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未知로 가는 땅/예슬이의 인도여행

21.불교미술의 보물, 산치 스투파

migiroo 2009. 11. 6. 07:49

 

 

 

산치는 오붓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로 대탑에서 마을을 바라보니
나무숲들 사이로 집들이 보이고 주위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무척이나 고즈넉한 풍경을 보여 주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혹시나 품고 있던 환상이 깨질까봐
아름다운 모습으로 새겨두고 싶어서 멀리서 구경만 하였다.
(본문 중에서...)

 

 

 

기차 안에서 아침을 맞았다. 환한 햇살이 우중충한 기차 안을 비추니 기분이 조금 밝아지는 것 같다. 내 자리는 3층 침대라 밖을 볼 수 없어 풍경을 감상하는 것을 포기하고 달리는 기차 바퀴 소리의 리듬을 들으며 가만히 누워 있다. 지금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제일 긴 14시간의 기차를 타고 "산치"로 가는 중이다. 맞은편 자리에는 일행 중의 불교신자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앉아 계속 불경을 읽고 있다. 벌써 20분도 더 읊고 있는데 조용한 아침의 기차 안에서 큰소리로 읽는 불경은 남에게 적잖은 소음을 준다. 이 기차에 탄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 신자도 있을 것이며 인도인의 힌두교 신자도 많을 텐데 그냥 마음속으로 불경을 외우면 안 될까? 종교를 떠나서도 조용한 아침에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텐데 큰소리로 불경을 읽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일 것이다.

 
산치를 조금 못가서 어느 작은 역에 도착 했는데 갑자기 빨리 내리라고 스님이 소리치신다. 부랴부랴 배낭을 메고 정신없이 기차에서 내렸다. 일행들은 얼마나 행동이 빠른지 그 와중에도 한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다 내렸다. 이곳에서 산치로 가는 길이 더 빠르다고 하여 갑자기 내려진 결론 이었다. 릭샤를 타고 아침 9시경 산치 역 부근에 집합하여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맡기고 산치 대탑을 보기위해 길을 나섰다. 거리의 노점상에서 토마토와 양배추, 당근 등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서 산치 스투파로 가는 언덕을 올라갔다.

 

우리는 언덕으로 오르는 길목에 위치한 박물관에 먼저 들렀는데 잔디밭에 앉아 양배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으로 아침을 해결하였다
산치의 불교 유적은 BC3세기 경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져 AD 11세기에 걸쳐 1,400년 동안 조성 되었는데 많은 유적들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거의 파괴되고 그 중 4개의 스투파만이 형태가 보존되어 있으니 지금 남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가치를 부여해야할 것이다. 스투파에 새겨진 조각들은 정교하고도 깊은 의미가 담겨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든다. 1번 스투파는 아쇼카 왕의 재위 시절에 만든 것으로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한데 동서남북의 문에 새겨진 조각들은 산치 유적의 대표적인 볼거리로 인도 불교미술의 귀중한 보물이 되고 있다. 남쪽 문에는 부처님의 탄생을 조각 했는데 붓다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북쪽 문에는 법륜이 새겨져 있는데 부처님이 사르나트에서 설법한 것을 상징하며 원숭이에게서 꿀을 공양 받는 장면도 담겨 있었다.


 

 

동쪽의 문에는 요정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곡선미가 돋보이는 아름다운 조각으로 제일 눈에 띠고 개인적으로 내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이었다. 그밖에 마야부인이 코끼리 태몽을 꾸는 장면과 싯다르타가 말을 타고 왕궁을 빠져나가는 모습도 묘사되어 있었다. 서쪽 문에는 붓다를 유혹하는 악마의 모습과 부처님의 일생을 새겨 놓았는데 5명의 도반에게 설법하는 장면도 보이고 나무를 둘러싼 코끼리
는 부처님을 경배하는 불교도들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문 옆에는 아쇼카 왕이 세운 아쇼카 석주도 남아 있었는데 상단의 대부분은 박물관으로 옮겨 놓아서 밋밋한 기둥만 감상할 수 있었다.


산치는 오붓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로 대탑에서 마을을 바라보니 나무숲들 사이로 집들이 보이고 주위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무척이나 고즈넉한 풍경을 보여 주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혹시나 품고 있던 환상이 깨질까봐 아름다운 모습으로 새겨두고 싶어서 멀리서 구경만 하였다. 
 

       

 

산치 대탑을 구경하고 우리는 보팔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산치 역으로 내려갔다. 산치 역은 호젓한 시골 역으로 지금까지 본 역사 중 제일 깨끗하고 한적하였다.


