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索의 窓門/태화강 이야기~

박제상 부인, 사랑에 죽다.

migiroo 2013. 4. 19. 11:08

 

 >2013.4.15


■박제상 부인, 사랑에 죽다.


은을암에 바람일고~

 

 


몇 년 만인가, 다시 을을암에 오른다.
치술령 국수봉 은을암으로 오르는 길은 인적이 거의 없다.
적막감마저 감도는 산 속은 바람소리 계곡 물소리뿐이다.


딱딱하고 둔탁한 시멘트 포장길의 경사도가 제법 가파르다.
지그재그 열두 구비 오르막 산길을 오르며 그녀를 생각한다.
천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그녀의 눈물이 내 가슴에 젖어 든다.

 

 

 


몇 구비 오르다 잠시 가쁜 숨을 고르며 멀리 치술령을 바라본다.
영원한 망부석이 된 그녀의 모습이 가물가물 시야에 잡힐 듯 하다.
그녀는 이름도 없이 그저 남편 박제상의 부인이라고만 부른다.
삼국유사에는 금교 김 씨라고만 전해오지만 정확한 이름은 모른다.


박제상(朴堤上)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의 두 왕자를 구하고
일본에서 순절한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여, 오늘 날까지도 충신의 표상으로
회자되고 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박제상이 만고의 충신은 되었지만 자신의 처자식에 대한 사랑은   
현대의 시각으로 볼 때는 별로였지 않았나 싶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의 중, 근세기를 통 털어 남자들은 자신의 입신양명과
권력 그리고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위하여 몸을 바친 사례는 많으나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권력과 출세를 포기한 사례는 별로
없었지 않았나 싶다.
박제상 역시 그의 부인과 자식에 대한 사랑 보다는 국가와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먼저였던 것은 어쩌면 시대적 시각차인지도 모른다.


당시 신라왕(눌지왕)과 박제상은 왕제(미사흔,未斯欣) 구출하기 위하여
일본 조정을 속일 모종의 계략을 꾸민다.
바로 박제상을 큰 죄인으로 몰아 일본으로 도망간 범인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조정 대신들은 물론 가족인 박제상 부인까지도 속여
정말 박제상이 큰 죄를 짓고 일본으로 도망간 파렴치한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박제상 가족도 국법에 따라 죄인의 가족으로서 치술령에
유배 감금되는 신세가 된다.


결국 이 계략은 성공하여 왕제를 구출하게 되지만 박제상은 그 대가로
일왕에 의하여 처연한 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 부인 역시 남편의 비참한
죽음을 알게 된 후 세 딸을 남긴 체 스스로 목숨을 버리니 그 두 죽음이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극과 극의 억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박제상이 만고의 충신은 됐을지 모르지만, 한 편으로 보면 왕에 대한
충성심 하나 때문에 가족마저 버린 파렴치한 지아비 이고 아비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부인은 자신의 지아비가 결코 죄인이 아님을 믿고 님을 그리다가 님의 죽음 앞에

자신을 던졌으니 그 지극한 사랑이야 말로 고결한 만고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녀의 비문에 나는 이렇게 쓰고 싶다. 
 
‘박제상 부인, 사랑에 살다 사랑에 죽다.’
 

박제상에 비하여 그의 부인 김씨의 행적은 박제상 보다 덜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부인 김씨의 지극한 사랑은 끝내 님을 그리다가 망부석이 되었고,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갔으니 그녀의 사랑 앞에 절로 숙연해 진다.

 

 

 


다시 산길을 오른다. 암자까지는 불과 1.8km 정도 밖에 안 되지만
그러나 은을암은 행자에게 고행을 요구하고 있다.
유독 땀이 많은 체질이라서 그런지 온 몸에 땀이 촉촉하다.
차를 끌고 올라가면 단숨에 올라 갈 수 있지만 차를 산 아래 마을 입구에
세워두고 고행을 자초했으니 힘이 들어도 후회는 없다.


나이가 드니 길이 조금만 가팔라도 힘이 든다.
그러나 길은 혼자 걷지만 혼자가 아니다.
길 주변에 반겨주는 예쁜 친구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자주잎제비꽃,
흰제비꽃,
산괴불주머니,
병꽃나무,
애기똥풀,
광대나물,
꽃다지,
피나물,
줄딸기꽃,
개별꽃,
현호색.
.
.
.


바로 봄꽃 들이다.

