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索의 窓門/태화강 이야기~

망해사지 여정~

migiroo 2012. 6. 3. 12:10

 

 >2012.5.31

 

망해사지 여정~

 

 

●산문으로 들어가는 길~

 

 

 


울산 망해사지는 보물급 문화재인 석조부도(승탑))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고,
그리고 또 처용(處容)설화가 깃든 곳으로도 유명한 절터이다.
그 절터에 지금의 망해사가 있고 위치는 울산시내 지척에 있지만 언제나
인적이 뜸해 조용하고 아담한 작은 절이다.
망해사 산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소나무 숲길로서 아주 호젓한 길이다.
요즘 같은 낮 시간이 긴 계절 저녁 해질녘 무렵에 부근에 차 세워두고
사랑하는 연인과 손잡고 걷던지, 젊은 아빠, 엄마가 아이들 손잡고 걷던지
오순도순 소나무 숲길을 걸어서 절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통일신라 시대의 부도도 돌아보고 온다면 멋진 역사 탐방 산책 코스가 될 것이다.


오늘 나는 카메라를 둘러매고 쓸쓸히 혼자서 망해사를 찾는다.
절 초입 큰길에서 망해사까지는 약 0.9km, 그 길을 걸으면서
몇 체 안 되는 농가도 흠처 보고, 길가에 핀 들꽃과도 인사를 나눈다.
봄꽃들은 어느새 가버리고 몇 종 안 되는 여름 꽃들만 드문드문 보인다.
노란 금계국, 하얀 개망초 그리고 파랑 꿀풀꽃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이름이 ‘꿀풀’이라는 애들은 길가 무덤 위에 무리를 지어 꽃을 피웠는데 
그 꽃이 예쁘지도 우아하지도 않아서 인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러나 꽃 속에 유독 꿀이 많아 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꽃이라니
사랑에 목마른 나로서는 참으로 부러운 애들이다.

 

 

 

 


망해사지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도가 조금 있으나 비교적 완만한 키 큰 소나무 숲길이다.
아쉬운 것은 정겨운 흙길이 아니고 투박한 포장길이라는 점이다.
산문으로 들어가는 길 가에 정말 크고 멋진 별장 한 체가 아주 높게 싼 돌 축대 위에 주변을 압도하듯 서 있다.
누가 사는 별장일까?  철 대문에 커다란 잠을쇠가 채워져 있다.


망해사에는 산문(일주문)이 없다.
들어오는 자 막지 않고, 나가는 자 말리지 않겠다는 것일까?
일주문 밖은 속세요, 일주문 안은 불계인데 그 일주문이 없으니
속세와 불계가 다 통하는 산문이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이마와 등에 땀이 촉촉이 난다. 이 정도 걷고도 숨이 차다니....
이제는 정말 나도 늙었다는 것이 실감난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몹쓸 병 안 들면 한 20년은 더 살 수 있을는지.....???
그러나 그것은 욕심이고 탐욕이다.
그냥 지금 이렇게 멀쩡할 때 조용히 눈 감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오래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적당히 살되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삶일 것이다.
나는 절대로 장수를 욕심내지 않을 것이다.

 

 

 

 

절 입구 큰 자연석에 ‘영취산 망해사(靈鷲山 望海寺)’ 라는 입석이 보인다.
망해사는 문수산에 있는데 왜 영취산이라고 했지...?
원래 영취산은 고대인도 마갈타국의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설하였다는 산이다. 양산 통도사가 영취산에 있으니
불교와 밀접한 망해사 또한 그 영취산을 빌렸지 않나 생각 든다.
하긴 문수산도 문수보살의 이름을 딴 산 이름이니 영취산이라고 했다고 해서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듯 싶다. 망해사(望海寺)라는 절 이름의 의미는 뭘까?
절 이름에 엉뚱하게도 바다해자(海)가 들어가 있으니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터...
글자 그대로 해석 한다면 ‘바다를 바라보며 그리워한다.’ 는 뜻이 아닌가 싶다.
어쩠던 시간은 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처용설화와 관계되는 절 이름이니
그 설화를 이해하는 것이 망해사를 풀이하는 열쇠가 될 것 같다. 

 
절 입구 오른편으로 망해사지 부도로 가는 돌계단이 보인다.
울창한 소나무 아래에 있는 계단이 마치 열반으로 들어가는 계단 같이 생각 든다.
절 먼저 볼까, 부도 먼저 볼까 하다가 부도 먼저 보기로 하고 그 열반의 계단으로 올라선다.


