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6.24
■ 내가 보고 느낀 국보급 문화재(34)
▶국보 62호, 김제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
●백제인의 마지막 유산 금산사 미륵전(彌勒殿)
산문으로 들어가는 길~
전국이 극심한 가뭄으로 시달리고 있다. 어느 지방은 104년 만의 가뭄이라고도 한다. 꼭두새벽 창문을 여니 기적처럼 비가 내리고 있다.
새벽 시원한 빗속을 뚫고 경주를 거쳐 전북지방으로 답사 나들이에 나섰다. 버스에서 새벽잠을 보충하고 눈을 뜨니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비는 온데간데없고 햇빛만 쨍쨍 고속도로 위에 쏟아지고 있다. 전라도 지방엔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은 듯 하다. 논바닥이 갈라지는 등 극심한 가뭄 피해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작은 하천도 매 말라 있고, 차장가로 스쳐 지나가는 농가의 저수지 바닥도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야심작(?)으로 공사한 4대강의 16개 보(堡)에는 물이 철철 넘쳐난다는데 그 물을 퍼다 논이나 밭에 댈 수가 없다 하니 4대강 사업은 하나 마나...
천문학적인 돈만 들인듯 하다.
오전 10시경 김제 금산사 산문 앞에 도착했다. 거대한 금산사 일주문이 산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압도하며 우뚝 서있다.
일주(一株)의 두 기둥이 육중한 맞배지붕을 굳건히 받히고 있다. 현란한 단청을 입은 복잡한 다포계 공포들이 질서정연하게 무거운 지붕의 하중을 분산시켜 두 기둥만으로도 건물이 끄떡없이 서 있다. 단지 기둥 2개로도 웬만한 태풍, 지진에도 견딜 수 있다니 우리의 옛 건축술이 현대의 건축술 보다 월등이 앞서 있지 않나 싶다. 기둥 둘레를 양팔로 제어 보니 어른 팔로 3팔이 조금 넘으니 대충 4.8m쯤 되는 듯 하였다.
일주문을 지나 산문으로 들어서니 아름드리 소나무와 느티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따가운 햇볕을 막아 주고 있다. 길은 일주문에서 경내까지 약 900여 미터 정도 차도와 산책길로 나뉘어 있다.
금강문을 지나 천왕문을 통과한다. 그런데 두 문 안에 있는 금강역사와 사천왕님들이 그물철망에 갇혀있다. 조류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고 똥을 싼다고 막아 놓은 망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볼썽사나운 철망으로 막는단 말인가. 이는 하나의 이득을 취하기 위하여 열 가지 이로움을 버리는 행위와 같음이다. 상대방(참배객)을 배려하지 않는 행위이다. 보기 흉할 뿐만 아니라 사진 찍기도 어렵다. 또한 철망 속에 갇혀 있는 금강역사나 사천왕들은 얼마나 갑갑하겠는가. 새들이 둥지를 틀면 치우면 될 것이고 똥을 싸면 닦아 내면 될 것이다. 대부분 다른 사찰들이 철망을 치지 않았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유독 금산사와 몇몇 사찰에서만 이런 사례가 있으니 아무래도 주지스님께 철망을 걷어 달라고 건의를 해야 될 것 같다.
●한국 고 건축술의 백미 미륵전(彌勒殿)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국보 62호 ‘미륵전’ 아래에 섰다. 다포계 3층 팔작지붕의 거대한 건물이 사람을 압도한다. 학처럼 긴 날개 짓을 하고 있는 대적광전을 바라보고 있는 미륵전, 천년 고찰답게 건물전체에서 풍겨나는 늙은 고색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데 아뿔싸, 오는 날이 장난이라고 미륵전은 지금 한창 보수 중이었다. (알고 보니 건물의 보수가 아니라 내외 벽에 그려진 벽화를 장기간에 걸쳐 보존처리 작업 중이라 했다.) 건물 뒤편으로 비닐 가림막이 쳐 지고 쇠파이프 거푸집이 얼기설기 얽혀 있다. 법당 안에도 보수중인지 한쪽 면에 비닐 가림막이 처져있다.
1,2층은 정면 5칸, 측면은 4칸이고, 3층은 정면 3칸에 측면이 2칸이다. 겉으로 보기엔 3층 건물이지만 안에서 보면 내부는 통 층이다. 복잡한 건축의 구조와 특성을 여기에 언급하는 것은 비전문가인 내가 올려봤자 남의 정보를 그대로 카피하는 꼴 밖에 안 되니 생략 한다.
미륵전(彌勒殿)은 미래에 출현할 미륵부처님이나 미륵보살을 주불로 모신 불전이다. 또한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하여 용화세계를 이룩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미륵전 혹은 용화전(龍華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킨 것이 미륵전이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년(762)과 혜공왕 2년(766) 어간에 있었던 진표율사가 창건했다 전한다.
