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전국문화재 斷想

■함양 정자문화 탐방기(제3편 군자정 과 거연정~)

migiroo 2012. 5. 21. 22:09

>2012.5.21

 

■함양 정자문화 탐방기(제3편 군자정 과 거연정~)


5.고색 짙은 군자정(君子亭)~

 

 

●군자정 가는 길에서~


 

 

 

 

 

영귀정을 지나 조금 가니 계곡을 가로질러 놓여 있는 '봉전교'라는
거대한 시멘트 다리가 거인처럼 누워있다.
이 또한 필요악이다.
다리가 있어야 사람과 차들이 계곡을 건널 수 있으니 꼭 필요함이고,
다리가 계곡의 절경을 망친 악(惡)이니 두 면이 모두 필요악(必要惡)인 셈이다. 

 
자연이 빗어 놓은 절경 화림동 계곡 그리고 그 계곡 위의 시멘트 다리,
어찌 자연과 인공구조물, 그 둘에서 멋진 조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러나 길도 있어야 하고 다리도 있어야 하니 어찌 인공구조물을 탓할 수 있으랴.
자연 또한 사람 사는 세상이니 자연을 적당히 이용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다리를 건넌다.

 

 

 

 


●군자정

 

 

 


다리를 건너니 바로 진안, 장수, 무주를 오가는 육십령 길과 마주친다.
바로 봉전마을 구간이다. 
군자정은 봉전마을 어귀 도로변 계곡의 큰 암반 위에 있다.
늙어 힘든 노인처럼 앉아 있다.
기둥들은 주름살투성이고 짧은 누하주(마루 밑기둥)들은
힘겹게 무거운 팔작지붕의 무게를 떠받치고 있다.
그러나 오늘 비로소 정자다운 정자를 만난 듯 하다.
비록 낡고 늙은 건물이지만 기둥을 비롯한 건물의 목재들이
모두 오랜 나이를 먹은 고색을 띄고 있어 군자다운 겸양과
단아함이 엿보여 조선시대의 정자다운 면모를 이제야 만난 것 같다.


 

 

 


마루 난간은 계자각난간으로 4개의 꽃잎으로 조각한 것이 투박하지만
오래된 나무의 부드럽고 질박한 느낌을 주어 너무나 좋다.
천장엔 많은 명판들이 달려 있고 기둥을 제외하곤 석가래 와 면토가
근년에 보수를 한 흔적이 엿보인다.

 

 


군자(君子)는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일컫는다.
높은 벼슬을 하고 그 백성으로부터 덕망이 깊은 사람을 성인군자라고도 한다.
그런 군자정 누마루에 잠시 앉아 계곡을 바라보니 어느덧 나도 군자가 된듯하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엔 늘 집착과 욕망과 영악함 같은 것들이 늘 속진처럼
달라붙어 있으니 어찌 군자라고 스스로 높여 말 할 수 있겠는가.

 

 

 


현판 중에 '주부자 군자정 시(朱夫子 君子亭詩)'라는 명문이 있어 무슨 뜻인가 알아보니
이런 기막힌 내용이었으니 비로소 정자 이름을 ‘군자정‘이라고 진  의미를 알게 됐다.


정자 이름을 왜, ‘군자정’ 이라고 지었을까?


주부자(朱夫子)라하면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朱子)를 일컬음이다.
중국 사람들이 공자를  공부자(孔夫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군자정이라 이름을 지은 연유는 주자의 '묵장오영(墨莊五詠)' 중에
군자정을 읊은 데서 취해 온 것이다.
현판 명문을 풀이하면 이렇다.

 
倚杖臨寒水 - 지팡이 의지한 채 한수에 임하여
披襟立晩風 - 옷깃 헤치며 해질녘 바람에 섰네
相逢數君子 - 서로 만난 여러 군자들
爲我說濂翁 - 나를 위해 염옹을 설명하네


이 시에서 주자가 말하는 염옹은 송나라 때 염계(濂溪) 주돈이(周敦 )를 말한다.
염계는 진흙에서 자라도 더럽혀지지 않는 연(蓮)이야말로 군자의 기상과 닮았다고
읊은 '애련설(愛蓮說)'을 지었다.

