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索의 窓門/태화강 이야기~

7.운흥사지 그 적멸의 시간 속으로....

migiroo 2010. 5. 3. 01:23

 

7.운흥사지 그 적멸의 시간 속으로....

 


●천년사지 운흥사지


거친 돌길을 따라 가다 이윽고 축대 위로 올라섰다.
그런데 거기에 ‘千年寺址‘가 ’千年死地‘ 로 변하여 적멸에 묻혀 있다.
  
 


옛 절의 폐사지는 많다. 
그래도 그 절터에는 상처 난 석탑 하나쯤은 남아 있고,
이끼 낀 부도 정도는 남아 있다.
어떤 폐사지에는 국보라는 이름을 가진 탑비의 이수(螭?)나
귀부(龜趺)가 남아 있는 곳도 있다.
그래서 이들 옛 절터를 찾아도 위안이 되고 허전하지가 않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여기 운흥사 절터에는
볼만한 유물이 아무 것도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황량함 그 자체이다.
허망, 허무, 공허, 무상, 적막, 적멸 그리고 죽음...
이런 단어들만 절터에 가득할 뿐이다.
 


 


그렇게 큰 절이었다는데 눈에 보이는 것은 고작해야 
무수한 와편(瓦片)과 깨진 자기편(磁器片)들...  
무너져 내린 건물의 축대들....
그리고 말라 죽은 잡초들뿐이다.

 
딱하나, 쓸 만한 유물은 네모난 석조(石槽) 하나와
부러져 토막 난 간주석(幹柱石) 하나뿐이다.
인근 다른 곳에 모아둔 부도마저 없었다면
그야말로 운흥사지는 허허벌판 그 것 뿐이다. 
 

 


운흥사의 번성기 때는 자그마치 50여개의 암자를 거느리던 대찰이었다 한다.
그런데 그 많은 절터의 잔존 유물들이 별로 보이지 않으니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인근 반계마을 노인들의 구전에 의하면 2001년 당국의 발굴조사
이전에 이미 절터에 남아 있던 쓸 만한 것들은 동네사람들이나 도굴꾼들이
거의 다 반출 해 갔다는 기막힌 이야기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유물이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것일까?


 

 
그러나 가만히 보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만 없을 뿐, 마음으로 보면 무형적인
유물들이 절터에 가득함을 본다.


천년의 시간이 절터 곳곳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고,
땅 속 수많은 생명들의 호흡 소리가 들려옴을 본다.
이제 조금 있으면 황량한 절터엔 민들레, 씀바귀, 토끼풀
그리고 개망초 같은 야생 들꽃들이 활짝 피어 날 것이고,
깨진 그릇조각들, 기와조각들, 무너진 축대들이
소곤거리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옴을 본다.

 
 

 
절터 여기저기 정갈하게 만든 나무 벤치가 놓여 있다.
벤치에 앉아서 조용히 천년 폐사지의 숨소리를 들으며
깊은 사색에 잠겨 보라는 메시지인가?
나도 잠시 벤치에 앉아서 너른 절터를 바라본다.
그리고 번성 했던 운흥사를 상상하며 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천 년 전 그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운흥사지 석조(石槽)에 얽힌 슬픈 사연과 명문 

 

 

현재 운흥사지 현장에 남아 있는 변변한 유물은 석조가 유일하다.
석조는 2개가 남아 있는데 하나는 폐사지 본 터에 있고,
또 하나는 부도 밭에 있다. 석조는 물확 수조이다.
석조 바깥 면에는 두 개 다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보통 사람들은
서각(書刻)이 너무 희미하여 알아 볼 수 없으나 전문가들이 판독한 결과
석조의 조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글씨가 너무 희미하고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여기 저기 어렵게
자료를 찾아 헤맨 끝에 겨우 명문의 원문을 찾아 여기에 싣는다.

  
 


우선 부도 밭에 있는 석조의 명문 원문은 아래와 같다.