 

 

 

계단으로 올라서니 서쪽 햇빛을 받은 하얀 화강암의 부도 두 기가
수채화 같은 싱그러운 초록빛 숲속에 은둔자처럼 조용히 앉아 있다.

 

 

 

 


●부도(浮屠)와 승탑(僧塔) 이라는 이름~


망해사지 부도는 부도(浮屠)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승탑(僧塔)’ 이라고 부른다.
문화재청의 공식 명칭이 ‘망해사지 승탑(보물 제173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늘 쓰는 부도라고 부른다.
또 어떤 문화재 관련 단체나 사이트들도 ‘망해사지 석조부도‘ 라고 부른다.
어떤 교수는 부도라는 이름 자체가 일제잔재라고 하면서 부도라는 용어는
사용해서는 안 되고 승탑이라고 고쳐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광복 66년을 훌쩍 넘겼는데도 아직도 우리 주변엔 일제 잔재가 산재해 있으나
정부는 뒷집만 지고 있고, 그 잔재를 일제히 청산 할 일은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그저 묘연할 뿐이다.
어찌됐던 망해사지 부도만큼은 문화재청에서 공식적으로 승탑으로 이름 붙였으니 앞으로 승탑이라고

불러야 할 듯 싶다.


승탑은 말 그대로 승려(스님)들의 분골(粉骨)이나 사리(舍利)를 안치한 탑 형식의 무덤을 말한다.
입적(入寂)한 모든 스님들의 승탑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고승이라든가 불교계의 공적이 많고 덕망과 도가 깊은 스님이 입적하면 절 근처에 승탑을 세워

불자들로 하여금 그의 행적을 기리게 하는 것이다.


망해사지 승탑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승탑 중 비교적 덩치가 크고 상하 비율이
대단히 좋은 탑인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분 것인지 알 수가 없단다.
보통 승탑에는 탑에 안치된 분의 이름을 새겨 놓는 것이 상례인데 그 명문이
없으니 탑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계에서는 망해사지 승탑을 그냥 석탑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니깐 스님의 사리나 분골을 안치한 승탑(부도)이 아니고 법당 앞에 세운
일 금당 쌍 탑 형식의 석탑일지도 모른다고 하니 우리야 3층, 5층하는 탑만
탑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도 믿어지지 않는다. 
 

 

 

 


●망해사지 승탑 어떻게 생겼나?


망해사지 승탑은 통일신라 탑으로 동, 서 탑이 팔각형식으로 된 쌍둥이 탑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동탑의 지붕돌(옥개석) 한쪽이 깨져 유실 되고 없다.
동탑은 파손되어 쓰러져 있던 것을 1960년도에 복원한 것이라 하는데
깨진 옥개석 조각이 어딘가의 땅 속에 묻혀 있을 듯 한데 알 수가 없다.

 

 

 

 

우선 그동안 배운 것이 조금 있으니 내 나름대로 이모저모 탑을 살펴본다.
탑 맨 아래 지대석은 4각이고, 그 위의 하대석을 보니 8각의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그 위의 팔각 둘레에 복련의 연화문이 있고,
그 연화문 위에 혹이 솟아오른 듯 귀꽃이 앞으로 툭 튀어 나와 있다.
중대받침과 상대받침은 3줄의 주름으로 되어 있고, 그 중간에 들어간 
중대석은 8개의 탱주가 있을 뿐 각 면은 그냥 밋밋하다.
그러나 상대석은 화려한 16잎 앙련의 연꽃을 새겨 넣었는데 정말 멋지다.
그리고 상대석 위에 탑신괴임 또한 안상이 새겨져 있고 그 위에 작고 예쁜
복련 받침이 탑의 중심부인 탑신부를 단단히 떠받히고 있다.

 


 
탑의 중심부인 탑신부에는 사천왕상 같은 조각을 없지만 그 대신 4면 마다
문비가 새겨져 있어 문을 열고 탑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승탑의 가장 아름다움은 날렵하고 스마트한 옥개석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한옥의 팔작지붕의 추녀마루처럼 날렵한 곡선이 활처럼 휘어져 아래도 내려오다
살짝 다시 올라간 곡선을 보면 옛 여인네의 하얀 버선코처럼 경쾌하다.
동탑의 옥개석은 팔각 두면이 깨져 유실되고 없으니 그 아픈 시간을 말해 주듯
가슴이 짠하다.


