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종소리는 어떻게 나오는가?
성덕대왕신종의 특징은 장중하면서도 맑은 종소리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중단 되었지만 몇 해 전만 해도 에밀레종은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로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세 번 타종되었다. 이 종이 만들어진 770년 12월 14일 이후 그것이 종각에 걸려 있는 한 변함없이 서라벌에서 울려온 종소리였다. 낮게 내려앉은 저음이지만 그 맑은 여운은 긴 파장을 이루며 한없이 퍼져 나가는 그 소리는 장중하면서 맑은 소리였다. 사람들은 이 소리를 "엄청나게 큰 소리이면서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다."고 하였다.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소리로 표현했다. 전국 사찰에 걸려 있는 주요 종소리 10개를 들려주고 가장 가슴에 와 닿는 소리를 선택하라는 선호도 조사에서 응답자의 97.5%가 이 성덕대왕 신종의 소리를 꼽았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다른 종들에 비해서도 그 소리가 주는 감동은 남다르다.
성덕대왕 신종 소리의 비밀은 종교적인 면을 거론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은 과학적인 것을 좋아하니 과학적으로 그 비밀이 이미 드러난바 있다.
바로 종소리의 근원은 종 몸체의 진동에서 나온다. 종을 치면 몸체의 진동으로 공기가 진동하게 되고 이 공기의 진동이 듣는 사람의 귀에 전달되어 청각신경이 자극되어 소리로 인식된다. 이러한 성덕대왕 신종의 소리는 여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맥놀이 현상’임은 이미 다 밝혀졌다. 그리고 종 상부에 있는 음관과 종 아랫바닥 지면에 있는 명동에서 신비의 종소리가 더 해 진다.
●신종의 타종은 언제부터 중단했는가?
국립경주박물관은 신종의 안전을 위해 1992년 12월31일 제야의 타종을 끝으로 1993년부터 타종을 중단했다. 하지만 그 후 다시 종을 쳐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찬반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종은 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종은 소리가 날 때 존재 의미가 있다. 정기적으로 타종하면 오히려 생명이 오래갈 수 있다.”는 타종 찬성론. “종은 종소리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외관상의 미학적인 가치도 중요하다. 타종은 분명 종의 균열을 가져온다. 지금 괜찮다고 해서 종을 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금이 가고 나서야 타종을 중단하겠다는 말인가.”라고 반박하는 타종 반대론. 이런 논란 속에서 경주박물관은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성덕대왕신종 안전 문제 등을 과학적으로 점검하기 위해 종합학술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주조 당시 형성된 기포 문제와 약간의 부식 현상을 제외하곤 별다른 결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타종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경주박물관은 그래서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2001년부터 타종을 재개했다. 종에 가해지는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외부 기온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10월초에 타종하기로 한 것이다. 단, 성덕대왕신종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즉각 타종을 중단한다는 단서조항이 붙었다. 어쨌든 2001년 10월9일, 2002년 10월3일, 2003년 10월3일 타종이 이뤄졌다. 그렇게 3년 동안 진행되어온 타종이 또다시 중단된 것이다. 타종 재개 당시의 단서조항처럼 조금이라도 이상 징후가 있을 때 타종을 중단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1993년 이래 흘러온 과정을 보면 좀 실망스럽다. 그 일지를 보자.
■ 1993년=국립경주박물관, 타종 중단. ■ 1996년 9월=국립경주박물관, 종합학술조사 일환으로 시험 타종(비공개). ■ 1999년 6월=국립경주박물관, 문화재위원회에 타종 재개 요청. ■ 1999년11월=문화재위원회, 2000년부터 타종 재개하기로 결정. 매년 10월3일에 타종하되 문제가 생길 경우엔 즉각 타종을 중단하기로. ■ 2000년 9월=10월3일로 예정된 타종을 취소. ■ 2001년 9월=타종을 재개하기로 결정. 2001년 타종 일자는 10월9일로 결정. ■ 2001년10월=타종 중단 9년 만에 다시 타종. ■ 2002년10월=타종. ■ 2003년10월=타종. ■ 2004년 9월=타종을 다시 중단하기로 결정.
무언가 자주 바뀌어왔음을 알 수 있다. 성덕대왕신종 타종이 워낙 민감하고 중요한 사안이다 보니 종의 보존을 위해 결정을 번복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다.
●종소리에 대한 부처님의 이야기
능엄경에 아난과 세존과의 대화가 나온다. 종소리가 들려왔다. 세존께서 아난에게 묻는다.
- 아난아! 이 종소리가 어디서 나느냐?
「종에서 납니다」
-아난아 ! 종을 치는 방망이가 없어도 저절로 종소리가 나겠느냐? 제가 생각해보니 종소리가 방망이에서 납니다」
-방망이에서 종소리가 아무리 난다고 하더라도 사람에게 듣는 귀가 없다면 그리도 소리가 나겠느냐?
