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전국문화재 斷想

■함양 정자문화 탐방기(제2편 동호정과 영귀정~)

migiroo 2012. 5. 21. 21:46

>2012.5.21

 

■함양 정자문화 탐방기(제2편 동호정과 영귀정~)


3.동호정(東湖亭)의 화려한 단청~

 

 

 

 

드디어 동호정 가는 예쁜 이정표가를 만났다. 길도 자연석으로 깔아 정감이 간다.
길 옆 밭에는 아직 새싹이 보이지 않고 흙의 속살만 뽀얗게 노출되어 있다.
사진 소재가 아주 멋진 길가 ‘지칭개 꽃’도 보이고, 백 살 먹은 거북이의
귀갑무늬 같은 멋진 소나무도 보인다.
처음에는 ‘엉겅퀴’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지칭개’라는 식물이다.
볼그스레한 꽃봉오리가 너무 예쁘다.
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여인이 없듯이 꽃 또한 예쁘지 않는 꽃이 없을 것이다.

 
그동안 갈고 닦은(?) 나의  DSLR 사진 솜씨를 부려 본다.
삼각대가 없어서 잠시 숨은 멎고 셔터를 누른다.
그래도 초점과 노출이 잘 맞지 않으니 언제나 이놈의 DSLR 카메라를
정복 할 수 있을는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찰칵, 찰칵, 찰가~~~


AV 모드에 ISO 100, 노출 4.5....
그럴듯 하게 ‘치칭개’의 영상이 사진에 잡혔다.

 

 

 

 

 

지칭개는 ‘지칭개나물’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혈액순환촉진, 어혈,
간세포활성화, 정력증진 등의 약효로서도 다양하다하는데 난 아직 먹어보지 못했다.
내 어설픈 접사 사진 모습....
무거운 삼각대를 가져 올수 없어 망원으로 당겨 찍으니 꽃잎의 초점이 맞질 않는다.
언제 난 사진작가의 경지에 이를까, 아득하기만 하다.

 

 

●동호정

 

 

 


동호정이 단단한 너럭바위 암반위에 학처럼 날렵한 팔작지붕을 이고
중층 누각건물의 정자다운 모습으로 조용히 앉아 있다.
정자 앞 차일암이라는 너럭바위 위에는 오랜 풍상으로 생긴 크고 작은
움푹 파인 소(沼)가 생겨 있으니 선비들이 표현대로 웅덩이 마다
달 하나씩을 담고 있다고 한 말이 실감난다.

 

 

 

 

 


동호정의 특이한 것은 보통 정자에서는 불수 없는 정자 내부 천정의 화려한 용 조각품 과 단청이 되어 있다는 것이고 4면마다 공자의 일생을 그림으로 그린 ‘공자성적도’라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대들보 위의 용 두마리 중 한 마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또 다른 한 마리는 물고기를 통째로 물고 있으니 장인의 짓굳은 장난 같기도 하여 해학적인 그 모습에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먹지 못하는 여의주 보다는 당장 먹을 수 있는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이 더 실리적이 아닐까 모르겠다.

그럼 여기서 *공자성적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잠간 알아보자.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란?

 

공자의 행적과 가르침을 표현한 그림 및 목판화를 말하며, 조선시대에 제작된 3종만이 현존하고 있다.

공자성적도는 공자의 탄생, 배움의 길, 관직생활, 제자양성 등으로 분류돼 있어 그의 탄생부터 사후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정자 앞 차일암이라는 너럭바위 위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써 놓은 명문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정자를 받히고 있는 밑기둥(누하주)들이 모두 늙어 갈라지고 터지고 주름살투성이다.
부식을 방지한다고 뻘건 방부제 페인트를 칠해 놨는데 조금은 보기가 싫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개미가 들어가고 부패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조금 세월이 지나면 이 방부제 페인트도 빛을 바래 고색을 뙬 것이다.
건축물 같은 것은 왜 새것 보다 오래된 것이 느끼는 질감이 좋은지 모르겠다.


