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내가본國寶문화재

▶국보 236호, 경주 장항리사지 오층석탑

migiroo 2011. 2. 11. 19:30

 

 ■ 내가 보고 느낀 국보급 문화재(23)

 
▶국보 제236호, 경주 장항리사지오층석탑

 

 

 

 

●TNT로 폭파된 장항리 절터의 석탑과 석불


일제강점기 암흑시대, 1923년 보슬비기 내리던 어느 날...
세 명의 도괴 범들이 저녁 어둠을 틈타 장항리 절터에 잠입하였다.
한 놈은 두리번거리며 주변 망을 보고 있고, 나머지 두 놈은 TNT 뭉치를 들고
두기의 오층석탑과 석불이 서 있는 연화대좌 밑에 TNT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신호에 따라 한 놈이 배터리에 연결된 전선의 스위치를 눌렀다.


꽈당, 꽈당, 꽈당~~~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연속적으로 세 번 일어났다.
그리고 두기의 석탑과 석불은 산산조각이 나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이내 곤두박질 땅바닥에 떨어 졌다.
그 순간 하늘에서 우르릉 꽝꽝~ 때 아닌 천둥 번개가 쳤다.

 

위풍당당했던 동, 서 오층석탑은 여러 조각으로 깨져 무너지고
장륙존상의 석불입상도 처참하게 파괴되어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석불을 받치고 있던 화려한 연화대좌도 몇 조각으로 갈라졌다.  
도괴 범들은 황급히 사리장구들을 찾아 챙겨 싸들고 도망쳤다.

 
어찌 된 셈인지 그 며칠 후 도괴 범들은 싸늘한 죽음으로 변했다.
흠처 간 사리장구는 어데 갔는지 행방이 묘연하고...
절터는 폐허가 되어 방치 됐다.

 

 


그리고 사건 발생 10여년 후, 1932년에 파괴된 석탑 재를 수습하여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서탑 만을 복원하고, 동탑은 파괴 정도가 너무 심하여
겨우 남아 있는 탑의 지붕돌 석재만을 쌓아 탑 형태만 유지 해 놓았다.

 


●겨울 동면에 들어 있는 장항리 절터


괄괄 흐르던 대종천의 물이 꼼짝 않고 있다.
겨울 내내 얼어붙었는지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한 줄기 찬바람이 계곡을 휘 돌고 토함산 능선으로 올라간다.

 

 

새로 만든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황망한 절터를 바라보니
석탑의 상층부가 머리를 내밀며 긴 겨울을 견뎌 내고 있다.
계곡을 건너는 나무 구름다리가 참 예쁘다.

그 흔한 콘크리트 다리가 아니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국보 제236호. 장항리사지오층석탑을 모르는 분이 있는가?
삼층이 아니고 왜 오층탑인지 궁금하다.
경주의 신라시대 석탑에서 5층이나 7층 석탑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탑 중에 몇 안 되는 오층석탑이다.
석탑이 3층과 5층의 상징적 차이는 무엇일까?
한국의 석탑은 홀수 층이 많다.


석탑은 대부분  홀수 층으로 만들어 진다.
경천사10층 석탑, 원각사지10층 석탑 같은 짝수 층이 가끔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홀수나 짝수의 의미를 크게 따지지 않는 다고 한다.
다만 음양사상으로 양의 수인 홀수를 선호하기 때문일 것이라 해석도 있다.


경주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 5층 석탑은 장항리절터오층석탑,
나원리오층석탑(국보39호), 경주남산 늠비봉오층석탑 정도가 있다.

 
장항리사지 석탑은 동, 서 쌍탑 이었으나 모두 일제강점기에 파괴됐고
그 중 서 탑은 비교적 온전하게 복원 되어 국보의 반열에 올라 있지만
동 탑은 애석하게도 탑으로서의 원형을 잃어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국보의 반열에 올라 있는 西탑

 

 

장항리사지 오층석탑이 왜, 국보급 보물이 됐는가?
탑이 멋져서 그런가?
아니다.
아마도 탑신에 새겨진 섬세한 조각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탑신 4면에 금강역사가 그야말로 리얼하고 역동적으로 새겨져 있다.
금방이라도‘어흠’소리를 내 지르며 눈을 부릅뜨고 달려 들것 같다.
불계를 수호하는 의지가 강하게 표현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리함이 있을 탑신 중앙에는 문고리를 단단히 물고 있는 용면(龍面)이 새겨져 있다.
어느 누구도 이 문을 인위적으로 열 수 없다는 단호함이 엿보인다.
그러나 어쩌랴 강력한 TNT의 위력 앞에서는 금강역사님도
어쩔 수 없었던가 도괴 범의 만행에 치가 떨린다.

