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未知로 가는 땅/예슬이의 인도여행

16.삶과 죽음이 흐르는 갠지스강

migiroo 2009. 11. 3. 18:17

 

 

 

갠지스강......
남자가 죽으면 흰색 천을 덮고
여자가 죽으면 노란색 천을 덮으며..... 
천민을 화장하는 곳과 계급이 높은 사람을 화장하는 곳이
구별되어 있다고 하며 조금 위에 있는 사각형의 제단은
높은 계급의 시신을 태우는 곳이라고 했다.
죽어서 까지 차별을 받는 인도의 천민들이 너무나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문 중에서...)


 

 

새벽 5시 갠지스 강으로 가기위해 숙소를 나오니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 인도의 겨울은 비가 올 확률이 0.02%라 하여 아무런 준비도 해오지 않았는데 이른 새벽에 우산을 구할 수도 없고 난감 했다. 하지만 비 때문에 제일 중요한 볼거리인 갠지스강을 포기할 수가 없어 비 오는 거리를 나섰다. 숙소 앞에서 마침 사이클 릭샤를 만날 수가 있었는데 낡아서 덮개도 떨어지고 없는 릭샤를 타고 비를 맞으며 갠지스 강으로 향했다.

 

 

오토릭샤는 주로 젊은 사람이 운전을 하지만 사이클릭샤는 나이 많은 사람이 끄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들이 탄 두 대의 릭샤꾼도 모두 보기에 70 이 다된 노인 같았다. 한사람은 치아가 하나도 없는 것이 완전히 파파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보기에도 안쓰러운 가느다란 다리로 안간힘을 써 가며 자전거 패달을 밟는 모습을 보자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도리어 미안할 지경 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사가 아주 조금 있는 길에서도 힘이 들어 못 간다고 잠시 내려달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릭샤에서 다 내려 아무도 타지 않은 빈 릭샤를 우리가 밀고 갔다. 생각해보니 정말 우스웠다. 비를 다 맞으며 손님이 내려서 빈 릭샤를 밀고 가는 폼이 얼마나 웃기는 지…….
그래도 갠지스강 입구에서 내릴 때는 할아버지 릭샤꾼이 달라는 대로 요금을 다 주었다. 측은하기도 하고 나이 드신 분께 용돈을 드린 것이라 생각하였다.

 

 

갠지스 강가의 가트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의 좁은 미로로 되어 있어 몇 번이나 물어 본 후에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7시 30분, 비가 오는 이른 아침의 갠지스 강은 무척 쌀쌀하여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런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벌써 인도 사람들은 강물에 몸을 담구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늘 아침마다 행하는 의식에 익숙해서 인지 서서 바라보는 나는 추워서 숄을 두르고 있는데 그들의 표정은 경건하기만 하다. 만삭의 임산부처럼 뚱뚱한 남자가 옷을 벗고 강에 들어가는 모습도 보이고 젊은 청년이 물에서 막 나와 옷을 갈아입는 모습도 보인다. 인도청년의 몸매를 감상하느라 안보는 척 하면서 힐끗힐끗 훔쳐보는 내 모습이 조금은 우스웠다.
카스트 제도의 최고의 계급인 브라만은 상체를 벗으면 한쪽 어깨에서 반대 옆구리에 사선으로 하얀 끈을 매고 있는데 자기의 신분이 브라만인 것을 과시하기 위해 그런 조잡한 장식을 하는 심리가 참으로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도 브라만의 신분을 자랑하고 싶을까?  신분이 높고 낮음을 떠나서 발가벗으면 다 똑같은 모양새인데 굳이 벗은 몸에까지 신분을 표시하는 그들이 환멸스러워 보였다.
사람 위에 어떻게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는 가…….
카스트 제도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할 최악의 관습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갠지스강(ganga)은 무척 더러워서 사람과 소의 배설물은 물론 덜 탄 시신도 떠다닌다고 했지만 이른 아침 갠지스강은 온통 누런 황토 빛 물 위에 소원을 빌며 던진 꽃목걸이와 흩어진 꽃님만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시신을 화장하는 연기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노 젖는 배를 350루피에 빌려 3시간에 걸쳐 갠지스 강 주변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강 한가운데에서 꽃잎과 초로 장식된 의식용 조그만 접시를 파는 상인이 있었는데 5루피에 사서 촛불을 밝혀 인도 여행을 무사히 잘 마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며 강물에 띠웠다.