상륜부는 불행하게도 두 탑 모두 전체가 유실되고 없다.
그러나 깨지고 없어진 아픈 상처도 오랜 시간의 한 단면이니
그리 안타까워하고 애석할 필요가 없는 듯 하다.

깨지고 파손 된 자체도 역사이다.

그 아픈 상처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 또한 소중한 것이다.

 

 

 

 

 

 

 

 


어쩠던 신라문화권에 속한 울산이 인근 경주에 비하여 남아 있는 유적들이 턱없이 빈약한 편인데

그나마 다행히도 경주에도 없는 통일신라시대의 멋진 승탑이 울산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위로가 된다.

 

 

●석가여래 입상


승탑 아래 한 단 아래로 내려가지 아주 근엄한 모습을 한 큰 석가여래 입상이 저녁 석양을 받으며 서 계신다.

석불은 비록 근년에 기계로 만든 것 같은데 그 신체 비례가 아주 잘 맞고 얼굴 표정이 엄숙하고 근엄하여

만든 이의 정성이 엿 보인다.


 

 

 

 

 


어쩌면 이 석불도 앞으로 천년이 지나면 보물이나 국보로 지정 될 지도 모른다.
석불 아래에 스님 한분이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계신다.
그 순간을 놓칠 새라 스님 몰래 찰칵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망해사 경내~


 

 


저녁 석양이 하얀 화강암의 승탑 위에 내려앉는 모습을 보고 절 마당으로 들어선다.
시간은 저녁 예불 시간. 스님이 치는 범종 소리가 저녁 하늘로 울려 퍼진다.
절에서 아침, 저녁 예불 직전에 범종을 치는 신앙적인 의미는 종소리를 듣고
삼라만상 모든 중생들을 비롯한 생명체들이 번뇌로부터 벗어나라는 부처님의
불음(佛音)임을 의미한다.
 

스님은 종을 꼭 33번을 타종하셨다. 
나는 종각 앞에서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스님이 종을 다 치실 때까지 기다렸다.

 

 


 
절의 종은 새벽 예불 전에 28번치고, 저녁 예불 전에는 33번을 친다.
그러면 왜 새벽에 28번이고, 저녁에 33번을 치는 것일까?
새벽28번은 부처님 이후 마하가섭부터 육조혜능까지 28대조사를 기리는 것이고,
저녁33번의 타종 의미는 욕계6천, 색계18천, 무색계4천의 28천에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계의 욕계 5천을 더해 33천을 의미 한다고 한다.


그리고 절에서 사물(범종, 목어, 운판, 북)을 치는 순서는 아침 예불 때는 운판을
첫 번째로 치고, 목어 다음 북, 그리고 범종을 28번 울린다.
저녁 예불 때는 아침의 반대로 범종을 먼저 33번 울리고, 북, 목어를 친 다음
마지막으로 운판을 친후 법당에 들어가 저녁 예불을 올린다.


 

 

 

 

 

 

스님이 예불 중이시라 법당 안으로는 못 들어가고 대웅전 외벽을 살펴본다.
건물 뒤편 외벽에 의외로 범상치 않은 벽화 4점이 그려져 있다.
유심히 보니 바로 신라 헌강왕과 처용에 얽힌 설화에 관한 벽화였다.

 

 

1.헌강왕이 갑자기 사방이 안개가 끼고 어두워진 지자 이를 괴이하게 생각하여 일관에게 연유를 물으니,

일관이 이르기를 이는 동해용왕의 소행이라 하였다.

 

2. 왕이 이곳(현 망해사) 용왕을 위하여 절을 세우라는 명 내리자  동해의 용왕과 일곱 아들이

바다 가운데로부터 떠 올라 왕에게 고마움을 표하였다.

 

3.왕의 명령으로 절을 세우니 바로 망해사(望海寺)이다. (일명 신방사(新房寺)라 고도 한다.)

 

4.절의 창건과 거의 동시(추정)에 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사리탑(부도) 두 기가 세워졌다.
(그러나 부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헌강왕은 신라의 제41대 왕(재위 809∼826)이다.
그러나 그는 조카인 애장왕이 왕위에 오르자 2년간 섭정을 한 다음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 하였다. 
즉위 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금은 등으로 과도한 예물을 바치고 신라왕으로 책봉 받았다.

다행히 제방을 쌓는 등 농사를 장려하고 친당(親唐)정책에 힘써 제법 정치를 안정시키기도 했다.
어쩌면 조선의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과 꼭 닮았다.
이로부터 신라는 급격히 왕권의 문란으로 쇠퇴의 길로 접어 들기 시작한다.