“片手自明 雍正十年 壬子 二月 日 造成白月 都監大玄堂務 明遠”


명문의 뜻은 " 편수 자명이 옹정 십년 임자 2월 X 일에 보름동안 조성하고 도감 대현은 업무에 힘쓰면서 영원히 밝힘" 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옹정은 청대 세종의 연호로 곧 옹정 10년은 1733년경이다. 이를 조선시대로 미루어 보면 영조 즉위년이 1724년 11월 이므로 이 석조(수석통이라 적혀있다)는 영조 9년경에 제작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운흥사지 본터에 있는 석조의 명문은  “ 片手金汝往 戊申年 三月 日 水石桶 都監 ? ? 淸風法雲視 (?下)” 라고 적고 있다. 몇 자가 판독이 안 된다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석조를 만든 년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석조의 명문에는 조성연대가 명확히 영조 9년(1724)이라 적혀 있는데 수조 자체는 신라시대 것이라 추정한다는 학계의 주장이니 좀 혼돈스럽다.

 

어찌됐던 운흥사는 신라 진평왕 시대부터 내려온 천년 고찰로서

조선 후기까지 명맥이 이어 온 듯하다.
그러나 그 긴 생명은 차라리 오욕(汚辱)의 시대인 듯 하다. 
조선 시대의 가혹한 억불 정책의 운흥사는 조정에 종이를 만들어
바치는 대표적인 부역 사찰로서 그 명맥이 유지 됐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수행이나 염불은 뒷전이고 날이면 날마다 눈만 뜨면
그 어려운 종이 만들기에 매달려야 했으니 말이 스님이지 몸은
한낱 부역꾼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현재 남아 있은 석조의 용도가 바로 종이의 원재료인 닥나무를 불리는
수조로 사용됐었다하니 그 당시 스님들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고
부역에 시달렸는지 알만 하다.
급기야 가혹한 부역에 못 견딘 스님들이 한분, 한분 뿔뿔이
도망치거나 더 깊은 산속으로 은신 해버려 결국 운흥사는 폐사되기에
이른 것이 아니었나 추정한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석조의 규모는 두기 모두 길이 178㎝, 폭 114㎝, 높이 89㎝의 장방형이다. 
 


●운흥사의 내력
 
그러면 운흥사가 어떤 절이었던가를 알아본다. 

 


2004년 12월 운흥사지는 울산시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됐다. 지난 1999년 5월, 울산시가 인근에 흩어져 있던 부도, 석조 등을 한 곳에 모으고 미흡한대로 절터를 정비 하여 그나마 지금의 상태로 보존 하고 있다.


운흥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졌으며, 영조 25년(1749) 출간한 학성지에 폐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운흥사 관련 기록이 있고, 사명대사도 이곳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운흥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의 승병주둔과 불경의 판각 제작으로도 유명했던 사찰이다. 
 

 

●운흥사지의 1차 발굴조사


2001년 6월~12월에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해 2003년에 발굴 보고서를 냈다. 그에 따르면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절을 창건하였으며 그에 따른 암자가 13곳, 스님이 1,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후, 고려 말에 지공(指空)선사가 중창했으나 임진왜란에 불탔다. 다시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대휘(大希)선사가 중창하였으며 1864년에 간행된 〈대동지지〉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운흥사가 폐사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 전해 오는데 조선 말 고종 12년(1875년)에 일어난 민란을 제압하기 위해 동부 영남의 사찰을 없앨 때 폐사됐다는 말도 있고, 또 운흥사에서 은거한 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동학농민전쟁에 실패하면서 관의 탄압을 받자 폐사되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리고 또 한지제작으로 이름난 운흥사에 과중한 부역이 내려지자 스님들이 이를 견디다 못해 도망가는 바람에 황폐해졌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어느 이야기도 확실한 것은 없다.

 


발굴결과 운흥사터는 계곡을 가운데 두고 약 2만평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역(寺域)안에는 운흥사는 환학교, 세진교, 청하교, 유봉대, 취적대, 와룡교 등 다리가 계곡 곳곳에 있었고, 경내의 전각은 대웅전, 금당, 장경각 등을 갖춘 큰 가람으로서 그 산하에 5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보현암, 불일암,북암,남암,부도암,서암,불지암,금지암,원적암 등 9개의 암자만 확인되고 있다. 

