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전국문화재 斷想

가야사 再考

migiroo 2011. 10. 17. 18:12

 

가야사 再考

 

잃어버린 철의 왕국, 금관가야사를 다시 생각한다.

 

 

 

오래전에 가야사에 대한 전공교수의 강의를 잠시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 땐 가야사에 대한 관심이 별로 깊지 않았다. 그러다가 며칠 전 방문했던 김해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서야 나의 좁았던 가야사에 대한 인식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됐고, 아울러 잘못된 가야사에 대한 개념을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가야는 보통 고령의 대가야, 김해의 금관가야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가야는 모두 6가야로 이루어 졌고, 이것을 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6가야는 금관가야, 대가야, 소가야, 고령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를 말하며 이들 고대나라들은 대부분 지금의 김해지방을 비롯한 영남지방에 위치해 있었다. 김해지방의 금관가야는 6가야 중 가장 세력이 컸던 나라였고 수로왕 이후 자그마치 491년간이나 유지 됐던 나라였다.

 

  
 
이들 가야연맹국은 강대국 신라와 백제 사이에 끼어 늘 약소국가로 겨우 나라를 지탱해 오다 드디어 신라의 법흥왕(532)때에 이르러 결국 신라에 합병되니 근 500년 사직에 그 종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 후 가야의 역사는 서서히 땅속에 묻혀버리고 찬란했던 철의 문화도 철저히 축소 왜곡되어 남방의 아주 작은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역사서는 후대의 기록이다. 가야사를 쓴 후대의 역사가들의 기록은 고려시대에 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같은 기록에 의존하게 되니 그네들이 올바르게 가야사를 기록 했었겠나 하는 의문이 가니 역사기록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처럼 의도적이든 아니든 가야사가 실제보다 과소평가되어 기록 된 것이리라 여긴다.

 
이상은 아마추어 시각으로 본 지극히 단편적인 가야사에 대한 개괄이다. 해서 좀 더 구체적이고도 전문적인 가야사에 대한 인식을 재고 해 보고자 한다. 아래 내용은 가야사 재고에 대한 내이버 지식란에 실린 내용을 인용한 것임을 밝혀둔다.

 

내가 이 긴- 가야사에 대한 내용을 발췌하여 여기에 옮기는 이유는 가야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함께 공유하고 무리하게 여기에 올리는 것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앞으로 고령지방의 '대가야' 박물관도 찾아 보고 좀더 깊이 가야사를 공부 하고자 한다.

지루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한번씩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가야 역사


한반도 고대사는 흔히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역사에 관해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문헌들이 고려 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모두 전하지 않지만, 고구려의 역사서인 <유기>와 <신집>, 백제의 <서기>, 신라의 <국사>는 고대 국가 팽창기에 중국과 다른 주체적인 입장에서 각기 자기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들이다. 그런데 통일 신라에 이르면 공식 역사서를 편찬하지 않는다. <화랑세기> <고승전> <제왕연대력> 등 특정한 분야의 역사서들만 있을 뿐이다. 이미 중국(당)의 속국이 되었으므로 독립 국가로서 자체 역사서는 편찬하지도 못할 뿐더러 필요도 없어졌고, 중국의 한 지방 역사로 다루어지면 족하기 때문이다.


'삼국' 시대로 인해 가장 크게 피해 본(?) 역사가 바로 가야의 역사이다. 가야 6국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김해의 금과 가야는 무려 500년 가까이 존속했던 왕조인데, 우리가 배운 역사 교과서에는 불과 단 한 페이지 분량으로 소개하고 있는게 고작일 정도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우리 나라의 단일 씨족으로는 가장 수가 많다는 김해 김씨의 시조가 바로 금관가야의 건국 시조인 김수로왕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알에서 났다는 그는 무려 158세를 살았고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그녀도 157세를 살았다)을 맞아 왕후로 삼았다고 전하는데, 상식적으로 볼 때 누가 보아도 이 기록은 사실이 아닌 설화다. 그런데 고조선 시대쯤 거슬러올라간다면 또 몰라도 김수로왕이 통치하던 시기는 기원1,2세기 무렵인데도 그런 설화 형태로밖에 전하지 않는다는 건 고대의 그 누구도 가야 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어머니가 가야 왕족 후예인 김유신의 누이였으므로 가야 왕족과 인척관계가 있는 신라의 문무왕은 즉위하자마자 그간 단절되었던 김수로왕의 제사를 계속 지내라는 명을 내리고 그 경비로 토지를 내리는데, 그것도 역시 개인적인 조상 받들기에 불과했을 뿐 역사적인 관심을 보인 건 전혀 아니었다.