●처용설화


여기서 헌강왕과 처용에 관련된 설화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망해사지는 처용설화를 떠나 존재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위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처용(處容)이 불렀다는 노래이다. 처용이 밤늦도록 서울(경주)을 돌아다니며 놀다가 집에 들어가 보니 자기 잠자리에 웬 다른 남자가 들어와 아내와 동침을 하고 있었다. 처용은 화를 내기보다는 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물러 나왔다. 그러자 아내를 범하던 자가 그 본모습인 역신으로 나타나서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대범함에 감동하여 약속을 하나 하였다. 처용의 형상이 있는 곳이면 그 문안에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대문 앞에 그려 붙여 역신의 방문을 피했다고 한다.

 


●전염병을 쫓는 상징 처용


 

 

역신이란 전염병을 의미한다. 처용의 이 설화로 인해 민간에서는 처용의 얼굴을 문에 붙여 한해의 병을 피하고자 하였고, 제웅 혹은 처용이라고 하여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길에 버려 액을 막았다. 궁중에서는 섣달그믐날 처용의 얼굴을 한 탈을 쓰고 처용무를 추는 나례(儺禮)를 행함으로써 나쁜 기운을 막고 전염병을 쫓고자 하였다. 관아에서도 매년 한해를 시작하기 전 처용탈을 쓰고 처용무를 추는 것을 의례로 하였다.

 

   ▲자료사진

 

 

 

                                                                            ▲자료사진(처용무)


처용무는 처용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신라 말엽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져 내려온 우리나라 전통의 춤이다. 처용탈의 생김새는 조선시대 [악학궤범]의 기록에 자세하게 남아 있어 비교적 충실하게 그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처용의 탈은 그 얼굴 생김이 다른 가면에서 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성들이 있다. 얼굴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다소 험상궂으며 얼굴색은 한국 사람과는 다른 붉은색으로 정해져 있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에도 처용탈이 붉고 이가 희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처용탈의 피부색은 붉은색으로 줄곧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처용은 그 생김부터 상당히 특이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근 천 년 이상을 이어져 내려온 잡귀를 쫓는 상징인 처용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처용은 누구일까?


처용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어느 날 대왕(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 학성 서남쪽에 있는데, 지금의 울주다)에서 놀다가 돌아가려 하였다.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길을 잃고 말았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동해(東海) 용의 조화입니다. 마땅히 좋은 일을 해주어 풀어야 할 듯합니다.”


그래서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해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기 때문에 그곳을 개운포라 불렀다.


동해의 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와 정사를 도우니, 이름은 처용(處容)이라 하였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도록 하고, 급간(級干) 관직도 주었다.


신라 현강왕이 학성에 갔다가 개운포로 돌아왔을 때, 홀연히 한 사람이 기이한 몸짓과 괴이한 복색을 하고 임금 앞에 나아가더니, 노래와 춤으로 덕을 찬미하고 임금을 따라 서울로 들어갔다. 그는 자기를 처용이라 불렀으며 언제나 달밤이면 시중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으나, 끝내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당시 그를 신인이라 생각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겨, 이 노래를 지었다. (*이상 자료 출처 , 처용문화제)

 

 
그런데 이런 울산의 처용 문화제 축제가 해마다 봄이 되면 요란하게 치러졌었는데
이제는 그 자리를 ‘고래축제’에게 내 주고 슬그머니 축소되어 하는 둥 마는 둥 해 졌다.

 

 

 

저녁 늦은 시간 망해사를 나온다.
바다를 바라보며 뭣을 그리워 한다는 것인지....
망해사 절마당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저 끝 지평선 너머 아련히
온산공단 건물 뒤로 바다가 보일 듯 말듯 가물거린다.


오던 길을 걸어 나오다 요 녀석을 만났다.
바로 ‘수레국화’ 이라는 청색 꽃이다.


 

 

 

 

 

색이 청색인 꽃은 흔치않다.
그러나 독일의 국화이고 원산지가 유럽이란다.
꽃말은 ‘행복감’ 이라고 하니 쓸쓸했던 내 마음도
이제는 행복감으로 취했으면 좋겠다.


내일이면 6월이 시작된다.
요즈음은 저녁 해가 무척 길어졌다.

산문을 나오니 곧장 자동차들로 넘쳐나는 속세이다.

행복감은 커녕 여전히 내 마음은 슬프다.

왜 그럴까?

나도 모른다.


>미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