「그러고 생각해보니 이 종소리는 귀에서 납니다」
- 귀로 종소리를 들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종소리라고 분별하는 생각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예. 그렇습니다. 생각이 없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종소리는 생각에서 납니다.」
- 그러면 그 생각은 어디에 매여 있느냐? 「예. 마음에 있습니다.」
- 그러면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있다면 어디에 마음이 있느냐? 아난이 마음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실체가 없었다. 아난이 세존께 여쭈었다.
「마음은 실체가 없습니다.」
- 아난아 ! 그럼 허공 가운데서 종소리가 나는구나.
이것인「진성」곧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다. 진성(眞性)은 인연(因緣)이고 묘유(妙有)는 존재이다. 우주간의 모든 존재는 인연속에서 난다는 말이다. 종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손과 방망이와 귀와 생각과 마음이 서로 어울려서 묘한 소리가 존재하나니!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묘하고 깊고깊은 극미한 진성이여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제자리 벗어나듯 세계를 나툼이여
●성덕대왕신종 명문
▷명문
▷해설본
聖德大王神鍾之銘(성덕대왕신종지명)
朝散大夫(조산대부) 前太子(전태자) 通議郞(통의랑) 翰林郞(한림랑) 金弼衆(김필중)이 왕명을 받들어 짓다.
궁극적인 묘한 도리는 형상의 바깥에까지를 포함하므로, 아무리 그 모습을 보려고 하여도 그 근원을 찾아볼 수 없으며, 대음(大音)은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곳에 진동하고 있지만 이를 아무리 듣고자하여도 도저히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수기설법(隨機說法)인 방편가설(方便假說)을 열어 삼진(三眞)의 깊은 이치를 관찰하시고, 신종을 높이 달아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하였다. 범종에 대한 기원을 상고해 보니, 불토인 인도에서는 카니시카왕 때부터이고, 당향(唐鄕)인 중국에서는 고연(鼓延)이 시초였다. 속은 텅 비었으나 능히 울려퍼져서 그 메아리는 다함이 없으며, 무거워서 굴리기 어려우나 그 몸체는 구겨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임금의 으뜸가는 공훈(功勳)을 표면에 새기니 중생들의 이고득락(離苦得樂) 또한 이 종소리에 달려 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덕대왕의 덕(德)은 산과 바다처럼 높고 깊으며 그 이름은 해와 달처럼 높이 빛났다. 왕께서는 항상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발탁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 수 있게 하였고, 예(禮)와 악(樂)을 숭상하여 미풍양속을 권장하였다. 들에서는 농부들이 천하의 대본(大本)인 농사에 힘썼으며,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건에는 사치한 것은 전혀 없었다. 풍속과 민심은 금옥(金玉)을 중시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는 문학과 재주를 숭상하였다.
태자로 책봉하였던 아들 중경(重慶)이 715년 뜻밖에 죽어 영가(靈駕)가 되었으므로 늙음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되었다. 40여년간 왕위에 있는 동안 한 번도 병란(兵亂)으로 백성들을 놀라게 하거나 시끄럽게 한 적이 없는 태평성세였다. 그러므로 사방 이웃 나라들이 만리(萬里)의 이국(異國)으로부터 와서 주인으로 섬겼으며 오직 흠모하는 마음만 있을 뿐, 일찍이 화살을 겨누고 넘보는 자가 없었다. 어찌 연(燕)나라의 소왕(昭王)과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이 어진 선비를 등용하여 서융(西戎)을 제패히고, 제(齊)나라와 진(晋)나라가 무도(武道)로써 천하를 서로 탈취한 것과 나란히 비교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성덕대왕의 붕거(崩去)를 예측할 수 없었으며, 세월이 무상하여 천년이라는 세월도 어느덧 지나가는 지라 돌아가신지도 벌써 3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근래에 효자이신 경덕대왕이 살아계실 때 왕업을 이어받아 모든 국정을 감독하고 백성을 어루만졌다. 일찍이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해마다 그리운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얼마되지 않아 이어 부왕인 성덕대왕이 승하하였으므로 궐전(闕殿)에 임할 때마다 슬픔이 더하여 추모의 정이 더욱 처량하고, 명복을 빌고자하는 생각은 다시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구리 12만근을 희사하여 대종 일구(一口)를 주조코자 하였으나, 마침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문득 세상을 떠났다.
