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南山 斷想

●망국의 恨 서린 비운의 王 경애왕릉

migiroo 2011. 5. 17. 00:29

 ▷2011.5.14

 

●망국의 恨 서린 비운의 王 경애왕릉

 
▷신라의 마지막 왕


신라의 마지막 왕은 56대 왕인 경순왕이다.
그러나 사실은 55대 경애왕이 그 마지막 왕이랄 수 있다.
왜냐하면 후백제 견훤이 포석정에서 하늘에 제(또는 연회)를 지내고 있는 경애왕을

죽인 후 경순왕을 신라의 새 왕으로 앉히고 돌아갔으니 사실상 경애왕이 신라 천년

사직의 문을 닫은 망국의 왕이 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그런 경애왕이 망국의 한을 품고 경주남산의 후미진 곳에 묻혀 있는 

그 분의 능을 찾아 나선다.


 

 


계절은 어느덧 신록이 약동하는 오월...,
그 오월도 종반을 향하여 시간의 바퀴를 바삐 돌리고 있다.
능으로 들어가는 숲길은 연두색에서 서서히 초록으로 바꾸고 있고,
능 주변에 피어있던 진달래, 철쭉 같은 봄꽃도 그 화려함도 잠깐, 이제는 지고 없다.
다만 늘 푸른 소나무들만 빼곡히 서서 능을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다.


비교적 다른 왕릉보다 조금은 작은 것 같은 경애왕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망국에 대한 그의 한이 가슴으로 전이 되어 그의 애절함과 원통함이 무덤을

더욱 외롭게 보이게 하고 있다.


 

 


무덤의 잔디가 오월의 눈부신 하얀 햇살을 받아 연초록색에서 받는 색감이 사람의
감성을 한없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만든다. 능 주변의 소나무들은 왜 그렇게 무덤 방향으로

허리를 꾸부리고 있는지 마치 왕을 보호하는 시종처럼 보인다.


경주 남산에는 우연히 신라의 시작과 끝점이 함께 공존해 있다.
남산 북쪽의 유적지 나정(蘿井)이 신라의 시작점 이라면 그 지척에 있는 포석정(鮑石亭)은

신라의 끝점인 셈이다.


 

 


나정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이기에 개국의 시작점이고, 포석정은 사실상 신라 천년

사직이 막을 내렸으니 망국의 끝점인 것이다.
경애왕릉은 나정과 포석정 지척거리인 삼릉 지근거리에 위치해 있다.
삼릉에서 불과 100미터 남짓한 거리이다.


 

 


삼릉에는 경애왕의 부왕인 신덕왕(53대)과 맏형 경명왕(54대)의 무덤이 나란히 위, 아래에 함께 있다.

(*삼릉 중 맨 위쪽의 능은 8대 아달라 왕릉이다.) 그리고 경애왕은 차마 아버지와 형의 무덤 옆에
묻히지 못하고 조금 떨어져 묻혀 있다.

 

신라왕 56명은 박, 석, 김씨의 세성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 박씨 왕은 시조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이다. 이 중 삼릉 주변에만 모두 4분의 박씨 왕이 잠들어 있다.


그러면 왜 경애왕이 망국의 왕이 됐는가?
경애왕은 왕위 재위 기간(924~927)이 불과 4년에 불과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경애왕의 실정으로 신라가 망한 것이 아니다.
통일신라 하대로 내려가면 37대 선덕왕(780~785) 이후 신라의 왕조는 그야말로 왕권 탈취를 위한

왕족끼리의 죽이고 죽는 국정이 극도로 문란한 시기로 접어들어 국력이 서서히 쇠퇴해 간다.


그 와중에 후백제의 견훤이 득세를 하고 있고, 신흥 국가인 고려의 왕건이 막강한 세력으로

신라를 압박해 들어오고 있는 그야말로 국난위기의 연속 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대 왕들은 그런 국난을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실정에 실정을 거듭함으로서 급기야

후백제의 견훤에 의해서 경애왕이 죽게 되고 사실상 천년 신라의 막이 내리게 된 것이다.


