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索의 窓門/태화강 이야기~

암자로 들어가는 길(울산 내원암)~

migiroo 2012. 9. 28. 22:36

 

암자로 들어가는 길~
울산 대운산 내원암

 

 

 


엊저녁에 뭘 잘 못 먹었는지 아랫배가 살살 아프다.
유통기한 며칠 지난 소시지를 구어 먹었는데…….
그 것이 원인인가?
약 먹지 않고 아픈 배를 다스리는 방법은 속을 비우는 것이다.
아침은 거르고 하얀 죽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오후 집을 나선다.
투명한 가을 햇살이 하얗게 길가에 누어있다.
암자로 들어가는 길은 그야말로 바람소리, 물소리뿐이다.
그마저 없었다면 너무나 외로워 울어 버렸을 것 같다.

 

 


대운산 내원암으로 들어간다.
암자에 들어 잠시 만이라도 외로운 내 영혼을 달래 주고 싶다.
불자도 아닌 내가 왜 산속의 암자인가.
불자든 아니든 암자 문은 늘 열려 있다.
산 아래 주차장에서 암자까지의 길은 약 1.8km 정도....
계곡을 끼고 암자로 이어지는 길은 하늘이 보이지 않는 숲 길이다.
 

 

 

산사에 가을은 빨리 오는 것일까.
어느새 길가에 누런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한여름 왕성했던 나뭇잎들이 그 짧은 생을 마감하고
이제는 낙엽이 되어 자신의 몸마저 숲의 밑거름으로
마지막 봉사를 하려하고 있다.  


산 길 여기저기 도토리가 떨어져있다.
아주머니 한 분이 배가 불룩한 배낭을 매고 도토리를 줍는다.
도토리는 한 겨울 다람쥐들의 식량인데...
다 줍지 말고 조금 남겨 뒀으면 싶은데...

 

 

암자에 일주문은 없다.
거기는 속세요, 여기는 불계라는 경계(문)가 없음이고,
그래서 들어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막지 않으니 문이 필요 없다.


암자 앞에 무지무지하게 큰 팽나무가 서 있다.
수령이 무려 500년이란다.
몸 한 면은 썩어 문드러져 시멘트로 덧발라 놓았지만
아직도 어린 가지와 싱싱한 잎들을 달고 있다.
그 거목 앞에 서니  몸이 옴짝 움츠러든다.
거목 앞의 인간이 너무나 왜소해 보이기 때문이다.

 

 

 

암자의 건물은 의외로 크다.
큰 화강암 삼층석탑도 있고, 쌍 용두가 육중한 팔작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대웅전을 비롯한 제법 큰 전각들이 4체나 있다.
암자라기 보단 작은 절집에 가깝다.


암자는 초라해야 암자답다.
건물도 달랑 한 두 체로 그야말로 외로워야 한다.
화려하고 웅장하면 암자답지 않다.

 

 

 


삼층석탑은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희디흰 화강암에 삼층탑신과 온전한 상륜부를 가추고 있다.
기단부 면석 4면에 팔부중 여덟 분이 조각 되어 있고,
1층 탑신 각 면에도 깊은 돋을새김의 불상이 조각 되어있다.
 

 

 

 

한 점 흠결도 없는 반들반들 잘 다듬어진 각 면석들...
한 치 오차도 없이 모서리를 반듯반듯하게 자른 각진 석재들.....
상하좌우 완벽한 비례, 고부조의 두꺼운 조각....
탑은 신라 탑을 충실히 모방했다.
 
그러나 탑에서는 전혀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계로 깎은 탑이라 장인의 정신이 하나도 배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탑도 천년 후 쯤 되면 그제야 비로소 감정이 생길려나.... 

 


 
절 마당에 들어서니 스님은 안 보이고, 하얀 백구 한 마리가
짖지도 않고 멀뚱멀뚱한 눈으로 들어서는 나를 바라본다.
눈이 너무나 순박해 보인다.
그러나 그도 긴 목줄에 묶여 있다.
‘저놈은 언제까지 저렇게 묶여 살아갈꼬.....‘
온갖 욕망과 집착에 묶여 사는 인간들과 같은 신세인 듯하다.


