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내가본國寶문화재

▶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瞻星臺)

migiroo 2011. 4. 21. 18:37

 

■ 내가 보고 느낀 국보급 문화재(25)


▶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瞻星臺) 
 

 

        

 
경주의 4월은 그야말로 꽃의 향연장이다.
벚꽃보다 한발 앞서 핀 개나리꽃이 만개하여 고적지마다
노랑색으로 채색해 놓은 듯 눈부시다.
이에 질세라 벚꽃도 반쯤 피어 화사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말끔히 새로 정비된 첨성대 가는 길은 
꽃과 사람들로 가득하여 활기찬 젊음이 넘쳐나고 있다.

 

 

아직은 나목(裸木)인 노거수 사이로 첨성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그 아름다운 허리의 곡선을 천 수 백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전혀 흩트림 없이 보여주고 있는 그 미학적 선(線)의 유연함...
세계 최초의 천문대이기 전에 그 단순한 석조미술의 백미, 
대칭적 곡선의 부드러움에 탄성이 절로 터진다.    


 

 

 

과학과 신앙과 사상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첨성대의 신비...
천 수 백년이 지난 지금도 천문대냐, 점성대(占星臺)냐 하며
학자들 간에 구구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 의 비밀.... 


나는 오늘 그 첨성대를 찾아 천문대라는 국보급 문화재로서 
그 역사성, 과학적인 그 구조성, 건축학적인 그 놀라운 기법 같은
첨성대에 대한 각가지 정보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봄의 향연 속에 홀로 우뚝 서있는 그의 매혹적이고
신비적인 자태를 감상하려 할 뿐이다.


원주부 27단, 362개의 돌 벽돌로 정확하게 쌓아 올린 그 기막힌 상하층의 황금비율.....
사상과 신앙과 과학이 삼위일체가 되어 완벽한 조형물을 만든 그 놀라운 기술과 예술성....
설계자의 뛰어난 건축기법과 과학기술....
그리고 심미안적 사고, 미학적 곡선미, 역학적 안정성...
무엇하나 험 잡을데 없는 건축의 우수성...


고려청자가 이를 보고 만들었나?
조선백자가 이를 본 떠 만들었나?
참으로 그 유연하고 부드러운 미학적 곡선미가 사람의 심성을 맑게 해 준다.

나는 감히 첨성대를 한 여인으로 보고자 한다.
선덕여왕이 만들었음도 그러하지만
그 유연한 곡선미가 마치 성숙한 여인의 나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은 비에 촉촉이 젖은 그녀의 슬픈 듯한 모습,
안개가 낀 날은 뿌연 안개에 묻힌 그녀의 신비적 모습,
하얀 백설의 눈밭에 홀로 서 있는 그녀의 고고한 모습,  
청조한 달 빛 비친 그의 가냘픈 애련한 모습....
그녀 모습이 사무친 그리움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러나 이를 어찌하랴.
청조한 달빛을 마다하고 인위적인 조명시설을 설치하여
현대인의 눈을 홀리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30년대 경주 고적 옛 사진첩에서 가지고 온 그림이다.
벌 떼처럼 달라붙어 있는 학생들.....

사다리도 없는데 참으로 용케도 첨성대 상층부까지 달라붙어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이러고도 온전할 수 있다니 참으로 그 견고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하면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정말 아찔한 장면이다.
요즈음엔 들어가서 손으로 만지지도 못한다. 


 

 

지금은 수학여행 온 초등학생들로 와글와글 늘 만원이다.
잔디가 깔리지 않는 주변엔 늘 먼지가 뽀얗게 인다.
앞으로도 천년 이상을 버텨야 하는 살아 있는 신라의 자존심 첨성대가
부디 오래오래 세파를 견디고 건전하기를 바란다.