 

 

 

 

위대한 생명력 앞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하찮은 것들이라고 평소에 생각했던 것에 민망해 지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 그것들의 생명력에 앞에 오히려 인간인 나자신이 부끄러워 진다. 
손가락보다 작은 야생 꽃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저 신비롭고 경이로우며 행복하고 기쁘다.


 


큰 나무 아래에서 기나긴 동면을 마치고 땅을 헤치고 솟아올라 아름다운 예쁜 꽃을 피운 친구들...,

이런 친구들을 만나니 호젓한 산길을 혼자 걸어도 외롭지 않다.   
 

 

 

 

마지막 구비를 돌아 올라서니 드디어 은을암이 시야에 들어온다.
지금의 은을암(隱乙庵)은 암자(절)이지만...
사실은 암자를 이름 함이 아니고 바위굴을 말함이다.
바로 박제상의 부인 김씨의 영혼이 새가 되어 날아든 바위굴로서 지금도 암자 뒤쪽에 남아 있다.
‘隱乙巖‘의 뜻이 새가 바위에 숨어들다. 라는 뜻으로 은을 암(巖)이고,
그 자리에 부처님을 모신 절을 세워으니 암자 이름 또한 은을 암(庵)이다.
절은 신라시대에 창건한 것이라 전해 오지만 확실치가 않고, 다만
박제상의 부인을 기리기 위하여 부인을 ‘치술신모(致述神母)로 받들어
모시고 사당을 지었는데 그 터에 지금의 암자를 세웠다고 전한다.

 

 

 


암자 앞에 당도하니 아니 저게 무엇인가?
암자로 들어가는 급경사 철 난간과 목제 계단은 전에 봤던 그대로 인데
암자 건물 앞에 전에 없던 커다란 대나무 장벽이 처져 있지 않은가.

 

“아니 저런 흉물을 왜 설치했지....?”

 

 

 


숨이 차서 계단을 오르는데 계단 맨 위에 커다란 백구 한마리가
쭈그리고 앉아 올라오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금은 겁먹은 체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니 이놈이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내 다리에 코를 박고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다.


불청객이니 몸 검사라도 해야 되겠다는 것인지....
그때 안에서 젊은 보살(여인) 한분이 나온다.


“이 개 괜찮아요?“ 
“아주 순하니 겁먹지 마세요.”
“개 이름이 뭐예요?”
“바람이 이예요. 바람이....”


바람이라....
참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바람이’ 는 금방 친해졌다.


그리고 커다란 대나무 장벽을 친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됐다.
암자가 워낙 급경사 산등선을 깎아 지었기 때문에 마당이 없어 수 백 개의
철 기둥을 박아 그 위에 거푸집을 설치 마루를 놨는데 밑에서 보면 철 기둥이
보기 흉하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대나무를 엮어 철 기둥을 가린 것이다.
콘크리트 장벽을 설치하면 더 흉측 할 것 같아 나름대로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데크마루 위에 탁자도 있고, 수 십 명은 족히 앉을 만한 너른 공간도 생겼다.
은을암에서 해마다 산사 음악회가 열린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런 행사를 위하여
만든 공간이었던 모양이다.

 

 

 


빨래 줄에 스님의 겨울옷이 햇볕 쪼이기를 하고 있다.
스님은 보이지 않고 ‘바람이‘만 여기 왔다 저기 왔다 길손을 맞아 준다.
 

 

 

 

암자는 그야말로 단출하다.
법당에 든다.
금동불상 삼존불이 봉안 되어 있다.
불자는 아니지만 108배를 올릴까 하고 절을 시작 했는데 100배는커녕
허리와 다리가 저려 겨우 50배를 마치고 숨이 차서 주저앉아 버렸다.
부처님이 빙그레 웃으신다.
그만 해도 된다 하신다.
불단 양 켠에 용 두 마리가 똬리를 틀고 고개를 내밀고 있다. 
닫집 천정에도 두 개의 용두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법당을 나와 외벽에 그려진 벽화를 보니 생뚱맞은 벽화 하나가 보인다.
바로 세조와 문수동자 그림이다.
계곡 물에서 한 동자가 세조의 등을 밀어 주고 있는 그림이다.


세조가 동자 보고 말한다.


“여기서 임금을 봤다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


동자가 임금에게 말한다.


‘여기서 문수보살을 만났다고 말하지 마오.“


세조는 어리석게도 부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문수보살의
자비심은 세조의 피부병을 깨끗이 낫게 해 준다.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 있을 법한 벽화가 왜 여기에 있을까, 하고
의아해 했지만 누구에게 그 연유를 물어 볼 데가 없다.