 

 

 


동호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 장만리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9대손 가선대부오위장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5년 건립한 정자이며 1936년에 중수했다 전한다. 동호정은 남강천 담소중의 하나인 옥녀담에 있으며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너럭바위를 차일암이라고 하는데 바위 이곳저곳에 영가대, 차일암, 금적암 등의 조선

시대 선비들의 한문 명문이 새겨져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세워진 단동의 중층 누각 팔작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배면의 중방을 들였던 판벽이 있는데 방을 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누마루에 앉아 계곡을 바라보니 맑은 물소리 들리고, 물위에 떠 있는 크고 작은 돌들이 마치 달 밝은 밤 떠 있는 조각배 같아
시상은 떠오르지 않고 낮잠 한숨만 자고 싶어지니 선비 되긴 틀린 듯 싶다.

아직도 갈 길이 남았으니 어찌 동호정 시객(詩客)으로만 머무를 수 있는가. 발길을 돌려 영귀정으로 향한다.

 
*동호 장만리(東湖 章萬里) 


성리학자 이며 임진왜란 시기에 선조 임금이 신의주로 몽진할 때 왕을 등에 업고 의주에서 신의주까지 피란한 공을 세웠는데 선조께서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호성공신의 원종공신에 책록하였으며 고종황제는 1892년 좌승지에 추증하고, 충신 정려를 내렸다. 훗날 公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동호정에서 심신을 수련하며 때때로 낚시를 즐겼다.

 

 
4.영귀정(詠歸亭)


 

 

 


영귀정에 대한 자료는 찾지를 못했다.
인터넷 검색으로‘영귀정’을 치면 여러 지방에 나온다.
詠歸亭 이라는 글자 그대로 낙향을 하여 시를 읊고 짓는 곳이라 하니
경치 좋은 곳의 정자는 모두 영귀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곳의 영귀정은 보수 한지 얼마 안 됐는지 고색의 흔적은 없고 그저 근년에 지은 동네 정자처럼 보일 뿐 찾는 이

별로 없는지 숲속에 파묻혀 먼지만 수북이 뒤집어쓰고 있다. 그리고 정자 옆에 개인 소유인 듯싶은 볼품없는 새 정자

한 체가 있는데 영귀정 보다 더 커서 주객이 바뀐 듯 하고 아름다운 영귀대 위에 계곡물을 막아
화단을 꾸미고 집을 지었으니 원래의 영귀대가 크게 훼손 됐을 뿐만 아니라
정자와 그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의 조화가 깨지고 말았다.


 

 

 

그래도 정자는 정자이니 무슨 사연이 분명히 있을 법 하여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니 현 정자(영귀정)가 바로 영귀대라는 큰 바위가 있 곳으로
조선 유학의 거두 *일두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자주 영귀대을 찾았다고 전한다.
영귀대, 군자정, 거연정이 있는 봉전마을은 정여창 선생의 처가 마을 이었다한다.
이런 역사적 사실 하나 만이라도 영귀대의 멋진 사연인데 어찌 지금의 후손들은
영귀대 위에 화단을 설치하고 집을 짓는 단 말인가.
 

조선시대 후손들의 생각과 21세기 후손들의 생각이 왜 이리도 다른지,
옛 후손들은 자연 속에 들어가 자연의 일부가 되고자 했지만
오늘 날의 후손들은 자연을 자기 안에 끌어들여 자연을 즐기려 한다.
정여창 선생을 생각하며 잠시 영귀정에 앉아 시상을 떠올리고 사색에 잠겨 보고
싶었지만 시상은커녕 시간에 쫓겨 갈길 만 바빠진다.

 
영귀정에서 군자정까지는 약 0.4kim, 서로 지척에 있으니 시객(詩客)의 머무는
영역은 거리의 개념이 없음이다.

 

 

 

다음은 정자 문화 탐방기 제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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