지금의 임금이신 혜공대왕께서는 행(行)은 조종에 명합하고, 뜻은 불교의 지극한 진리에 부합하였으며, 수승(殊勝)한 상서는 천고(千古)에 특이하며, 아름다운 덕망은 당시에 으뜸이었다. 경주의 육가(六街)에서는 용이 상서로운 비와 구름을 옥계(玉階)에 뿌리고 덮으며, 구천의 북소리는 금궐(金闕)에 진동하였다. 쌀알이 꽉꽉 찬 벼 이삭이 전국의 들판에 주렁주렁 드리웠고, 경사스러운 구름은 경사의 하늘을 훤하게 밝혔으니, 이는 혜공왕의 생일을 경하한 것이며, 또한 왕이 8세 때 즉위한 후, 어머니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섭정으로부터 벗어나 친정(親政)하게 된 서응(瑞應)인 것이다.
살펴보건대 소덕태후(炤德太后)의 은혜는 땅과 같이 평등하여 백성들을 인으로써 교화하고, 마음은 밝은 달과 같아서 부자의 효성을 권장하였다. 이는 곧 아침에는 외삼촌(元舅)의 현명함이 있고, 저녁에는 충신들의 보필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왕은 신하들이 제언하는 안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무슨 일을 결행한들 잘못됨이 있었겠는가? 경덕왕의 유언에 따라 숙원을 이루고자 유사(有司)는 주선(周旋)을 맡고, 종의 기술자는 설계하여 본을 만들었으니 이 해가 바로 혜공왕 7년(771년) 12월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해와 달이 밤과 낮에 서로 빛을 빌리며, 음과 양이 서로 그 기를 조화하여 바람은 온화하고 하늘을 맑았다. 마침내 신종이 완성되니 그 모양은 마치 산과 같이 우뚝하고, 소리는 용음(龍吟)과 같았다. 메아리가 위로는 유정천(有頂天)인 색구경천(色究竟天)에까지 들리고, 밑으로는 무저(無底)의 가장 아래인 금륜제(金輪際)에까지 통하였다. 모양을 보는 자는 모두 신기하다 칭찬하고, 소리를 듣는 이는 복을 받았다. 이 신종을 주조한 인연으로 존령(尊靈)의 명복을 도우며, 보문(普聞)의 맑은 메아리를 듣고 무설(無說)의 법정(法?)에 올라, 삼명(三明)의 수승(殊勝)한 마음에 결합하고, 일승(一乘)의 진경(眞境)에 이르며, 내지 모든 경악(瓊?)들이 금가(金柯)와 함께 길이 번창하고, 나라의 대업은 철위산(鐵圍山)보다 더욱 견고하며,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그 지혜가 같아서 모두 함께 진구(塵區)인 중생의 미혹한 세계로부터 벗어나, 아울러 각로(覺路)에 오르기를 원하옵나이다.
신 필중(弼衆)은 옹졸하며 재주가 없으나 감히 왕명을 받들어 반초(班超)의 붓을 빌리고, 육좌(陸佐)의 말을 따라 혜공왕께서 원하시는 성스러운 지시에 따라 종명(鐘銘)을 짓게 되었다.
한림대서생(翰林臺書生) 대마나(大奈麻) 김백환(金??)이 종명을 쓰다.
찬왈(讚曰)
음양기(陰陽氣)가 서린 공중 천문(天文)걸리고 땅덩어리 굳어져서 방위를 열다. 산하대지(山河垈地) 나열(羅列)되어 만물을 실어 곳곳마다 제자리가 펼쳐졌도다.
해가 뜨는 넓고 푸른 동해바다엔 많은 선인(仙人) 함께 모여 계시 옵는 곳 지대(地帶)로는 복숭나무 있는 곳이며 경계(境界)로는 부상(扶桑)과 연접하였네.
덕업일신(德業日新) 강나사방(綱羅四方) 우리나라가 삼국통일 이룩하여 하나가되다.
위대하신 그 성덕(聖德)을 상고해보니 혜공왕에 이르도록 날로 새롭다.
묘하고도 맑으시온 임금의 덕화(德化) 혁거세왕 이후부터 지금에까지 억조창생(億兆蒼生) 그 모두가 은혜를 입되 유정무정(有情無情) 빠짐없이 은총을 받다.
무성하온 왕족들은 갈수록 번창 모든 국민 태평성세 누려왔으니 대공란(大恭亂)도 평정되어 수운(愁雲)도 걷고 지혜광명 밝게 비춰 훨훨 춤추다.
공손하고 효성스런 혜공대왕이 이어받은 그 왕업을 충실히 이행 백성들을 다스림엔 고도(古道)를 지켜 미풍양속 추호라도 어김이 없네!
자나깨나 부왕유훈(父王遺訓) 생각하오며 십이시중(十二時中) 자모은혜(慈母恩惠) 잊지 않아서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 빌고자 대신종을 주조코자 기원하였다.
위대하고 신심 깊은 소덕태후는 현명하고 덕이 높아 비길 데 없네!