 

 

 


그 벽화 반대 오른 편 벽에는 새로 변한 박제상의 부인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벽화의 그림이 조금은 조잡스럽고 왜소하다.
상상력을 키워 좀 더 멋지게 그릴 수 있었을 텐데.....
법당을 지은 스님이 은을암 설화의 의미를 잘 모르신 것은 아닌지....
 

 

 

 

법당을 나와 새가 숨어든 은을암 바위 굴 속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바위굴에는 새는 없고 두 눈을 부릅뜬 석용 한 마리가
굴속에서 기어나와 머리를 내밀고 있다.
왜 새가 아니고 용일까?
시커먼 굴속은 깊이가 얼마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새 몇 마리는 족히 날아 들어갈 만한 굴이다.
아마도 굴속은 또 다른 우주의 세계가 숨어 있지 않나 싶다.
그 속에서 용이 나왔으니 새가 용이 된 것인지...
용이 새을 잡아먹은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박제상 부인의 영혼은 왜 하필 새가 됐을까?
그것은 아마도 한 마리 새가 되어 훨훨 날아 사랑하는 님이 죽은
곳으로 날아가고 싶은 소망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설화 이야기는 더 극적이다.
새로 변한 부인은 일본까지 날아가 사랑하는 남편의 넋을
데리고 이 곳 은을암에 숨어들었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러브스토리인가.
그 후 박제상의 부인은 국가로부터 국대부인(國大夫人)이라는 칭호를 받고
치술신모에 모셔졌다.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다.


일본으로 떠나간 남편을 만나보지 못한 부인이 망덕사(望德寺)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몸부림치며 통곡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 모래를 장사(長沙)라 하였고,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하여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뻗치다의 고유음)라 하였는데 그 장소가 지금의 경주 남산 아래 망덕사 옆 벌지지 표지석이 있는 자리이다.

 

그 후 왕은 박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에 봉하고 그의 딸은 왕자 미해의 부인을 삼았다.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어 망부석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치술신모(鵄述神母)라 부르며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는데 곧 그것이 치술신모의 유래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충신 보다는 사랑의 화신을 더 좋아한다.
박제상은 충신이고, 그의 부인은 사랑의 화신이다.
물론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현대는 박제상 같은 충신은 없다.
다만 금력과 권력을 따라다니는 가신(家臣)이나 간신배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랑을 위하여 몸을 던지는 사람의 화신은 많다.
충신은 유한해도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어느덧 해가 진다.
북향인 은을암엔 유달리 해가 짧다.
어디선가 부인의 한 맺힌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가파른 철재 사다리를 타고 낭떠러지 절벽 바위 위에 있는 종각에 오른다.
범종은 근래에 만든 것으로 시주자의 이름이 깨알같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종을 치는 둥근 나무토막이 당좌를 향하여 쇠줄에 묶여 있다.


“덩~~~~~ 덩~~~~ 덩~~~~


종 본래의 소리보다 소리의 여운이 더 길다.
덩~ 하는 종소리가 맥놀이 현상으로 변하여 치술령 망부석을 향하여 퍼저 나간다.
처음 한 번의 덩~ 소리는 세상에 고하는 박제상 부인의 울음소리이고,
두 번 째 덩~ 소리는 처연히 화형당한 박제상 울부짖음이고,
마지만 세 번 째 덩~ 소리는 세상을 구제하는 부처님의 불음(佛音)이다. 


은을암을 나온다.
백구 ‘바람이’가 한 참을 뒤 따라 오다가 암자로 돼 돌아간다.
개가 아니라 부처인지도 모른다.
왕인 세조도 부처를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 봤는데....
어찌 나 같은 미천한 중생이 부처를 알아 볼 수 있겠는가.


올라올 때와는 달리 내려 갈 때는 가파른 내리막길이니
금방 산 아래까지 내려와 버렸다.
오르긴 어려워도 내려 올 땐 순식간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절감한다.


박제상 과 그의 부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일은 박제상의 유적지 치산서원과 근년에 새로 건립한
박제상 기념관을 돌아 볼 예정이다.

 

맨년 음 3월에 박제상과 그의 부인을 기리는

치산사 춘향대제가 열린다.


집에 돌아 와도 박제상 부인의 눈물이 자꾸만
내 가슴 속을 적시고 있다.


'그녀 사랑에 살다 사랑에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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