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速度)
서울 사는 아들 녀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지, 주말에 올라오실 때 KTX 타고 오세요. 예매하게요.”
이런 아들의 효심(?)을 나는 단호히 물리치고
고속버스를 타고 지금 서울로 올라가는 중이다.
버스 승객은 고작 12명. 몇 년 전만해도 예매를 하지 않으면 버스표를
구할 수 없었는데 요즘은 아무 때나 터미널에 가도 좌석이 있다.
명절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 당일 날 터미널에 가면 표를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만큼 버스를 이용하는 손님이 갈 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추세다.
왜? 버스 손님이 격감 한 것일까?
바로 속도 때문이다. 느리고 교통 체증으로 인한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또한 시설의 쾌적함과 안락함도 한몫을 한다.
버스 시설이 그만큼 낙후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도 민망하여 버스 기사와 몇 마디 주고 받는다.
“기사 아저씨, 이렇게 손님이 없어 기름 값이나 나오겠습니까?”
“오늘은 그래도 손님이 있는 편입니다. 빈차로 갈 때도 있답니다.”
KTX가 생기고 나서부터 항공기와 버스 승객이 격감한 현상이다.
울산 항공기 운항은 그 횟수를 반으로 줄였다는 소식도 들리니
공항과 고속버스는 문을 닫아야 할 판국이다.
좋은 것(KTX)이 생기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님을 깨닫게 한다.
울산에서 서울까지 KTX는 1시간 40분, 고속버스는 5~6시간 쯤 소요된다.
내가 버스 요금보다 두 배 이상이나 비싼 KTX를 배제하고
버스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떠난 나에게 있어 시간개념은 별 의미가 없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항공기나 고속철 같은 것들을
이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빨리 가기보다는 천천히 가는 느림의 여유를 즐기는
나의 잘난(?) 감성 때문이다.
5시간 동안 버스 타고 가면서 책도 보고, 차창가로 스쳐 지나가는
우리 산하의 변해가는 모습도 바라보면서 사색에 잠겨보기도 한다.
그리고 잠시 눈을 붙이기도 하고, 짧은 글도 쓰기도 한다.
그러나 항공기나 고속철을 타면 이런 행동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출발 후 한 두 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하고 마니깐 말이다.
사람들은 점점 속도에 중독되어 가고 있다.
‘좀 더 빨리, 좀 더 빨리...’ 하는 끊임없는 욕구의 중독성이다.
완행보다는 급행을, 급행보다는 고속을, 고속 보다는 초고속으로
점점 가속도(加速度)에 길들여 져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기차든 버스든 완행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급행마저도 없어졌다.
오로지 고속만이 존재한다.
도무지 천천히 가고자 하지 않는다.
빨리, 빨리 가려고만 한다.
항공기도, 고속철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고,
자동차도 성능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어 점점 속력이 빨라지고 있다.
KTX는 머지않아 서울서 부산까지 1시간대로 주파할 것이다.
모든 행위에 있어 과정은 생략되고 오로지 결과(목적지)만이 있다.
출발과 도착, 가고 오는 과정이 현대인들의 삶에서 실종됐다.
목적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다.
시간을 먹으며 사업하는 사람들을 빼고는 좀 천천히 가도록 하자.
그래서 목적지에 도착 할 때까지 느긋이 시간을 즐기는
여유로움을 갖는 것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 해질 것이다.
그래서 버스 기사가 손님이 없어 한숨짓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KTX가 생기고 나서 울산역은 항상 손님들로 만원이다.
며칠 전 예매를 하지 않으면 열차를 탈 수 없을 정도다.
KTX 쪽이야 싱글벙글 쾌재를 부르겠지만....
손님 뺏긴 항공사와 버스 쪽은 죽을 맛일 것이니
이야말로 불공평(?)이 아닌가 싶다.
제발, 급한 일이 아니면 일반버스도 타고 다녀서
버스 기사의 사기도 살려주고
천천히 가는 여행의 여유로움도 즐기자.
>미지로(201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