 


 


 

 

 

 

●불구가 된 東탑

 

 

 

몰골이 말이 아닌 동탑의 애잔한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주 탑신은 비교적 온전하나 상층부 옥개석 탑신 4개는 행방이 묘연하다.
하단 2중 기단부는 실종 된 체 주 탑신이 기단석 대신 땅에 박혀 있다.


 

 

 


그러나 탑신에 새겨진 금강역사상을 보면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
강력한 TNT를 맞고도 조각상이 파괴 되지 않고 고부조(高浮彫)에
가까운 돋을새김의 섬세한 조각술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천 수 백년이 지났는데도 살아 있는 듯 그 조각이 생생하기만 하다.


탑은 왜 쌓는가?
탑은 불교의 발생지 인도에서부터 유래 됐다고 하지만 그 유래를
알아 볼 것도 없이 탑은 인간들의 간절한 염원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상징적인 종교적 조형물이다.
처음에는 목탑 이었던 것을 내구성이 약해 단단한 돌을 깎아 만들었다.
깊은 경지의 불심과 고도의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돌을 깎고 다듬어
온갖 정성으로 탑을 쌓았다.


그런 인간들의 염원에 의해 만들어진 탑이 이번에는 또 그 인간들이
의하여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르니 인간의 본 면은
아마도 선과 악의 이중적 존재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석조여래입상과 연화대좌

 

인간들의 만행은 탑을 파괴하는 만행에 그치지 않고 ‘장육존상‘ 의
거대한 석조여래입상의 불상마저도 겁도 없이 TNT로 파괴하였으니
그 악행의 정도가 너무하다 싶어 치가 떨릴 지경이다.


서탑이 복원 된지 그 52년 후(1975년), 파괴되어 금당지에 흩어져 있던
석불의 잔재 중 상체부분만을 겨우 수습하여 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복원 해 놓으니 입상이 하체를 잃어버려 좌상이 되어 버렸다.
하체는 물론 턱도 떨어져 나가고, 한쪽 팔도 없어지고, 광배(光背)도
산산조각이 난 것을 겨우 몇 조각 수습하여 형체만 복원 해 놓았으니
보면 볼수록 가슴만 아파온다.

 

 

그리고 또 그 후 35년 만에(2009년) 다시 석불입상은
경주박물관에 의하여 처음 복원 때 사용했던 시멘트 접합부분과
오랜 풍화로 인한 석재의 오염 물질을 제거하기 위하여 해체 보존
처리된 후 말끔한 모습으로 박물관 옥외 전시장에 다시 전시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심리는 참으로 묘하다.
깨끗이 복원된 석불을 대하니 왜지 모르게 복원 전의 그 얼룩들이 그립고 더 연민으로 다가온다. 
복원 전 모습에서 느꼈던 인간들의 만행, 파괴, 상처, 시간, 역사 등등...
이런 관념들이 일시에 상실되니 마치 수채화에서 보는 색체가 일시에 한 색으로 변해 버린 듯 한 
그런 허망함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그래서 반드시 복원이 좋은 것만은 아닌 듯싶다.
상처도 역사이고, 색의 퇴색도, 풍화의 얼룩 같은 것도...,
유물을 파괴한 인간의 만행마저도 어찌 보면 역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상의 광배에 새겨진 화불(化佛)들이 너무나 귀엽고 앙증스럽다.
그리고 석불의 수인 중에 새끼손가락이 왜 꺾여 졌는지 알 수가 없다.
석공의 해학적 장난인가?
아니면 어떤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인지....?
내 좁은 식견과 안목으로는 알 방도가 없다.


그러나 지금도 장항리 절터에는 팔각 연화대좌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박물관에 있는 석불을 원래의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바람직 하지만
한번 박물관에 들어가 문화재가 된 유물이 어찌 다시 제자리에 돌아
올 수 있겠는가. 안타까운 현실이다.