 
이래서 주자는 주렴계를 기려 군자정이라 이름하였고, 군자정을 지운 전세걸은
일두 정여창를 기려 정자를 짓고 ‘군자정’이라 한 것이다. '
(*이상 자료 : ‘한국의 혼 樓亭 .42‘내용 인용) 


 

 

 

 

여기서 일두 정여창에 대해서 좀더 알아본다.
군자정은 정여창의 5대 후손인 전세걸이가 지은 정자이다.
물론 일두 정여창 선생을 기리기 위함 이었다.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이 누구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정여창은 퇴계등과 함께 조선 유학의 5현으로 불리고,
고운, 포은, 퇴계, 율곡 등과 함께 동방 18현으로 일컬어진다.
조선 전기 성리학의 대가이며 점필재, 김종직의 뒤이은 유학의 거두이다.


그러나 연산군 당시 김일손이 사초로 쓴 *'조의제문' 사건의 *‘무오사화’로
함길도로 귀양 가서 불귀의 객이 되고 또 그 후 연산군의 모친 윤비의
죽음과 관련되어 일으킨* ‘갑자사화’로 인하여 부관참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고 중종 대에 들어 복권된바 있다.
그럼 여기사 잠간, 잠간 무호사화, 갑자사화, 조의제문에 대하여 알아보자.


*무오사화
1498년(연산군 4년)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로 조선시대 4대 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이다.(*조선의 4대 사화 :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조의제문

조선 전기의 학자 김종직(金宗直)이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纂奪)을 비난한 글.

 

 *갑자사화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로 연산군은 폐비윤씨를 복위시켜 성종묘(成宗廟)에

배사(配祠)하려 하였는데, 응교 권달수(權達手)·이행(李荇) 등이 반대하자 권달수는 참형하고 이행은 귀양 보냈다.
또한 성종이 윤씨를 폐출하고자 할 때 이에 찬성한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성준(成浚)·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김굉필(金宏弼)·

이주(李胄) 등을 사형에 처하고, 이미 고인이 된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

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의 명신거유(名臣巨儒) 등을 부관참시 하였으며,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하였다.

 


  


 
군자정을 나오는데 정자 마루 아래 하얀 꽃들이 자기들을 보고 가라고 손짓한다.
왠 ‘구절초’ 인가, 했는데 구절초가 아니고 ‘데이지’라는 외래종(유럽) 꽃이란다.
구절초와 너무 흡사하여 꽃에 대한 나 같은 무외한은 구절초로 착각하기 쉽다.

군자정 마당 옆에 정자보다도 큰 식당(가든)이 있어 정자가 마치 가든의 부속 건물로
보이는 것 같아 영 마음이 편치 않다.

 

 

군자정 후기~

 

2013년 10월1일. 진안 가는  길에 다시 군자정을 찾았다.

1년 반 만 이다.

그런데 늙은 군자정이 젊은 정자로 탈바꿈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현판과 기둥 몇개만 그대로 이고 새로 보수를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옛 목조건물은 중간 중간에 적당한 보수를 해 줘야 하겠지만 이건 아니다. 

보수는 정기적으로 하되 크게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한다.

전체적으로 건물의 부재를 갈아 치우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한 두개의 부재만

적절한 기간을 두고 교체 해야 한다.

어느 것은 아예 헐어버리고 다시 복원하는 식으로 보수 하는 곳도 있는데....

이건 아니 잖는가.

 

 

 

 

아예 새 건물로 변신한 군자정의 모습이다.(2013.10.1)

기둥만 본래 것이고 몽땅 새것으로 갈아 치웠다.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이렇게 변신을 시켰는지 문화재를 인식하는 관계당국의 안목이 의심스러웠다.

옛 정자로서의 고졸한 맞은 사라지고 없다. 현판 만이 옛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수십년 그대로 방치(?)했다가 갑자기 몽땅 보수 했기 때뭉에 이런 모습으 변한 것이다.

불타 없어진 농월정 같은 것을 다시 지으려면 하는 수 없이 새 건물로 지어야 되겠지만 있는 건물을 이렇게

보수 한다는 것은 생각을 좀 해 보면서 보수 해야 된다.

 

 

 

 

6. 거연정(居然亭)에 묻혀 살고 싶네~

 


●거연정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도 조금은 군자가 된 마음으로 군자정을 나와 거연정으로 향한다.
거연정은 군자정 바로 지척 몇 걸음 안에 있으니 오늘 탐방은 마지막인 셈이다.
그런데 거연정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눈에 띈다.
어쩌면 이렇게 안목이 없고, 어쩌면 이렇게도 생각이 모자란단 말인가.
불타버린 농월정을 아직도 복원 못하고 있는 것이나,
거연정의 치명적인 오점(?)을 그대로 두고 보고 있는 것이나
당국(함양군)의 무지함(?)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바로 거연정으로 건너가는 정자 코앞에 설치된 녹슨 철재 다리 때문이다.

