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南山 斷想

●千年寺址 홀로 지키고 있는 남간사지 당간지주

migiroo 2011. 5. 15. 00:58

▷2011.5.14

 

●千年寺址 홀로 지키고 있는 남간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909호

 

 

 

꽃 피고, 꽃 지는 오월, 경주남산의 ‘남간사지’를 다시 찾는다.
어제 내린 비로 봄 대지는 촉촉하고 하늘은 모처럼 청명하다.
남산자락 남간마을은 천년 절터에 둥지를 틀고 평화롭게 앉아있다.

 

 

 

 

그 남간마을 앞 논배미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돌기둥 두개가 있으니

바로 ‘남간사지당간지주)南澗寺址幢竿支柱)‘ 이다.
경주남산에 남아 있는 유일한 당간지주로서 오늘도 변함없이
홀로 서서 천년사지를 지키며 당간지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당시 신라 서라벌에서 가장 번창했던

절 ‘남간사’...


절의 당(幢,깃발)과 간(竿,깃대)을

꽂았던 지주(支柱,받침대)...


그 당간지주 꼭대기에 내 걸렸던

커다란 깃발이 지금도 바람에 펄럭

거리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옛 영화는 무상(無常) 속에 묻혀

사라지고 이름 모를 들꽃만

봄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다.

 

 

 

 

그래도 이제는 당간지주의 주변 환경이 잘 정비되어 보물급 문화재로서의

예우를 받고 있으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지난해 초만 해도 당간지주는 남간마을 어느 농가의 논배미 한 가운데에 방치되어 있어

바라보는 마음이 불편했었는데 이제 다행히 당국에서 땅을 매입 당간지주 주변을

정비한 것을 보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남간사의 옛 절터는 이미 남간마을이 다 차지하고
절터의 흔적을 다시 찾기는 힘들게 됐다.
 

 


당시 절에서 사용했던 우물(石井)도 실제로 남아 있으니
남간사가 얼마나

큰 사찰 이었는지 짐작이 가고 우물에는 지금도 물이 솟아 나오고 있다한다.

자그만치 1,200년된 신라시대 우물이다.

그러나 지금은 우물을 보호하기 위야 육중한 돌뚜껑으로

덮고 잠물쇠를 걸어 놔서 안을 드려다 볼 수가 없다.


마을 이집 저집 마당을 기웃거리며 절터의 흔적들을 찾아 다녀본다.
어떤 집 장독대에는 절의 기단석이 있고, 또 어느 집 마당에는
탑재들이 그리고 기둥 밑에는 주춧돌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남간사지를 나온다.
폐사지를 둘러보면 항상 느끼는 감정은 ‘허망함’ 이다.
모든 것이 ‘덧없음’ 을 절감하게 된다.
말 없는 돌(石)만이 천년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 존재는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는 돌로 된 남간사지 당간지주마저도

사라져 없어질 것이고,
나 또한 사라질 것이리라...


>미지로


 

 ■문화재 정보(*문화재청)


 ○남간사지 당간지주(慶州 南澗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909호
   -통일신라(중기)


1987년 3월 9일 보물 제90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360cm, 폭은 60cm, 두께는 45cm이다. 당간은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 불교의식(佛敎儀式)이 열릴 때 당(幢)을 달아 두는 기둥으로 이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두 개의 받침대를 당간지주라고 한다.


경주 남간사 옛 절터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논 가운데 동서로 세워진 화강석 당간지주로, 밑부분이 50cm 정도 노출되어 있다. 똑같은 형태와 크기로 마주 서 있는 두 돌기둥은 하단부가 깊게 묻혀 있는데, 바닥돌이 없고 기단부가 없으므로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던 받침돌도 보이지 않는다. 일반형을 취한 상촉하관(上促下寬)의 형태로서, 지주 외면의 양쪽 모서리는 모를 죽이고 정상부는 원호(圓弧)로 처리하였다. 원호로 처리된 상단 내면에는 십자형으로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구(竿溝)가 있으며, 거기서부터 30cm 하부에 상부 간공(竿孔)과 180cm 하부에 하부 간공을 관통해 놓았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남간사와 관계되는 당간지주로, 규모나 수법이 간단하고 부드러운 소박한 형태를 갖추었으며 몸체 두 곳에 둥근 구멍이 나 있고 정상의 내면에 십자모양 간구를 시공한 것이 특징이다.


○남간사지(南澗寺址)


남간 부락에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초석(礎石) 및 고정(古井) 등이 남아 있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신라 애장왕(哀莊王) 때의 촉향분예불결사문(香墳禮佛結社文)을 보면 애장왕 이전에 건립된 것 같다.


지름 1.28m, 두께 23.5cm의 팔각대좌(八角臺座)와 길이 80cm, 너비 40cm의 석조(石槽)가 있으며, 현재 사지에는 민가가 들어섰고 초석·축대 등은 민가에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