이 점에 대해선 신라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가야를 멸망시킨 것이 신라의 법흥왕(혹은 진흥왕)인테도 신라는 가야의 역사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통일 신라가 당당한 독립국이었다면 삼국 통일을 이룬 즉시, 이제 신라의 한 부분이 된 고구려와 백제, 가야 등에 관해 공식 역사서를 편찬해야 했을 것이다. 한 다리 건너뛴 고려 시대에 겨우 삼국에 관한 역사서가 편찬되었지만 여기에도 가야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나마 가야에 관해 전하고 있는 문헌은 <삼국유사>뿐인데, 이것도 가야가 망한 후 가야 유민이 쓴 <개황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신라가 그토록 떠받드는 중국은 이전 왕조를 멸하고 태어난 새 왕조가 50년 안에 전대에 관한 공식 역사서를 편찬하는 게 관례로 되어 있었다.


김수로왕 시절만 해도 가야는 신라보다 강국이었다. 그 점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사건이 있다. 서기 102년에 신라의 주변에 있던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난다. 서로 다투던 이들은 더 힘센 신라에 중재를 의뢰하는데, 신라의 파사이사금은 자신이 없어 가야의 김수로왕에게 다시 의뢰한다. 김수로왕이 문제가 된 지역을 음즙벌국의 소유라고 정해 주자 골칫거리가 해결된 파사이사금은 그 보답으로 6부에 명하여 김수로왕을 접대하도록 한다. 그런데 6부 중 한지부는 서열이 낮은 자를 시켜 왕을 접대하게 한다. 이에 분노한 김수로왕은 부하를 시켜 한지부의 우두머리인 보제를 죽인다.


6부의 장이 죽었으니 파사이사금으로서는 펄쩍 뛸 일이지만 감히 김수로왕을 탓하지 못하고 하수인만을 잡으려 할 뿐이다. 그 하수인을 음즙벌국으로 도망쳤는데, 음즙벌국은 파사이사금의 송환 요구를 거절하고 버티다가 마침내 군사를 일으킨 신라에 항복하게 된다. 이는 당시 가야와 신라의 역학관계를 알려 주는 사례이다.


한때 이처럼 강성했던 가야는 끝내 6세기 초 신라에 망하고, 잔존 세력이 백제에 의탁하여 백제와 신라의 전쟁에서 신라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그마저 신라의 손에 전멸당하고 만다. 당시 신라의 장수는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이었는데, 그는 가야 왕족 출신이니 가야는 결국 가야 왕족의 후손에 의해 멸망한 셈이다.


약 500년간을 존속한 왕조가 어째서 고대 국가의 성립을 이루지 못했을까? 이 점은 의문이지만, 진정 고대 국가 성립을 이루지 못했는지 어땠는지조차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가야에 관해 알려진 사항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지방 어느 부족이든 각자 제 나름의 역사에 관심을 두기 마련인데, 신라가 책임 지지 못한 가야의 역사에 지금 가야 6국에 해당하는 지역인 경남 성주, 고령, 김해, 함안, 진주, 고성 지방 사람들은 지금 얼마만큼의 관심을 가지고 가야사에 접근하고 있을까 모른다.

 

*아래 글은 가야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주요 가야 유물중에 금동관에 대한 자료가 좋기에 퍼와 여기에 올린 것이다.

 

흔히 관(冠)이라 하면, 신라의 화려한 금관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고대사회에서 관은 단순히 머리를 장식하고 보호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엄격한 위계질서에 의해 유지되었던 삼국시대에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관의 형태와 재질이 구분되었습니다. 때문에 신라의 화려한 금관은 신라의 최고 권력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야는 어떠했을까요?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가야 금관(왼쪽)과 오구라 컬렉션의 가야 금관(오른쪽)

 

 

●가야의 금관과 금동관


가야의 금관과 금동관은 현재까지 고령 지산동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등 대가야지역을 중심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신라에 비해 수량이 많지 않는데, 이는 가야가 관을 만들어 분배할 만큼 정치적인 성장을 이루기 전에 신라와 백제에 병합되었던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가야의 관은 인접한 신라와 백제의 영향을 받아 신라나 백제의 관과 유사한 형태도 있지만, 가야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금관으로는 호암미술관 소장품과 일본 동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오구라(小倉)컬렉션이 있습니다.

