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未知로 가는 땅/예슬이의 인도여행

18.라즈기르, 부처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migiroo 2009. 11. 4. 22:19

 

 

 

라즈기르 "밤비사라" 감옥의 터는 부처님과 많은 교류를 가졌던
"마가다" 왕국의 밤비사라 왕이 아들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이 감옥에 갇힌 뒤 동맥을 끊기어 죽임을 당한 곳....
자식에 의해 죽임을 당한 밤비사라 왕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
가족 간에 벌어진 당시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세월이 흐른 지금의
내 마음에도 한없이 젖어들어 “밤비사라”왕의 통한스러운 심정을
헤아리게 하였다.(본문 중에서...)

    

 

 

새벽 5시 30분 이른 시간에 우리들은 "라즈기르"로 향 하는 대절 버스에 올랐다. 오늘 가는 곳은 부처 님이 최초로 법화경을 설법한 장소인 영축산(영취산)과 불교승단 최초의 사찰인 죽림정사 터, 그리고 세계 최고의 불교 대학이었던 "나란다" 대학이다.
라즈기르로 가는 길은 해가 지면 위험한 곳으로 버스도 운행하기를 꺼린다 하여 일찍 길을 나서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예정으로 서둘러 출발 하였다.

 

 

아침을 먹을 시간도 없어서 어제 저녁 미리 식빵과 쨈을 사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두었는데 일행에게 하나 씩 분배를 하니 내 몫은 고작 한 조각뿐이었다. 하지만 아침을 준비 못한 일행들과 조금씩 이나마 나누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힘든 여행길에서 나눌 수 있는 따스한 정이 아니겠는가.…….


따뜻한 커피 한잔과 샌드위치 한 조각은 아쉬운 데로 요긴한 아침꺼리가 되었다.  비포장 도로를 5시간 30분에 걸쳐 달려야 했는데 길이 험하여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머리가 천장에 부딪히는 고통을 몇 번이나 감내해야 했다.
영축산으로 오르는 길은 한창 공사 중 이었는데 길을 넓히고 계단을 다듬는 인부들의 손길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그마한 바위산으로 온통 대리석이 널려있는 이 산은 우리나라의 통도사 뒷산의 이름도 이곳의 지명과 같은 영축산이라 지었으니 인도의 영축산을 보는 감회가 특별하였다.

 

 

 

법화경을 설법한 장소는 빈터만 남아있었는데 각 나라에서 온 스님들과 불교도들이 예배를 드리거나 조용히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장식의 그 어느 유적지보다 소박한 분위기의 이 곳이 부처님의 무소유의 가르침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더 가슴에 와 닿았다.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내려오는 길에 독실한 불교도인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까만색 대리석 조각을 하나 주웠다. 하나의 작
은 돌 일수도 있겠지만 영축산의 돌은 친구에게 아주 많은 의미를 부여해줄 것이라 생각하며 주머니에 넣었다.


"밤비사라" 감옥의 터는 부처님과 많은 교류를 가졌던 "마가다" 왕국의 밤비사라 왕이 아들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이 감옥에 갇힌 뒤 동맥을 끊기어 죽임을 당한 곳이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죽이면서까지 왕위에 오르는 인간의 잔인성이라니…….
사랑하는 자식에 의해 죽임을 당한 밤비사라 왕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부모와 반대로 자식은 그 사랑마저도 권력과 물욕에 어두워 부모를 배신하는 사악함을 인간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족 간에 벌어진 당시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세월이 흐른 지금의 내 마음에도 한없이 젖어들어 밤비사라 왕의 통한스러운 심정을 헤아리게 하였다.
왕의 주치의였던 "지바카"의 집터에도 들렀는데 지바카는 부처님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고 하며 마당에 서있던 망고나무를 부처님이 무척 좋아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다 무너져 버리고 집터만 덩그러니 남아있으니 망고나무 밑에 지바카 와 마주앉아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을 부처님을 상상하며 그의 발자취를 더듬을 뿐이었다.


 

            

 

최초의 사찰이 세워졌던 죽림정사 터에는 말끔하게 공원으로 조성이 되어있었는데 무척 신경을 쓴 듯 아름답게 예쁜 꽃들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이곳을 지키는 인도 군인들이 다가오더니 달러를 루피로 바꿀 수 있느냐고 묻는다.
아무 하는 일 없이 총을 메고 무료하게 서성이는 군인에게도 관광객이 달러를 기부한 모양 인지 어떤 군인은 뒤따라오면서 노골적으로 5달러를 달라고 하니 군인들의 정신상태가 한심스러웠다.


 

   

 

죽림정사를 나와 세계 최고이자 최대의 불교대학이었던 나란다 대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란다 대학은 5세기경 굽타 시대에 세워진 대학으로 전 세계에서 몰려든 1만 명의 학생이 수학하고 있었다니 당대의 최대의 대학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건물과 수많은 책들이 모두 불타 재가 되어 버렸다니 안타깝고도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폐허가 된 공간의 벽돌을 더듬고 있노라니 서기 650년경 이곳에 머물며 불법과 학문을 탐구하던 그들의 체취가 스며 있는 것 같아 쓸쓸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감상에 젖어 이곳저곳 살펴보고 있는데 서둘러 출발해야 한다고 일행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황망히 왔던 길을 되돌아서 총총 걸음으로 버스에 올라타고 보드가야로 향했다. 버스 운전사는 베스트 드라이버로 요철이 심한 도로를 잘도 달려 해질녘에는 보드가야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드가야를 지척에 두고 달리던 모든 차들이 정지하였다. 바로 앞에서 총기 사고가 나서 경찰이 출동하고 길을 막고 서서 차량 통행을 금지 시켰기 때문이다.
사태가 수습이 될 때까지 우리들은 무작정 차 속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날은 점차 저물어가고 있었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인도만두 "사모사"를 기름에 튀기는 모습이 보였는데 점심도 먹지 못한 처지라 입속에서 군침이 돌았다. 길거리에 서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던 상관도 않고 태평하게 사모사를 먹으면서 어서 빨리 길이 뚫리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길이 뚫리고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된장국을 먹고 왔다는 교장선생님 부부의 말을 듣고 어두운 밤길을 물어물어 찾아 갔지만 이미 다 팔리고 없다하여 할 수 없이 감자 국을 시켜서 먹었다.

오늘은 인도의 시골풍경을 많이 본 날이다. 끝없는 푸른 지평선과 그 위에 서있는 아름드리나무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여행자의 마음을 맑고 신선하게 해주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인도의 푸르디푸른 시골 정경이 내 시야에 펼쳐진다. 내일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알라하바드"로 가는 기차를 타야한다. 배낭을 미리 점검해 놓고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다.

 

이제 언제 부처님의 발자취가 담긴
보드가야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보드가야여…….
안녕히…….


>글: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