 

 

 


거연정 일대는 국가 문화재 명승지로 지정 됐다는데...
명승지답게 주변을 잘 정리할 필요가 있다.
정자 지척에 있는 식당 등도 정리하고, 가능한 정자 주변에 인공시설물 설치를
자제하여 관광객들이 자연의 경관과 정자가 어떻게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감성적으로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특히 거연정 정자로 건너가는 철재 다리는 정자와 주변 경관과 너무나 이질적이므로 다리 위치를 다른 곳으로 옮겨

주변의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시설물을 설치했으면 좋을 듯 하다.

 

 


●거연정

 

 

 


거연(居然)이라는 의미는 '자연 속에 머무른다는 뜻일까?
우리 선조들은 자연을 즐기되 결코 자연을 끌어들이지 않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삼아 살았다.
그래서 ‘거연정’이다.


자! 그러면 우리들도 거연(居然)해 보자.


거연정으로 들어가니 참으로 그 위치가 절묘하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이 바라보이는 곳에 정자를 진 것이 아니라
아예 그 경관 안으로 들어가서 자연의 일부가 돼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거연정은 정자 안으로 들어가서 보는 것이 아니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것이 더욱 멋지다.


 

 

 


이러한 옛 선비들의 안목이 참으로 경탄스럽다.
그런데 지금의 선비(관계 관료들)들의 안목은 어떤가?
기필코 정자 안으로 들어가 보라고 정차 코앞에 바싹 당겨 철재다리를
설치했으니 옛과 지금의 안목이 하늘땅만큼이나 크고 깊다.

 

 

 

 

덤벙주초란 기둥을 받치는 주초(주춧돌)을 반듯이 다듬지 않고 자연석 그대로 사용한 주초를 말하고,  
덤벙주초 그랭이질 방식으로 기둥을 세웠다는 점이다.
기둥을 세우되 바닥의 울퉁불퉁한 바위들을 조금도 손상 하지 않고  바로 정자를 받치고 있는 밑기둥들이다.
옛 선비들이 자연에 순응하고 사랑한 작은 지혜의 흔적들.....  있다.
*그랭이질 이란 다듬지 않은 덤벙주초 위에 기둥을 세워야 하는데 기둥 밑면을 주초의 면과 맞게 다듬는 것을 그랭이질 이라한다.


 

 


그런데 지금 보니 밑바닥 암반(주춧돌) 사이사이 시멘트를 비벼 넣은 것이 보인다.
조선시대 때 시멘트가 있을 리 없고 근년에 정자를 보수 할 때 사용한 시멘트가 분명하다.
지금 사람들보고 여기에 정자를 지으라고 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울퉁불퉁, 뾰쪽뾰쪽한 바위를 모조리 깎아 내고 시멘트를 쏟아 부어 바닥을
판판하게 한 다음 그 위에 정자를 지을 것이다.


우리가 답사를 다닐 때 이런 작고 사소한 것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옛 선조들의 지혜가 그 작고 사소한 곳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둥(누하주)들이 너무나 힘겹게 보인다.
정자 나이 100년이 훌쩍 넘도록 아직도 무거운 합각팔작지붕을 받치고 있으니
기둥인들 어찌 힘겹지 않으리오.
그 동안 꾸준히 보수는 해 왔겠지만 어찌 모두 새것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그러나 비록 힘겨워 보이지만 오랜 연륜의 단련으로 아직도 건재하니
늙었다고 괄시를 하면 안 될 듯하다.
나 또한 늙었다고 괄시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때로는 늙음이 젊음보다 강할 때가 있는 법...
그래서 옛 것(늙음)에서 강한 지혜를 배워야 한다.

 

 

 


거연정에 대한 자료를 여기저기 쑤시고 다녀보니 그 또한 건립 연유가 재미있다.
거연정의 역사를 거슬러 가보니 자그마치 고려시대까지 내려간다.


고려시대 말기 전오륜(全五倫)의 7대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전시서(全時敍)가
1640년경 서산서원을 짓고 그 곁 현 거연정 위치에 억새로 만든 정자를
처음으로 건립하였다 전하니 거연정의 연원은 무려 400년 가까이나 된다.