 

갠지스 강가의 많은 가트를 바라보며 아래로 내려가자니 어느 한곳에 화장을 하려고 막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노 젖는 두 명의 인도 총각에게 가보자고 했더니 흔쾌히 배를 강가에 대었다. 쌓은 장작위에 눕혀진 시신은 흰색 천으로 덮여 있었는데 발은 밖으로 다 나와 있었다. 어느 노인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오늘 처음 화장하는 시신이라며 묻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설명을 해준다.

남자가 죽으면 흰색 천을 덮고 여자가 죽으면 노란색 천을 덮으며 여자들은 화장터에 나올 수 없으므로 집안에 있다고 한다.
천민을 화장하는 곳과 계급이 높은 사람을 화장하는 곳이 구별되어 있다고 하며 조금 위에 있는 사각형의 제단은 높은 계급의 시신을 태우는 곳이라고 했다. 죽어서까지 차별을 받는 인도의 천민들이 너무나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절한 그 노인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고 있으려니 우리에게 기부금을 내란다. 화장하는 사람의 친척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관광객을 상대로 돈을 버는 사람이었다. 그냥 보기만 할 것이라 말했더니 심통이 났는지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여 끝까지 보지도 못하고 장작에 막 불을 붙이는 것을 보며 자리를 떴다. 배를 타고 가면서 계속 그곳을 응시하니 불이 붙은 장작에서 검은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조금 밑에는 일렬로 나열된 빨래터가 보였는데 남자들이 몸을 물에 담그고 세탁물을 돌에 치며 빨래하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우리는 손으로 비벼서 빠는데 인도사람들은 빨래를 돌에다 마구 쳐대니 옷감이 성하지 않을 것 같았다. 누런 황토 물에 빨래를 하면 깨끗해지기는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배에 몸을 싣고 강주변의 가트를 구경하는데 건물 지붕에 비행기 모형이 올려져 있는 것이 보인다. 뱃사공 총각이 말하기를 비행기를 신으로 모시는 사원이란다. 힌두교는 믿는 신이 자그마치 4억 8천이나 된다더니 그중에 비행기도 있을 줄이야…….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모습이 너무나 경이로운 나머지 신으로 모신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상류 쪽으로 더 올라가니 강기슭에 앉아 볼일을 보는 남자들이 눈에 띤다. 강 쪽으로 향해 앉아 있어서 안볼 것도 보고 말았는데 우리를 본 그 남자는 바지도 올리지 않고 벌떡 일어나 자신의 하체를 보여주며 웃기까지 하니 보는 우리들이 민망해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람나가르 포트에 가기위해 모래사장에 배를 세웠는데 발을 딛는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래사장 전체가 사람의 배설물 천지여서 어디다가 발을 디뎌야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만약 여름의 우기에는 넘치는 갠지스 강으로 배설물이 흘러들어갈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런 강물을 성스럽게 여겨 목욕도 하고 심지어 물을 떠서 마시기도 한다니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성으로 가는 길에는 음식을 파는 가게가 여러 곳 있었는데 아침을 때우려고 허름한 가게로 들어갔다. 방금 튀겨낸 인도만두 "사모사" 는 어찌나 맛이 있는지 먹어도, 먹어도 계속 먹고 싶어진다. "짜파티"와 "짜이"도 시켜 먹으며 아침부터 포식을 하였다. 같이 간 뱃사공 총각 두 명에게도 음식을 사주었는데 아주 조금밖에 먹지를 않았다. 엄청 먹어대는 우리를 보고 그들은 아마 속으로 굉장히 놀랐을 것이다. 

람나가르 포트는 마하라자의 성이였던 곳으로 박물관도 있었는데 왕이 입었던 화려한 옷과 금으로 장식된 가구, 전쟁에 사용했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화려한 성을 많이 봐왔던 터라 별로 흥미로운 볼거리가 없었다.
성을 나와 다시 배를 타고 "아씨가트"에 내려 배 삯을 지불하고 관광을 끝마쳤는데 낮 시간이 되자 화장터 이곳저곳에서 수많은 연기들이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제법 먼 거리인 베나레스"힌두대학으로 걸어서 갔다. 대학 안으로 들어서자 그전까지 혼잡했던 바라니시와는 달리 한적하고 많은 나무들로 멋있게 조경이 되어 있는 것이 분위기부터 달랐다.
인텔리 인도인을 보니 우선 외모부터 차이가 났다. 특히나 여자 대학생들을 보니 깔끔한 옷차림에 지적인 분위기도 풍기고 있어서 카스트의 높은 신분임을 짐작케 했다. 여자의 지위가 무척 낮은 인도에서 대학까지 다니는 여자는 굉장히 수준이 높은 집안의 자녀일 것이다. 친절하기도 하여 대학 내 박물관의 위치를 물으니 유창한 영어로 가르쳐 준다.