높이 20m, 최대폭 15m의 3층으로 된 전각의 규모에 압도되기도 하지만 법당 안에 모셔진 장육삼존불상 또한 너무 거대하여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이런 미륵전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었다 하니
현재의 미륵전은 조선 후기 시대 건축물인 셈이다.
●미륵전 편액
1,2,3층 마다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 있는데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으로 되어 있다. 편액의 글씨는 누구의 필체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름은 각층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용화세계를 의미하는 이름이다. 편액 미륵전 과 용화지회는 용화세계를 만드는 일꾼들이 모인다는 뜻으로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는 미륵불을 자씨보살로 번역해서 ‘대자보전’이라고 한다. 금산사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고 건축의 백미이다. 우리의 고 건축에 대한 기술적, 미학적 아름다움을 잘 보여 주는 건물이기도 하다.
●이륵전 벽화
미륵전의 내, 외벽에는 다른 사찰벽화와는 다른 그림인 약 185폭의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범천, 제석천, 사천왕, 금강역사, 동녀, 수행승, 보살상, 지장보살 등등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벽화는 금산사 미륵전의 품격을 한층 더 깊게 해 주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너무 퇴색되어 선명도는 물론이고 그림의 모습도 구분키 어려울 정도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무분별한 사람들의 소행인 듯 하단 외벽에는 수많은 낙서의 흔적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찰에 와서 문화재를 훼손하고 더렵히는 행위야 말로 가장 저급한 행위이다.
퇴색된 벽화의 완전 복원은 불가능하고 현재 상태에서 더 이상 손상이 가지 않도록 특수 보존처리작업을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다.
미륵전 법당 안에 있는 관세음보살 벽화이다. 어찌 홀로 되셨는지 백의를 바람에 휘날리며 구름 위에 서 있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현세로 날아오실 듯 한 모습이다.
●거대한 미륵전 장육삼존불
"아이고, 고개 아퍼~"
너무 커서 부처님 올려다 보기에 고개가 아플 지경이다.
장육불의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양 협시불은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다. 그러니깐 경주의 유명한 황룡사 장육존상의 높이가 1장6척(약5m)으로서 가장 큰 장육불이라 생각했었는데 그 보다 두 배인 11m가 넘는다하니 현존하는 동양 최대의 불상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황룡사 장육존상은 금동불이고 금산사 장육 미륵불은 진흙으로 만든 것이 소조불이라는 점이 다르다.
미륵불은 어떠한 두려움도 없애 준다는 의미로 오른손 끝을 위로 향하게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게 하는 시무외인과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의미로 왼손 끝은 아래로 하여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는 여원인을 하고 있다. 그런데 본존불의 왼손 수인에 약함인지 여의주인를 들고 계신다.
미륵불은 보통 협시보살로서 그 좌, 우에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을 모신다. 금산사 미륵불 협시는 두 분 모두 꼭 닮은꼴인데 두 손의 위치만 다르다. 두 보살은 무겁고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조선 후기 보살상의 보편적인 표현양식이라 한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이 모셔져 있었는데 그 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塑造) 삼존불로 봉안했다가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다가 다시 4년만인 1938년 근대 조각가 김복진(金復鎭)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해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전한다.
●미륵전 법당 천정의 고색 찬연한 미륵불의 용화 세계~
고개가 아프도록 머리를 곧추세우고 본존불 머리 위 천정을 바라본다. 비록 단청은 모두 퇴색되고 낡아 없어졌지만 마치 미륵 세계, 용화세계 한 부분을 옮겨놓은 것 같은 화려한 용들의 조각과 꽃들로 가득하여 그 화려함과 장엄함에 입이 딱 벌어진다.
천정가구 또한 복잡하기 짝이 없어 현대 건축술에 이런 복잡하지만 질서정연한 건축설계도가 있던가, 싶다. 그야말로 복잡하게 엮어진 결구에서 조상들의 건축술이 얼마나 정교하고 빈틈이 없는지 세삼 경탄을 금할 길 없다.
거대한 미륵전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들이다. 덤벙주초 위에 올려진 배흘림기둥들은 나이을 잊은 듯 숙연히 서 있다. 수 백 년 넘은 이런 나무들은 살아 있을 때 보다 죽어서도 살아 있는 시간이 더 길다. 비록 갈라지고 터졌지만 기둥 밑 부분이 수많은 사람들이 만지고 간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금산사하면 떠오르는 이야기~
바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다. 견훤의 비극적인 몰락은 적이 아닌 바로 자식들로 부터였다. 결정적인 원인은 다음 왕위를 장자에게 계승하지 않고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물려주려 한 데 있었다. 금강보다 위인 신검∙양검∙용검이 이를 알고 모의하여 동생 금강을 죽이고, 935년 3월 견훤은 아들들에 의해 금산사 불당에 위리안치(圍離安置) 즉,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견훤은 금산사에서 석 달 동안 갇혀 있다가 탈출하여 엉뚱하게도 고려의 왕건을 찾았다. 이에 왕건은 견훤을 상부(尙父)라 하면서 받아들였다. 견훤은 왕건에게 부탁하여 자신을 내쫒고 반역한 자식들을 죽여 달라고 했다. 그 후 왕건은 후백제를 평정하고 신검 일당 등을 잡아 견훤의 부탁대로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는데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울화병으로 비참하게 죽었다 한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제국들이 적국에 의해서 망한 것 보다는 자식들의 왕위권 때문에 나라가 멸망하거나
국기가 문란해진 나라가 많다. 차라리 왕들은 자식을 딱 하나만 낳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백제의 혼이 담긴 금산사
금산사야 말로 백제인의 혼이 서린 대사찰이었다.
