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4.3
다시 ‘운흥사지(雲興寺址)’를 찾다.
왜 이리 바람이 불까? 초속15~16m, 봄바람치고는 너무 강하다. 여린 봄꽃들이 강풍에 속수무책으로 온 몸을 바람에 내 맡기고 있다. 간간히 빗방울도 차창을 때린다.
친구와 함께 울산의 운흥동천 깊은 산골 ‘운흥사지’를 찾는다. 천년 사지에 오르니 바람도 잠시 멎고 빗방울도 보이지 않는다. 너른 절터는 시간이 정지된 듯 적막에 싸여 있고, 바람소리만이 마른 갈대숲을 헤집고 다니고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들리는 소리는 바람소리만이 아니다. 염불소리도 들리고, 스님들의 한숨 소리도 들린다. 원혼이 우는 소리도 들리고, 손발이 부르트도록 닥나무 으깨는 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다그치는 관리들의 호통 소리도 들린다.
절터 윗 쪽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거목 한그루가 서 있다. 그리고 그 밑에 빈 벤치 하나가 이방인처럼 앉아 있다. 천년 절터와 벤치.... 그 절묘한 배치에 아무래도 깊은 뜻이 숨어 있는 듯 싶다. 앉아서 깊은 사색에 잠겨 보라는 배려인 듯 싶고, 벤치에 앉아 천년 운흥사지의 숨소리를 들어보라는 뜻 같기도 하다.
노거수의 밑 둥은 그야말로 천년 세월이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있다. 조선시대 후기까지 절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지 않았나 생각 든다. 현재 절터에 남아 있는 운흥사의 유일한 유물 빈 석조(石槽) 두 개가 말라 죽은 잡초 더미 속에 쓸쓸히 누어있다. 하나는 절터 아래 쪽 축대 앞에 또 하나는 절터 맨 위쪽 축대에 있다. 아래 쪽 석조는 이끼하나 없이 깨끗한데 위쪽 석조는 웬일인지 시퍼런 이끼가 인고의 시간처럼 석조에 달라붙어 있다.
운흥사는 500여명 스님들의 수행 도량이었다는데 대찰의 석조치고는 너무 왜소하다. 아마도 닥나무를 불리고, 으깼던 도구로 쓰였지 않나 생각하니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조선시대 스님들의 고초가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 온다.
조선시대 운흥사는 조정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만드는 사찰로서 동원되어 스님들이 종이 만드는 노역에 시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사찰에 감독 관리가 파견되고 염불은 뒷전 스님들은 날마다 닥나무를 베어와 종이 만드는 일에 종사했다하니 그 노역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래서 스님들이 하나, 둘 몰래 절을 떠나(도망) 버리니 급기야 절문을 닫게 됐다는 기막힌 이야기도 전해 온다.
닥나무로 종이 만드는 일은 99번의 손질을 거친 후에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100번째 손을 거친 종이라 하여 일백 百자 백지(百紙)라 불린다 한다. 한지의 복잡한 작업 과정을 간단히 옮겨 본다.
매년 11월에서 다음 해 3월까지 1년생 닥나무를 베어내어 커다란 솥에 넣고 삶는다. 그다음 겉껍질을 벗기고 물에 불린 다음 적당한 길이로 잘라 솥에 넣고 잿물에 삶는다. 다시 흐르는 물에 담가두어 잿물을 씻어내고, 햇볕을 쬐어 탈색을 시킨다. 표백된 닥을 건져내어 물기를 짜내고 방망이로 여러 번 쳐서 뭉친 섬유다발을 풀어 준다. 다음, 통에 넣어 물을 붓고 잘 저어서 돗자리 등으로 종이뜨기를 한다. 그리고 압착하고, 말리고, 두드리는 과정을 거쳐 종이 조직이 치밀하고 강도와 광택이 나도록 손질을 한 후에야 비로소 한 장의 한지가 탄생하게 된다 .(이상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 ‘문화재 사랑’에서 발췌)
조선시대에 사찰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한지를 만들게 한 것은 운흥사 뿐이 아닐 것이다. 염불 수행은 고사하고 날이면 날마다 관리들의 다그침 아래에 종이를 만드는 노역에 시달렸으니
그 때 스님들의 한탄 소리가 지금도 운흥사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듯 하다.
이끼 낀 석조를 어루만져 본다. 아직도 운흥사 스님들의 거친 손길이 석조에 배어 있는 것만 같고, 그 분들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운흥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 대사가 창건 했다 전하고는 있으나 26대 진평왕이 632년에 죽었으니
원효의 나이 당시 새파란 20대였을 것이다. 아직 득도(得道)도 못한 청년 원효가 대찰 운흥사를 창건
했다는 것은 좀 과장된 것 같고 이는 원효의 유명세를 갖다 붙인 후대 사람들의 염원이 아니었나 싶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절터를 바라보니 문득 불가에서 말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글이 생각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태여나고 멸한다. 한 순간도 머무름이 없고 흘러 변한다. 그래서 무상한 것이다.
운흥사지도 또한 영원하지 못할 것이다. 천년 사지 석조도 언젠가는 한 줌 먼지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나 또한 죽어 없어 질 것이고, 나로부터 모두 떠나 버릴 것이다.
바람이 다시 분다. 함께한 친구가 발길을 재촉한다. 서둘러 운흥사지를 나온다. 재 넘어 부도 밭(승탑군)이 있지만 보지 않고 그냥 떠난다. 그 또한 무상할 것이니 스님들의 무덤이라는 부도를 봐서 무엇하리... 보는 것 보다 보지 않는 편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註解
운흥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를 넘겨 그리고 조선의 영조 때까지 현존했다. 영조 25년(1749) 출간한 <학성지>에 폐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외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운흥사 관련 기록이 있고, 사명대사도 이곳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학술조사 결과 금당지, 온돌건물지, 수조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운흥사에서 간행되었던 총 19종의 불서 중 경판 15종은 현재 양산의 통도사가 소장하고 있다. 운흥사지 부도는 울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울산시 자료 간추림)
*사진은 핸드폰으로 찍은 것이라 선명하지가 않다.
>운흥사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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