견훤은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급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문성왕의 6대 손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가니 그가 바로 56대 경순왕이다. 이에 경순왕은 바로 고려의 왕건에게

신라를 바치니(歸附) 공식적으로 신라의 사직이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경순왕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겠나를 생각하면 나라를 통째로 왕건에게 바쳤다는

것을 깊이 통찰해 볼 일이다.

이미 국력은 쇠퇴할 때로 쇠퇴한 신라. 이제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응을 안 경순왕은

전쟁없이 백성들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을 택한 것이리라....

나라를 성질이 포악한 견훤에 주는이 온화한 왕건의 고려에 귀부 시킴으로서 백성들을

살리고자 했던 그의 고민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마의태자' 는 경순왕의 아들이다. 태자는 끝까지 나라를 고수 하자고

외치다가 결국 금강산으로 들어가 야인이 됐다고 전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과 춤으로 연회를 즐기다가 후백제 견훤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왜곡된 역사이다.
무덤 속에 있는 경애왕이 들으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삼국유사 등 기록에 의하면 경애왕이 신료들과 포석정에서 제사(연회)를 연 시기는 지금으로

말하면 엄동설한 12월 달이다. 어찌 그 추운 날에 물이 꽁꽁 언 포석정 유상곡수(流觴曲水)에
연(宴)을 열겠으며, 아무리 문란한 왕이었다 할망정  그 국난위기에 가무를 즐겼겠는가.


 

 


나는 결코 경애왕을 망국의 왕이 아니라고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다만 지금의 우리들이 인식하고 있거나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포석정과 경애왕에 대한 잘못된 역사 인식은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학여행 온 한 무리의 초등학생 들이 왁자지껄 포석정에 와서
저희들끼리 떠들어 대고 있다.


“야, 여기가 경애왕이 술 마시며 춤추고 놀다가  죽은(견훤에게) 곳이라며...”


한술 더 떠서 현장 해설사도 그와 비슷한 말을 아이들에게 하고 있다.
참으로 심각한 왜곡된 역사교육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인식은  신라를 접수한 고려가 신라 망국의 원인을 고의적으로
왜곡 전할 수도 있고, 근세기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소위 식민사관
(植民史觀)에 빠져 있었던 역사 왜곡일 것이라는 식자들의 견해이다.


경애왕은 위기의 국난을 극복해 보고자 하여 포석정에서
신에게 제사(연회)를 지내는 중에 견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그 당시 모든 정황으로 보아 맞는 역사적 사실일 것이라고 본다.


이제 신라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이 시대 사학자들이나 정부는
왜곡되어 내려오는 포석정과 경애왕에 대한 역사 인식을 바로
잡아서 우리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전해 주어야 할 것이다.


오늘 나는 그런 왕의 무덤에 와서 경애왕에게 말한다.


“당신은 분명 망국의 왕이 됐지만  결코 진탕하니 술 마시고
 춤추며 놀다가 죽은 것이 왕이 아닐 것입니다.“


경애왕의 대답인양 한 줄기 시원한 봄바람이 소나무 사이를
휘~ 돌아 지나간다.

 

 

▷삼릉


경애왕릉을 나온다.
그의 부왕이 묻힌 삼릉 쪽으로 가는 길에 작은 돌다리가 놓여 있다.
근세에 놓은 돌다리이지만 제법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다.


 

 


다리를 건너니 바로 삼릉이다.
경애왕의 아버지 신덕왕은 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자신이나 맏아들 경명왕이  좀 더 나라를 굳건히 했었다면 막내아들
경애왕이 한 많은 망국의 왕이 됐겠는가.
그래서 신덕왕은 경애왕의 아버지로서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삼릉의 소나무는 참으로 멋지다.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고 멋지다고 함은 자연에 대한 나의 지극한
경외심이 발로 됐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껍질의 목피(木皮)는 현대의 어떤 미술 디자인도
결코 흉내지 못할 만큼 경이롭고 멋지다.
마치 거북의 귀갑(龜甲) 무늬 같은 올록올록한 크고 작은 비대칭
무늬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편안해 진다.
그래서 그런가, 안개 낀 날이라든가 보슬 비 오는 날 같은 특이한
날에는 전국의 많은 사진작가들이 와서 삼릉의 소나무를 찍어
멋진 사진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삼릉의 소나무는 사진작가가 아니더라도 어떤 아마추어가
사진을 찍어도 아주 훌륭한 작품이 된다. 