>미지로 생각
 

 

문화재 정보(*문화재청 자료)


●경주 첨성대 (瞻星臺)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
•지정번호 : 국보 제31호(신라시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1962 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밑에서부터 4.16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cm 높이의 돌 362개로 27단을 쌓아 만들었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半圓)에는 판석(板石)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板木)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꼭대기에는 정자석(井字石)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신라 선덕 여왕때 만들어진 첨성대가 천체를 관측했던 천문대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여러 의문들이 나오게 되면서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니라 다른 용도로 쓰인 건물이라는 주장들이 나왔다. 온갖 과학적 기술과 지식이 동원되었다는 첨성대. 그런데 정말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닐까? 그렇다면 첨성대는 어디에 쓰였던 걸까?

 


●첨성대의 비밀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다?


첨성대는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인 647년에 세워졌다. 국보(31호)로 지정되어 있음은 물론,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평가 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첨성대는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거나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성스러운 산인 수미산을 본뜬 상징물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주장이 맞는 걸까?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먼저 첨성대에 대한 기록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첨성대는 약 9미터의 몸체에 가운데 한 변의 길이가 1미터인 정사각형 창문이 나있는 병 모양의 구조물이다. 이런 첨성대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은 <<삼국유사>>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선덕 여왕 때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그 기록을 어디서 보았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래서인지 1970년대에는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근거로는 먼저, '첨성대에 나 있는 창문으로 과연 사람이 매일 드나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다리를 놓고 오르내렸다고 해도 그 창문은 여간 불편한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근거는 '땅에서 겨우 9미터쯤 올라간 곳에서 관측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겠느냐?' 하는 점이다. 9미터 정도 되는 첨성대보다는 차라리 그보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관측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를 들어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라 천문이나 수학의 원리를 반영한 상징적인 탑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라의 위기를 불교의 힘으로 극복


성덕 대왕 신종이 만들어진 경덕왕과 혜공왕 시절은 나라가 안정된 때였다. 하지만 경덕왕 말기에 이르러 귀족들은 왕권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경덕왕은 불교의 힘을 빌려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그래서 석굴암, 불국사를 지었고, 또 성덕 대왕 신종까지 만들게 된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무게가 49만 근에 달했다는 황룡사 종이며, 당나라 황제가 감탄했다는 1만 개의 불상을 모신 만불상도 모두 경덕왕 때에 만들어졌다. 이렇게 겉만 보면 경덕왕 때는 신라의 문화 예술이 한창 꽃피던 시기였다. 거기다가 당시 신라의 경주는 지붕을 전부 기와로 덮을 정도로 생활이 풍족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귀족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일반 백성들의 삶은 너무나 비참했기 때문이다.


 ◎ 첨성대 각 부분이 상징하는 것들


그러면 첨성대가 보여 주고 있는 상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앞의 이야기에서도 잠깐 설명되어 있듯이, 첨성대는 27단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선덕 여왕은 신라 제27대 왕이다. 이렇게 보면 첨성대가 선덕 여왕 때에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 맨 위에 얹혀진 정(井)자 모양의 돌을 합치면 28단, 즉 기본 별자리수인 28수를 상징한다. 그리고 또 첨성대를 받치고 있는 맨 밑의 기단석을 합치면 29. 이는 음력의 한 달에 해당한다. 몸체 중앙에 난 네모에 창을 기준으로 보면 창 위로 12단, 아래로 12단이 된다. 이것은 일년 열두 달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이 둘을 합치면 춘분, 하지 하는 24절기를 나타낸다. 이뿐만이 아니다. 첨성대에 사용된 돌의 개수는 대략 365개로 일 년의 날수가 된다. 이렇게 보면 첨성대는 하나의 상징적인 구조물로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첨성대를 보는 시각은 조금씩 다르다. 첨성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느 주장이 맞는지 가릴 수도 없고, 또 앞으로도 해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첨성대'라는 이름이다. 첨성대는 '별을 관측하는 건물'로 풀이된다. 이 첨성대란 이름 때문에 고려 시대부터 지금까지도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내용출처: 네이버 백과사전,네이버 오픈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