신비로운 기적서상(奇蹟瑞祥) 자주 나투며 신령스런 부험(符驗)들을 계속 보이다.
군신상하 하늘까지 함께 도와서 백성들은 편안하고 나라는 부강(富强) 지극하신 그 효심은 날로 깊어서 소덕후(昭德后)와 경덕대왕 소원을 성취. 경덕대왕 남긴 유언 깊이 새겨서 온갖 정성 기울여서 신종을 부어 천우신조 인력들이 함께 뭉쳐서 보배로운 종법기(鐘法器)가 이루어졌네!
일체마귀(一切魔鬼) 남김없이 항복을 받고 고통받는 모든 어룡(魚龍) 구제(救濟)하오니 그 종소리 웅장하여 양곡(暘谷)을 진동 맑고맑은 메아리는 삭봉(朔峰)을 넘다.
보는이와 듣는이는 모두가 발심(發心) 선남선녀 빠짐없이 동참하였네!
내면에는 원공(圓空)이요 외체(外體)는 신비 성덕대업(聖德大業) 소상하게 나타냈도다.
위대하신 이 업적은 영원한 홍복(鴻福) 어디서나 어느 때나 더욱 빛 나리!
한림랑(翰林郞) 급찬(級?) 김필중은 왕명을 받들어 짓고, 대조(待詔)인 대나마(大奈麻) 한단(漢湍)은 쓰다.
검교사(檢校使) : 병부령(兵部令) 겸 전중령(殿中令) 사어부령(司馭府令) 수성부령(修城府令) 감사천왕사부령(監四天王寺府令) 겸 검교진지대왕사사(檢敎眞智大王寺使) 상상(上相) 대각간(大角干) 신(臣) 김옹(金邕)
검교사(檢校使) : 숙정대령(肅政臺令) 겸 수성부령(修城府令) 검교감은사사(檢校感恩寺使) 각간(角干) 신(臣 )김양상(金良相) 부사(副使) : 집사부시랑(執事部侍郞) 아찬(阿?) 김체신(金體信) 판관(判官) : 우사록관사(右司祿館使) 급찬(級?) 김림득(金林得) 판관(判官) : 급찬(級?) 김충봉(金忠封) 판관(判官) : 대나마(大奈麻) 김□□보(金□□甫)
녹사(錄事) : 나마(奈麻) 김일진(金一珍) 녹사(錄事) : 나마(奈麻) 김장□(金張□) 녹사(錄事) : 대사(大舍) 김□□(金□□) 대력(大曆) 육년(六年) 세차(歲次) 신해(辛亥) 12월 14일 주종대박사(鑄鐘大博士) 대나마(大奈麻) 박종일(朴從鎰) 차박사(次博士) 나마(奈麻) 박빈나(朴賓奈) 나마(奈麻) 박한미(朴韓味) 대사(大舍) 박부악(朴負岳)
(*국립경주박물관 자료실에서 펌)
●문화재 정보(*문화재청)
-국보 : 제29호 -명 칭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소 재 지 : 국립경주박물관 -시 대 : 통일신라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은 부왕(父王)인 성덕왕의 위업(偉業)을 추앙(推仰)하기 위하여 구리 12만근을 들여 이 대종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뒤를 이어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동왕(同王) 7년(771)에 이 종을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하였다.
이 종은 처음 봉덕사(奉德寺)에 받들어 달았으므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施主)하여 넣었다는 애틋한 속전(俗傳)이 있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러 왔다. 봉덕사가 폐사(廢寺)된 뒤 영묘사(靈廟寺)로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鳳凰臺) 옆에 종각(鍾閣)을 지어 보존하고 있었다.
1915년 종각과 함께 동부동(東部洞) 구박물관(舊博物館)으로 옮겼으며, 박물관이 이곳으로 신축 이전하게 되어 1975년 5월 26일에 이 종각으로 옮겨 달았다.
종의 입둘레는 팔능형(八稜形)이고 종머리에는 용머리와 음관(音管)이 있다. 특히 음관은 우리나라 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로서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한다고 한다. 종 몸체 상하에는 견대(肩帶)와 구대(口帶)가 있고 견대 밑 네 곳에 유곽(乳廓)이 있고 유곽 안에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몸체의 좌우에는 이 신종의 내력을 적은 양주(陽鑄) 명문(銘文)이 있으며 앞뒤에는 두 개의 당좌(撞座)가 있고, 유곽 밑 네 곳에는 구름을 타고 연화좌(蓮華座)에 앉아 향로를 받는 공양천인상(供養天人像)이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산과 같이 크고 우람하나 조화와 균형이 알맞고 종소리 또한 맑고 거룩하여 그 긴 여운은 은은하게 영원으로 이어진다.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25∼11cm,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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