 

갑자기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수많은 대학생들이 피켓을 들고 대학 구내를 행진하고 있다. 인도의 모든 힌두대학의 동아리 모임인지 피켓에는 자기가 다니는 대학의 이름들이 써져 있었다.

그 나이의 젊은이들답게 왁자지껄 떠들며 흥겨운 음악소리와 함께 행진하는데 표정들이 무척이나 밝고 활기차 보였다. 사리를 입은 예쁜 여학생들의 모습이 인상적 이어서 긴 행렬이 다 지나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힌두대학을 나와 갠지스강 주위의 서점으로 책을 구경하러 갔다.
"하모니"라는 간판이 걸린 서점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서적들을 구경하였는데 인도의 유명한 성서(性書)인 카마수트라(Kama Sutra) 라는 책에는 남녀의 교합체위가 적나라하게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카마수트라는 기원전 6세기에 쓰여 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애서(性愛書)로 중국의 소녀경과 비슷해 보였다. 우리들은 나이에 맞지 않게 구석에서 그 책을 보며 킥킥거리며 웃기도 했는데 적나라한 그림들은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카마수트라를 사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포기하고 인도의 전통 북소리가 담긴 컴퓨터 디스켓을 기념으로 샀는데 가격이 무려 395루피(7,500원)로 무척 비싼 값 이었다. 서점주인은 30대의 젊은 남자로 영어도 유창하고 아주 인텔리전트 하게 생겼다.

               

 

한참을 서점에서 시간을 때웠는데 밤 10시까지 숙소에 도착하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남아 우리는 인도영화를 보러갔다. 이번에 본 영화는 인도 뒷골목의 조폭(?)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았는데 그들도 사랑에는 마음이 약한 듯 한 쌍의 연인을 위해 경찰이 돈 가방을 던져주며 말없이 뒤돌아서는 장면으로 끝을 맺었다.
자이푸르에서 본 영화에서처럼 중간 중간에 뮤지컬처럼 춤추고 노래하는 것도 똑 같았다. 인도의 영화는 모두 이런 패턴으로 만들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치해 보이기도 하는 인도의 영화시장은 무척 커서 일 년에 800여 편의 영화가 만들어 진다고 하니 인도사람들은 무척이나 영화를 사랑하는 것 같다.
밤 10시 보드가야로 가기위해 템포(짧은 구간을 운행하는 미니버스)를 타고 바라나시 역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라나시에 도착한 날에 비가 오더니 떠나는 날에 또다시 비가 내리니 갠지스 강에 뿌려진 슬픈 영혼들의 눈물인 것만 같아 마음이 애잔해졌다.
바라나시 역에 도착하니 대합실은 수많은 걸인들이 다 차지하고 누워있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언제도착할지 모르는 기차를 기다리며 대합실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 걸인들과 내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밤 12시에 기차를 타고 4시간여를 달려 동이 트지 않은 새벽녘에야 기차에서 내렸다. 다시 오토릭샤로 갈아타고 비 오는 거리를 달려 보드가야에 도착하니 새벽 5시가 되었다.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오토릭샤꾼들은 얼마나 속력을 내는지 비가 오는 새벽4시의 캄캄한 밤길을 전속력을 내어 질주하니 릭샤를 탄 우리들은 사고가 날까봐 잔뜩 겁을 먹었다. 천천히 달리라고 말하니 그들의 트레이드마크인 "노프라블럼"으로 대꾸한다.

숙소에 도착하니 피곤한데다 신경을 너무 써서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인도의 밤기차를 타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2~3시간 연착하는 것은 보통이고 플렛포옴에서 오지 않는 기차를 무작정 기다리는 것에도 지치기 시작했다.

 


오토릭샤는 위험하기가 짝이 없어서 곡예 하듯 달리는 릭샤를 타면

늘 사고가 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해 진다.

얼마나 피곤한지 배낭을 내리자마자
씻지도 못한 체 바로 잠이 들었다.


>글: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