날렵한 팔작지붕의 대웅전 처마 밑에 용 두 마리가 머리를 내밀고 있다.
용신(몸체)은 법당 안에 있고 머리는 대웅전 처마 밑에 있다.
절집의 용은 왜 있는 것일까?
바로 불교의 반야용선(般若龍船) 사상에서 온 것이다.

 

 

불가에서 반야용선이란 상상의 배를 의미한다.
참 진리를 깨달은 중생이 극락정토로 가기 위하여 타고 가는
배로서 용이 이끄는 배(용선)이다.
그러니 절집의 법당은 사부대중이 부처님과 함께 타고 가는
배의 선실과 같은 곳임을 나타낸다.
나도 반야용선을 타고 갈 수 있을까?
그러나 결코 살아서는 탈 수 없는 배이다.

 

 

 

대웅전 앞 화단에 빨간 상사화가 피어있다.

상사화를 어떤이들은 '석산, 꽃무릇"이라 하던데 어떤 것이 맞는 지 모르겠다.
그저 그 진홍의 붉은 빛이 너무도 강렬하고 섬뜻하다.

여러 갈래의 꽃잎이 고통에 찢어진 한 여인의 가슴 통증처럼 고통으로 다가온다. 

 

절집의 상사화는 어떤 상징적 의미가 숨어 있을까?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정열적이 모습과는 달리 엉뚱하게도
그리움과 애절함을 뜻하는 상사화(相思花)라는 이름을 가졌다.
꽃말 마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그 애절함이 가슴으로 전해 오는 듯하다.
상사화의 성장기와 꽃에 얽힌 전설을 보면 왜 상사화가 됐는지 이해가 된다.

 

 

 

상사화는 장마가 시작되는 6월이 되면 잎은 시들어 죽어버린다.
그리고 석 달 열흘을 외롭게 보내다 8,9월이 되면 꽃대만 올라 온 후
한 송이 붉디붉은 꽃을 피운다. 그래서 잎과 꽃이 만나는 경우는 없다.
마치 헤어진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 다시 만나지 못하고
애타게 그리워하는 사이처럼 말이다.
절집에 상사화가 많은 까닭은 속세의 인연을 끊고 사는 스님들의 애절한
속세(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뜻하는 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대웅전 좌측에 스님들의 방으로 쓰이는 맞배지붕의 건물이 현판도
걸지 않고 단아한 창호를 달고 서 있다.
마침 석양의 하얀 햇살에 비친 창호가 수행하는 스님들의 정결한
모습처럼 단아하다.

 

 

 

그 쪽마루에 앉아 잠시 해바라기를 한다.
절집이 왜이리. 조용할까?
쪽마루 디딤돌에 스님들의 하얀 고무신은 보이는데...
스님도 중생도 도무지 인기척조차 없다.
마당에 매어놓은 백구(개) 마저 짖지 않고 묵언 중이다.
정적에 싸인 산사의 오후는 그야말로 외로움 자체이다.
모든 집착과 욕망을 여기에 다 내려놓고 가고 싶다.
그리움도, 열정도, 이제는 시들어버린 사랑마저도 다 내려놓고 싶다.
인간의 집착과 욕망은 왜 이리 끈질긴 것일까.

 

 

 

뜰아래 마당에 내 놓은 빨간 고추를 말리고 있다.
이 또한 붉은 상사화처럼 핏 빛이다.
고추는 상사화의 애절함과 그리움 같은 것을 단호히 단절하듯
여러 토막으로 잘려 있다.


마지막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려는 시간 암자를 떠난다.
속인은 속세에서 스님은 절집에서 각기 사는 영역이 다르니  
나는 속세로 다시 들어 갈 수밖에 없다.
산사를 떠나는 발길에 계곡 물소리가 졸졸 따라붙는다.

 

 

 


내원암은 원효대사가 마지막으로 수도하던 대운산 자락에 있은 암자이다.
신라시대 대원사라는 큰 절의 9암자 중 하나로 울산시의 신라시대
4대 전통고찰(석남사, 문수사, 신흥사, 내원암)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매년 10월 말이 되면 가을산사음악회가 열리는 암자 이기도 하다.


대운산 내원암 계곡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크고 작은 폭포들이 줄 지어 쏟아져 내리고 있고,
등산코스로, 걷기 코스로도 너무 좋은 곳이다.


>미지로(2012.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