 

 

석불이 서 있던 팔각의 연화대좌의 조각상들도 빼 놓을 수 없는 걸작품이다.
대좌는 상하 2단으로 나뉘어져 상층에는 화려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하층 기단 팔면에는 안상 안에 신장(神將)상과 신수(神獸)상이 새겨져 있다.
특히 표호 하는 사자상은 금방이라도 으르렁~ 대며 달려 들것 같아 
그 조각술이 섬세하고 사실적 이어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장항리사지는 봄에 가면 좋다.
절터 아래 계곡 물 소리 들으며 연초록빛 숲에 쌓인 탑을 바라보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 육신도 마음도 맑아진다.


 

 

   인터넷 켑쳐사진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잠시 걸어 절터에 오르는 고행의 수고를
덜어 보고자 나무 계단을 만들어 놓았으니 편리성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나태함이 옛 절터로 드는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또한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하지만 포크레인을 집어넣어
절터 언덕을 깎아 자연적이 아닌 인위적인 축대 같은 가공물이 들어서니
고즈넉한 절터의 분위기가 없어져 한 마디로 말해서 환경과 분위기가
잡쳐 버린 듯 싶다. 


장항리 절터는 사적45호로 지정 되어 있고 찾아 가는 길은
경주 쪽에서 불국사 지나 석굴암 올라가는 정상 고개 길에서
감포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 계곡 옆에 위치해 있다.
(토함산 자연휴양림 부근)

 

>미지로 생각

 

 

■문화재 정보(*문화재청 자료)
  -국보 제236호(통일신라) 


▶장항리 서 오층석탑(慶州 獐項里 西 五層石塔)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장항리사지는 토함산 동쪽의 한 능선이 끝나는 기슭에 마련된 절터로서, 절의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어 마을의 이름인 ‘장항리’를 따서 장항리사지라 부르고 있다. 이 곳에는 현재 금당터를 중심으로 동탑과 서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1923년 도굴범에 의해 붕괴된 것을 1932년에 복원이 가능한 서탑 만을 새로이 복원해 놓았다. 동탑은 1층 탑신(塔身)과 5층까지의 지붕돌만 남아있으나, 서탑은 약간 소실된 것을 빼고는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서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기단부는 비교적 넓게 만들어져 안정감이 있으며,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을 본떠 조각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 몸돌의 각 면마다 문을 지키고 서 있는 한 쌍의 인왕상(仁王像)을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고 있고, 경사면은 평평하고 얇으며 네 귀퉁이는 뚜렷하게 치켜 올려져 경쾌함을 더하고 있다. 5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이 남아 있다.


탑의 1층 몸돌 각 면에 한 쌍의 인왕상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것이 특이한데, 이러한 현상은 8세기 전반기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이 탑의 독특한 특징이 되고 있다. 전체 비례가 아름답고 조각수법도 우수한 8세기의 걸작 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장항리사지 석조여래입상

 

 

 

 

국립경주박물관 옥외 전시장에 전시 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불입상이다.


높이 83㎝.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얼굴과 상반신, 광배의 일부분만 남아 있으며, 8각의 석조대좌는 불상이 발견된 절터에 있다. 머리와 둥근 육계(肉髻)는 나발(螺髮)로 표현되었고 얼굴은 근엄한 표정으로 부처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몸체의 굴곡있는 윤곽선이 그대로 드러나며, 가슴 앞에는 커다란 U자형의 옷 주름이 늘어져 있고 두 다리 위에서 주름이 갈라진 것으로 추측된다. 왼손은 파손되어 손 모양을 알 수 없지만 아래로 늘어뜨린 듯하며 오른손은 구부린 채 가슴 앞에 붙이고 있다. 배 모양의 거신광배(擧身光背)는 2줄의 굵은 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구분하고 그 위에 작은 화불(化佛)을 각각 배치했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장식했다. 비록 손상된 부분이 많아 전체적인 양식이나 형식을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근엄한 얼굴표정이나 볼륨 감을 강조한 신체표현, 장식적이고 화려한 광배 등으로 보아 8세기 후반이나 9세기 불상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