운흥사에서 간행되었던 불서는 모두 19종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중 15종의 경판(經板)이 운흥사 폐사 후에 현 통도사(通度寺)로 옮겨져 소장하고 있다. 

 


1차 운흥사지 발굴 때 출토 공개된 와편과 자기편들이다.
학술조사 목적의 공식적 발굴은 늘 뒷북을 잘 친다.
도굴꾼들이나 사람들이 제법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을
대부분 불법 반출해 간 다음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운흥사지에서는 오래전에 폐사 될 당시 많은 사찰의 귀중한
유물들이 통도사, 범어사 등 인근의 큰 사찰로 옮겨졌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운흥사지 부도군


 

 


운흥사지를 나와 부도 밭으로 가는 길을 찾는다.
그런데 도무지 부도 밭으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안내 표지판도 없다.
여기저기 길을 찾아 헤맨 끝에 겨우 길을 찾아 든다.
알고 보니 길은 본 터 와는 반대쪽 계곡 위 엉뚱한 곳에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길이다.
그런데 길을 찾아 헤맨 고행(?)의 보상이랄까
언덕을 넘어서니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한
부도 들이 파란 잔디밭에 앉아 낮은 철책에 둘려 싸여 있다.
부도들은 원래 있던 자리를 몰라 지난 1999년 울주군청에서
여기저기 흩어진 부도와 다른 석재들을 모아둔 것이라 했다.

 

 

 

 

부도들은 그야말로 은둔자처럼 적요에 묻혀 있다.
어느 고승의 넋이 그 작은 돌 속에 숨어 있는 걸까?
아니 작은 돌이 아니라  깊은 심연의 세계가 그 안에 숨어 있다.
그리고 유구한 시간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운흥계곡에는 모두 7기의 부도가 있었는데 그 중 1기는 땅속에
묻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고, 2기는 현 시적사 경내에 있다.
그리고 나머지 4기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지금의
부도 밭에 안치하면서 대형맷돌, 좌대, 사리탑의 기단석, 건물의
지대석, 석조 등도 부도와 함께 모아 두었다. 


부도는 높이 97~130cm정도로 3기는 복련 모양의 대좌 위에
세워져 있으나 1기는 대좌를 잃고 부도만 서있다.
부도는 모두 조선시대 것으로 종모양(石鐘形)을 하고 있다.

 

 


신라 천년 고찰 운흥사에 왜 조선시대 부도만이 여럿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곧 상상만으로도 풀린다.
바로 과도한 부역에 시달려 돌아가신 스님들의 무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부도 밭에 있는 꽃사리탑 
  

 

 


특이 한 것은 부도들과 함께 있는 아름다운 꽃무늬가 새겨진
사리탑의 기단석이다. 처음에는 사리탑인줄은 전혀 몰랐었는데
여기 저기 자료를 찾아 본 후에야 사리탑임을 알게 된 것이다.
사리탑(기단석)은 길이 250cm의 정사각형으로 둘레에 연화문,
국화문, 당초문, 보상화 등의 아름다운 꽃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보통의 사리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운흥사지를 나가며~


억제 할 수 없는 서러움을 안고 천년사지 운흥사 터를 나온다.
처음 들어섰을 때 느꼈던 그 허망함이 하나도 가시지 않고
나갈 때는 더 아픈 고통으로 가슴에 달라붙어 떼어지질 않는다.  
이별의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오기도 하지만
황량한 폐사지에서도 온다는 사실을 진리처럼 깨닫는다.
운흥동천의 물은 변함없이 흐르는데...
가련한 내 마음은 폐사지에 머물러 떠날 줄을 모른다.

 

늦은 오후 운흥사지를 나온다.

그러나 무엇이 자꾸만 내 발목을 잡는다.

시간이다...

천년사지의 적멸의 시간들이다.


>다음 마지막 장, 8. 암자 운흥사.  계속

 

>未知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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