷산의 사자산은 사리신앙의 상징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사리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산을 봄으로서 사리를 보는 것 같은
감정(신앙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적멸보궁 가는 길은 그야말로 희비가 교차한다.
한 길은 송림이 울창한 그야말로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길이고,

그 다음 길은 꽁꽁 얼었던 길이 녹기 시작하여 발목이 푹푹 빠지는 진흙투성이 길이다.
발 한번 잘못 디디면 넘어져 진흙을 뒤집어쓰기 십상이다.
조심조심 허리를 굽혀 설치된 철 난간을 잡고 올라간다.
그러나 진흙 길을 벗어나면 연꽃처럼 아름다운 한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편듯한 팔작지붕의

적멸보궁이 방문객을 맞는다.
지붕 위로는 정말로 사자후(獅子吼)를 토할 것 같은 사자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적명보궁 법당 안으로 들었다.
수계(受戒)를 받은 불자는 못 되었지만(자격이 없어서)....
수계를 받으면 어떡고 받지 못하면 어떤가.
불자가 아직 되지 못했으면 어떡고 되었으면 또 어떤가.
이미 내 안에는 하루에도 수없이 부처님이 왔다 갔다 하시거늘...


정말로 진실 된 마음으로 북전함에 시주하고 불단에 절을 올린다.
그리고 불단을 앞에 두고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불단 위에는 빈 방석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방석 너머로 문살 없는 커다란 창문이 마치 LCD 화면처럼 서있다.
창문으로 석분과 이끼를 잔뜩 뒤집어 낡은 부도 한 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석존의 진신사리을 봉안한 사자산이 창문 가득히 들어온다.

 

 


빈 방석은 누렇게 퇴색되어 높은 불단 위에 있다.
방석을 응시하고 있으니 이게 왠일인가.
하얀 비단 옷을 입으신 부처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나를 보고 계시지 않는가.
허상인가? 그러나 그것은 허상이 아니라 실체였다.
내 앞에서 수도 없이 절을 올리고 있는 어느 할머니의 상이였다.

 


법당을 나와 건물 뒷편으로 가 본다.
적멸보궁 건물 뒤편 석분 아래에 원래는 석축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석편들이 석축을 대신하고 있다.
석편들은 모두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는데 모두 불상들이다.
그런데 그 불상들이 누가 조각 했는지 다분히 이국적이고
그 조각 솜씨가 영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혼과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은 첨단 컴퓨터 기계로 깎은
조각상들이기 때문이리라.
 

 

 

 

 

법흥사는 봄에 와야 멋있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 반대 입장이다.
꽃 피는 봄에는 그야말로 자동차 반, 사람 반 북새통을 이루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주로 관광버스들이고 사람들은 구경 온 사람들 대부분이다.
꽃 보려 보려 자연 경관 보려고 절에 오는 것인가?
물론 부처님은 찾아오는 자가 누구 이든 이것저것 따지시지 않고 다 받아 들이신다.
그러나 적어도 석존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에 와서는 옷깃을 여미고
참배의 마음가짐으로 와야 할 것이다.

 

생각 난 김에 한 마디 할까. 

 

  ▲위 사진은 본인이 찍은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통도사 적멸보궁 금강계단을 인심 좋게도 개방하였다.
그러나 어떠한가.
그 엄숙한 곳을 아무나 들어가서 사진이나 찍고(나도 찍었지만...)
이리저리 석물을 기웃 거리고 만지고...,
떼 묻은 등산화를 신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성역을 더럽히고 있지 않은가.
통도사 금강계단은 특별한 날을 제외하곤 다시 잡인들 출입을 막아야 할 것이다.
스님들 선방에는 그 마당조차도 못 들어가게 금줄을 쳐 놓으면서 어찌자고
지고지순의 부처님 진신이 계신 성역에 뭇 사람들이 신발을 신고 막 들어가게
허용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법흥사 극락전은 언제적 건물인지 아직 단청이 입혀지지 않고 있다.
차라리 무단청 건물이 고졸한 맛이 훨씬 느껴온다.
그러나 건물의 미적감각과 보존상 문제라면 단청은 불가피 할 것인데
법흥사 극락전은 아직도 화장을 못한 여인 같다.


법흥사에서 꼭 봐야할 또 하나의 보물급 문화재가 있다.
극락전 옆에 있는 보물 제612호인 징효대사탑비 와 부도이다.

 

 


원래 명칭은 흥녕사 징효대사보인탑비(興寧寺 澄曉大師寶印塔碑)이다.
이 탑비는 고려 943년(혜종1년)에 세운 것이다. 징효대사는 신라 말 구산
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파(獅子山門派)를 연 철감선사(澈監禪師)
도윤(道允)의 제자로 흥녕사(법흥사)에서 선종(禪宗)의 법문(法門)을 크게
일으켰던 분이다.


이 비는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首)로 신라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탑비
양식이다. 용머리처럼 생긴 귀두(龜頭)는 입에 큼직한 보주(寶珠)를 물었으며
반구형 귀갑(龜甲)전면에 6각의 귀갑무늬와 사엽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징효국사부도 [寧越澄曉國師浮屠] 

 


 

탑신은 팔각형이며 탑신 중앙에는 자물통이 있는 문비(門扉)가 조각 되어 있다.
옥개석도 팔각이며 지붕 경사가 급하고 모서리에 장식된 귀꽃이 아름답다.
상륜부는 보개·보주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극락전 마당 한 구석에 정말 진짜 보물급(?) 석물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 눈여겨보지도 않고 그냥 방치된 듯 관리도 허술한 상태다.
바로 망가진 폐 귀부(廢龜趺)이다.
귀부는 꽤 큰 거북이 형상인데 비신을 얹혔던 홈이 파여 있고 전체적인 모습은 깨지고 마멸되어

일반인들은 형체를 잘 알아 볼 수 없지만 분명한 비신을 세웠던 귀부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이 앉고 발로 밟고 그 관리상태가 엉망으로 아무래도 법흥사의 전신 이었던

흥녕사의 유물인 듯 했다.
절 측에서는 새로 만들려는 탑만 중히 여기지 말고 비록 깨지고 망가졌지만
오랜 세월 법흥사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물을 잘 관수 했으면 좋겠다.

   
법흥사를 나온다.
해는 어느덧 서산을 넘고 있다.
돌아갈 길이 머니 서둘러 적멸의 땅을 벗어난다.
돌아가는 길에 영월의 일미 “곤드레 밥”을 먹었다.
처음 먹어 보는 것이지만 정말 맛이 일품이다.

 

*오대적멸보궁(五大寂滅寶宮)


①영축산 통도사  ②오대산 중대 월정사  ③설악산 봉정암  ④태백산 정암사 
⑤사자산 법흥사
 
 >未知路 201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