599년(백제 법왕1)에 창건돼 1400년이 넘은 금산사는 송광사와 더불어 동양 최고의 사찰로 수많은 말사를 거느리고 있는 미륵신앙의 성지다. 금산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나 인조 때 재건되었고 지금도 석련대, 당간 지주, 석종, 각종 탑 등 보물이 즐비하다. 미륵신앙은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상생신앙과 말세를 구제하러 미륵이 내려오기를 바라는 신앙으로, 이상사회를 제시하는 미래불인 미륵을 믿는 불교적 이상 사회관이다.
미륵의 금산사에는 백제의 혼이 깃들어 있다. 미륵신앙은 신라와 백제에서 국가의 통치 이념이었기에 양국은 치열한 자웅을 겨루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는 금산사와 함께 익산 미륵사를 세워(601) 왕권을 강화했다. 이에 맞서 신라 선덕여왕은 황룡사에 거대한 9층 목탑을 짓는다(645)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미륵전쟁에서 백제가 멸망(660)하자 익산의 미륵사는 서서히 쇠락했다. 그러나 모악산의 금산사는 백제가 망한 뒤에도 복신, 도침과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扶餘 豊)이 중심이 된 백제 부흥운동의 한 거점이 되었다.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율사(眞表律師)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663)하고 꺼져가는 금산사를 중창한 건 진표율사(眞表律師)였다. 진표율사는 패망한 나라 백제의 김제평야에서 태어나(734) 12세에 금산사로 출가한다.
삼국유사에는 진표율사가 미륵불을 친견하고 깨우침을 얻은 후 미륵불의 계시를 받아 금산사로 돌아와서 미륵전을 짓기 시작한다.
금산사에 커다란 연못(방죽)이 있었다. 진표율사가 이를 메우고 미륵장존불을 조성하려는데, 이상하게도 흙으로 메우면 다음날 어김없이 다시 파헤쳐지곤 했다. 연못에 사는 용이 파헤친다는 것이었다. 이때 지장보살이 현신하시어 진표율사에게 숯으로 연못을 메우면 용이 떠날 것이라고 방도를 알려 준다. 하지만 연못을 메우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숯이 필요했다. 그때 갑자기 마을에 눈병이 창궐했다. 진표율사는 묘안을 냈다. 누구든지 연못에 숯을 한 짐 쏟아 붓고 그 물로 눈을 닦으면 낫는다고 널리 알렸다. 연못은 순식간에 숯으로 메워졌고, 신기하게 눈병도 말끔히 나았다. 1985년 미륵전 보수공사를 위해 굴착기로 땅을 팠더니, 실제로 검은 숯이 나왔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만들어진 지금의 미륵불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塑造佛)이다. 하지만 처음엔 쇠로 만든 철불(鐵佛)이었다고 한다.
금산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금산사 경내의 송대(松臺)에 5층 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석종(石鐘)은 종 모양의 석탑이다. 고려 초에 조성된 걸로 추정하는 석종은 매우 넓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인 방등계단(方等戒檀) 위에 세워져있다.
호남의 모든 사찰이 신라 승려나 왕족들이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금산사만은 백제 사찰임을 분명히 명기하고 있다. 백제 왕족의 기복을 비는 것으로 창건된 금산사임에도 불구하고, 백제 법왕의 창건임을 밝힌 이유는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략적인 포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왕족이 아닌 민중들의 땀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 모인 미륵불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금산사는 백제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미륵의 성지로 면면히 백제의 혼을 이어나갔다. 200여년 뒤, 백제는 다시 금산사에서 후백제로 부활한다. (이상, 후암미래연구소 www.hooam.com 자료 간추림)
●금산사 소재 국,보물급 문화제 목록
사적 제496호 김제금산사일원(金堤金山寺일원) 국보 제62호 금산사 미륵전 보물 제828호 금산사석등(金山寺石燈) 보물 제827호 금산사대장전(金山寺大藏殿) 보물 제29호 금산사심원암북강삼층석탑(金山寺深源庵北崗三層石塔) 보물 제28호 금산사당간지주(金山寺幢竿支柱) 보물 제27호 금산사육각다층석탑(金山寺六角多層石塔) 보물 제26호 금산사방등계단(金山寺方等戒檀) 보물 제25호 금산사오층석탑(金山寺五層石塔) 보물 제24호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 보물 제23호 금산사석련대(金山寺石蓮臺) 보물 제22호 금산사노주(金山寺露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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