여기서 억새로 지은 정자라 했는데 아마도 화림동계곡(남강천)에 억새가 많이 자라
초가집 형태의 정자를 지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암튼 그 후 1853년 화재로 서원이 불타고 이듬해 복구하였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서원이 훼철된 후 1872년 전시서의 7대손인 진사 전재학,
전민진 등이 억새로 된 정자를 철거하고 훼철된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정자를
다시 세웠으며 1901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 중층누각의 겹처마 합각지붕형식으로 되어있다.
합각지붕은 팔작지붕 구조의 하나로 합각(合閣)지붕·팔작집이라고도 한다.
지붕 위까지 박공이 달려 용마루 부분이 삼각형의 벽을 이루고 처마 끝은 우진각지붕과 같다. 


 

 

 

 


이제부터는 거연정의 안을 들여다보자.

 

 

 


대들보와 서까래 그리고 창방의 질감과 적당히 빛바랜 색감이 너무 좋다.
적당히 휘어진 대들보에서 중압감이 느껴지지만 그 유연함에서 나오는
강인함은 아마도 지붕의 하중을 모두 짊어진 듯 한 듬직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동호정의 천정은 온통 단청을 입혀 대들보는 화려한 용두 조각으로 해 놨는데
거연정은 그런 군더더기 하나 없이 누드 그대로 이니 여기서도 선비들의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겸허함 그리고 절제와 검약의 정신이 엿보이는 듯 하다.
 

 

 

 

거연정의 특이한 것은 마루 한쪽에 판방형식의 작은 방 한 칸을 냈다는 점이다.
지금은 문도 없고 마루가 깔렸지만 아마도 문도 있었을 것이고 벽도 하얀 한지로
발랐을 것이다. 물론 방바닥은 구들장을 놓을 수 없었을 것이니 두툼한 왕골자리
같은 것을 깔고 모시옷 입고 낮잠을 즐겼을 것이다.


 

 

 


거연정 천정에 붙어 있는 여러 현판들이다.
특이하게도 현만을 벽에 걸지 않고 왕 대못으로 박아 놨다.
왜 그랬는지, 원래부터 그런 것인지 그 연유를 알 수가 없다.
대못도 요즘 대못이 아니고 조선시대 대못이 아닌가 싶다.

 

 

 


아래는 거연정의 현판이다.
그 아래에 '정자에서는 도시락을 금함‘이라는 현판(?) 아닌 한글현판이 걸려있다.
아마도 길손이나 여름철 계곡 물놀이하면서 정자에 올라와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이다. 행여 삼겹살은 안 구어 먹었겠지...?
우리 국민들도 문화재 같은 곳이나 계곡 같은 곳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취사를 하는 분은 없다고 본다. 국민의식 수준이 얼마나 높아 졌는데...
문화재 급 정자에서 음식을 먹겠는가.
이제는 말 안 해도 아니 이상한 명판은 떼어버렸으면 싶다. 

 

 

 

현판의 글씨는 군자정과 같이 누구의 글체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한 체를 구분할 수 있다거나 명필을 보는 안목이 전혀 없다.
그러나 두 현판 모두 잘 쓴 글씨가 아닌가 여겨진다.

 

 


 


거연정 안에서 바라다 본 아름다운 계곡의 절경이다.
계곡 물은 그 흐름을 잠시 멈추고 낮에는 하늘의 구름과 함께 밤에는 달과 함께
서로 시를 주고받는 시객이 됐을 법 하니 이렇게 산천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지금의 사람들의 정서는 왜 이리도 각박해 변해 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오늘 더 걸어야 할 길이 끝이 났다.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
내 남은여생에 언제 또 이곳을 와 보겠는가.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갈까,
아니면 아예 거연정에 올라 대못이 되어 버릴까.

 

 

 

 

그러나 길은 다시 돌아 갈 수 있지만…….
인생의 길은 다시 돌아 갈 수 없음이니 슬픈 일이다.


함양의 정자는 이 외에도 많다.
모두 조선시대 건물이나 대부분 근대에 들어 개보수 한 것들이다.
담양과 함양은 정자의 고장이다.


오늘 하루 함께 한 친구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건강하고 정자처럼 여유롭게 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먼 길 다시 돌아오니 한 밤중이다.


지난 5월9일 함양의 정자들을 탐방하고 와서 이런저런 일 때문에
미뤄둔 답사기를 열흘이 지나 이제야 밤잠을 줄여 탈고하여
이 졸작의 답사기를 올린다.


이 글의 일부 문화재에 대한 정보는 여기저기 인터넷에서
읽어 보고 인용 편집한 것들임을 밝혀 둔다.


오늘은 5월21일, 하늘이 너무도 맑다.
카메라 메고 작은 꽃들을 찍으려 나갈까...

 

 

*졸작을 읽어 주시여 감사합니다^^


>미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