 
호암미술관 소장 금관은 고령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며 대가야 최고의 금속공예를 보여주는 명품의 하나입니다. 굽은 옥과 달개로 장식된 비교적 넓은 띠모양의 관테(臺輪)에 4개의 세움장식(立飾)을 금실을 이용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부착하였습니다. 세움장식은 가장 꼭대기가 연꽃 봉오리모양이고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풀잎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세움장식의 경우 관테에 못으로 고정하는 것이 많은데 비해 이 금관은 실로 연결한 것이 특징입니다. 형태는 신라 관이 나뭇가지 모양과 사슴뿔모양을 하는 것과 달리 풀잎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세움장식을 가야 관의 특징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구라 컬렉션의 금관은 띠모양의 관테 중앙에 원형과 물방울모양의 달개로 장식된 연꽃 봉오리모양 세움장식을 배치하고, 양쪽으로 길게 뻗은 풀잎모양의 세움장식이 두 개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신라 금관에 비해 단순한 구성이지만, 가야관의 독창성과 화려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금동관으로는 아래의 고령 지산동 30호와 32호 무덤 출토품, 성주 가암동 발견품이 대표적입니다. 지산동 30호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넓은 띠모양의 관테에 비해 매우 작은 세움장식 3개를 부착한 형태입니다. 연꽃 봉오리모양만으로 구성된 보다 단순한 세움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관테의 길이가 짧고 함께 출토된 두개골로 보아 어린아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주 가암동 파괴고분에서 발견된 금동관은 꽃과 풀 모양 세움장식 세 개를 배치하고 세움장식과 관테에 18개의 원형 달개를 장식한 형태입니다.

 
 


                                ▲고령 지산동 30호 출토 가야 금동관(왼쪽)과 성주 가암동 출토 가야 금동관(오른쪽)


가야의 금관과 금동관은 수량이 많지 않음에도 형태가 정형화되지 않고 다양하지만, 꽃이나 풀모양의 세움장식, 간결한 구성이 가야관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1,500년 잠에서 깨어난 대가야의 꿈


지산동 고분군은 병풍을 둘러놓은 것처럼 고령읍을 감싸고 있는 주산(主山)의 능선을 따라 무덤이 만들어진 대가야의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대가야의 왕도였던 고령읍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거대한 봉토분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200여기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1978년, 지산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던 중 32호 무덤의 토기 위에 푸른색의 녹이 덮이고 여러 조각으로 깨어진 금속유물이 확인되었습니다. 많이 부식되고 부서져 녹슨 금속조각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정식발굴조사로 확인한 최초의 가야 금동관이었습니다. 몇 달간의 발굴이 끝나고 그보다 더 오랜 기간과 어려운 보존처리 작업을 통해 녹슬고 깨어졌던 가야의 관은 어느 정도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고령 지산동 32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표면에만 도금이 되어 있습니다. 형태를 살펴보면, 띠모양 관테에 세움장식은 하나만 부착되어 있습니다. 윗부분에 연꽃봉오리(또는 보주형)로 장식한 광배(光背)모양의 금동판 좌우에 꺾인 가지모양의 작은 세움장식을 못으로 고정한 형태로, 작은 세움장식의 끝부분도 작은 연꽃봉오리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세움장식과 관테의 가장자리는 연속점무늬와 물결무늬를 표현하고 사이 사이에 대롱모양의 무늬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세움장식의 중앙은 연속점무늬와 물결무늬 등으로 X자를 그리고 다시 수평선을 그어  모양으로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각 선의 교차는 황금분할의 비(比)를 이루어 단조로움을 깨고 선과 면의 대칭미를 극대화 하고 있습니다.

 
 

 

                                               ▲고령 지산동 32호의 가야 금동관, 19.5cm,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관 앞쪽에 넓은 판으로된 세움장식을 한 것은 황남대총 남분의 은관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형태와 만들어진 시기가 비슷하여 유사점이 거론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든 재료에 있어 은과 금동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황남대총 은관과 달리 새깃털모양의 세움장식이 없으며 세움장식이  형태의 디자인이 있습니다. 또, 관테 앞부분이 곡선이 아니라 일직선을 이루고, 관테와 세움장식이 따로 제작되어 못으로 고정된 차이가 있습니다. 세움장식이 산(山)자형과 유사하여 신라의 나뭇가지모양 세움장식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분명 신라의 전형적인 세움장식과 달리 풀과 꽃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야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가야 최고 권력자를 위해 만들어진 이 금동관은 오랜 세월 어두운 땅속에서 녹슬고 부서져 그 화려한 빛을 서서히 잃어갈 즈음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1,500년 전 그때처럼 반짝이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대가야의 화려한 문화와 세련된 미적 감각, 뛰어난 금속공예기술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전시실에서 이 금동관을 보고 있노라면 신라, 백제와 힘을 겨루면서 키웠던 대가야의 웅대한 꿈, 강력했던 대가야 왕의 권위가 느껴지는 듯 합니다.(*자룔출처 : 네이버 백과)
 
 
■참고적으로 아래 내용은 김해 지방에 있었던 금관가야의 왕계보이다. 


1.수로왕 (재위 42년 ~ 199년)
2.거등왕 (재위 199년 ~ 253년)
3.마품왕 (재위 253년 ~ 291년)
4.거질미왕 (재위 291년 ~ 346년)
5.이시품왕 (재위 346년 ~ 407년)
6.좌지왕 (재위 407년 ~ 421년)
7.취희왕 (재위 421년 ~ 451년)
8.질지왕 (재위 451년 ~ 491년)
9.겸지왕 (재위 491년 ~ 521년)
10.구형왕 (재위 521년 ~ 5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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