삼릉의 무덤 3개 중 가운데 것이 경애왕의 부왕 신덕왕의 능이다.
53대 신덕왕은 전대 왕 효공왕이 후사 없이 죽자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8대 아달라 이사금(왕)의 23대손이다.
그러나 제위 기간 중 전대왕인 효공왕의 문란한 정사를 수습하기도
전에 나이가 많아 재위 5년 만에 죽었다.


 

 


신덕왕이 죽자 그의 맏아들 경명왕이 뒤를 잇고, 경명왕이 후사 없이
죽자 그의 아우 경애왕이 뒤를 이어 왕이 된 것이다.


삼릉의 맨 아래 쪽 무덤이 바로 경명왕릉이고 경애왕릉은 그 아래
홀로 떨어져 후미진 곳에 묻혀 있으니 부자(父子) 셋이
한 지역에 잠들어 묻혀 있게 된 것이다.

 


▷포석정지


경애왕을 이야기 하면서 포석정을 빼 놓을 수 없다.
거기서 그가 비참한 마지막 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혹자는 견훤이 죽였다고 하고, 또 다른 견해는 스스로 자진했다고 전한다.
어찌 됐던 자살이든 타살이든 견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봄철과 가을철 포석정은 늘 아이들로 부적된다.
경주에 수학여행 온 초등학생들이 단골로 들르는 탐방 코스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이 열심히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다.
제발 선생님(문화재 해설사)의 설명이 경애왕을 욕보이는 왜곡된 설명이
아닌 올바르게 설명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쩌랴 삼국사기에 술 마시며 연회를 즐기다가 경애왕이 죽었다고
기록 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신라를 망하게 한 고려 정부의
관료인 김부식이 고려의 시각으로 쓴 고려의 사기(史記)이다.
그래서 천년 동안 유지 되어 온 신라의 저력을 폄하하기 위한 고의적 기록일
수 있는 것이다.


 

 


포석정의 문화재 정식 명칭은 사적1호, ‘포석정지(鮑石亭址)’이다.
원래 있었던 정자는 없어지고,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술잔을 띄웠던 유배거(流盃渠)의 유적만이 남아있다.
그저 세월의 무상함만이 꾸불꾸불한 유배거에 덕지덕지
묻어 있을 뿐이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어찌 유상곡수연를 이해 할 것이며
선생님 또한 유배거의 과학적 슬기로움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나 학생들에게 경애왕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도 해 줘야 되겠지만...
딱 한 가지 꼭 말해 주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포석정 유상곡수연 유배거의 과학적 설명이다.


어떻게 흐르는 물이 멈추지 않고 뱅뱅 돌아가는 지...
왜 그 물위에 띄운 술잔이 멈춤 없이 한 바퀴 돌고 다시 돌아가는지...
유상곡수연의 유래와 참 의미는 무엇인지...


그 수수께끼 같은 비밀을 가장 재미있게 호기심 많은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선생님이 과연 몇이나 될까....


포석정을 나온다.
아직도 그때의 비참한 장면이 머리에 영상처럼 떠오른다.


무자비하게 창검을 휘두르고 있는 견훤의 군사들....
그들의 창검에 죽어 나가는 나약한 신라의 군사들....
난장판이 된 연회장(제례장)...
혼비백산한 왕과 신료들의 공포...
울부짖는 궁녀들의 울음소리....
왕과 왕비의 참담한 최후의 모습...
장검을 빼들고 호탕하게 웃는 견훤의 모습...


파괴된 정자, 널브러진 음식물과 집기들...
목 잘린 죽검들...
그리고 선혈이 낭자한 핏물...

  
당시 상황을 요약하면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역사는 말이 없다.
그러나 들리지 않을 뿐이지 역사는 끊임없이 말을 한다.
올바른 역사관이야 말로 미래를 여는 지름길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안다.
그래서 역사는 왜곡 되어서도 안 되고 숨겨서도 안 된다.


오늘 나 홀로의 경애왕릉 답사는 유적지 탐방이 아니고
경애왕을 통한 나의 사색(思索)이다.


오월의 산바람은 너무 싱그럽다.
그러나 벌써 한 낮은 너무 덥다.
봄이 너무 짧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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