보팔로 가는 기차가 2시간이나 연착을 해서 플렛포옴의 긴 의자에 앉아 기다렸는데 깨끗하고 신선한 전원풍경에 매료되어 지루한줄 몰랐다. 엄마와 같이 내 옆에 앉은 소녀에게 과자를 주니 선뜻 받지를 않았다. 엄마가 소녀에게 받아도 괜찮다고 얘기하니 그제야 수줍은 듯 과자를 받는 모습이 너무 순진하고 귀여웠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장소를 벗어난 곳에서는  때 묻지 않은 순박한 사람들을 대할 수 있는데 힘든 여행길에서 그들과 마주하면 시원한 청량제를 마신듯 기분이 좋아졌다.


보팔로 가는 기차 안에는 많은 인도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내 앞
쪽 의자에는 3명의 젊은 여자들이 각자 아이를 대리고 앉아 있었다. 노란색 사리를 입고 조그마한 사내아이를 안고 있는 인도여자는 너무나 예쁘게 생겼다. 예쁜 얼굴에 좋은 화장품을 쓴다면 더 아름다울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화장품 샘플이라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큰 배낭에 넣어두어서 아쉽게도 꺼낼 수가 없었다.
가끔 기차 안에서 간식을 파는 장사들이 지나다녔는데 아이들이 사달라고 때를 쓰는 것은 어느 나라나 똑같은 모양이다. 모든 엄마가 그렇듯이 뿌리치지 못하고 장사꾼을 불렀다. 간식은 각종 과일과 야채를 썰어서 후추와 소금을 뿌린 음식으로 신문지에 싸서 건넸는데 음식을 만지던 손으로 돈을 받고 그 손으로 또 음식을 만지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맛있게도 먹었는데 혹시나 배탈이 날까봐 걱정이 되었다.


보팔에 도착하니 노란색 사리를 입은 예쁜 새댁의 남편이 마중 나와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어린 아들을 덥석 안았다. 다정하게 얘기를 하며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얼마나 정겨워 보이는지 한참을 눈을 때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보팔 유스호스텔에 도착하니 시설이 엉망이었다. 유스호스텔 앞에는 놀이동산이 있어서 음악소리가 시끄럽고 놀이기구에는 각종 조명들이 번쩍거렸다. 한방에 무려 12명이나 들어가야 했는데 공동 세면대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이틀 동안 씻지도 못한 처지라 간절히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엄두도 못 내고 겨우 머리만 감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 했다. 제때에 식사를 하지 못하는 우리들은 늘 허기져 있어서 곧바로 끼니를 해결하러 길거리 로 나섰다. 놀이동산으로 들어가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지 자칫하다가는 일행을 놓칠 것 같아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주위에는 식당을 아무리 찾아도 없고 놀이동산 입구에 계란으로 오믈렛을 만들어 파는 곳이 있어 그것으로 저녁을 때웠다. 인도에서 먹을 것이 마땅찮을 때 무조건 계란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이제는 하도 많이 먹어서 입에서 닭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일행들은 다들 계란을 보기도 싫다고 말 하였지만 시장이 반찬이라 오믈렛을 배가 부르도록 먹고 내일아침을 위하여 삶은 계란도 10개나 샀다. 숙소에 들어와 잠을 청했지만 놀이동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시끄럽기 이를 대 없고 놀이기구에서 비추는 깜빡거리는 조명으로 도저히 잠들지 못하였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겨우 조명과 음악소리가 꺼졌는데 이번에는 야심한 밤에 개들이 짖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낮에는 놀이동산의 사람들이 온갖 소음을 일으키고 밤에는 거리의 개들이 영역을 확보하느라 싸우는지 밤새 울부짖으니 조용할 사이가 없는 것 같다.


아침 6시 유스호스텔에서 나와 보팔 역으로 가는 템포를 탔다. 새벽부터 운전사와 요금을 깎느라 실랑이를 하니 무엇이든 늘 흥정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귀찮고 힘들게 느껴졌다.
어떤 규정을 만들어서 그것에 따르며 좀 편하게 살면 될 텐데 조그마한 것 하나라도 늘 흥정을 하며 살아야 하다니 얼마나 불편하고 짜증스러운 일인가...
역에 도착하여 일행들에게 물으니 이곳에 오기까지 요금도 저마다 천차만별이다.


7시40분에 출발하는 "웃자인" 행 기차는 9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을 하였다. 이젠 기차가 늦어도 짜증이나 조바심을 내지 않고 인도인처럼 느긋하다. 차가 늦어도 그저 그러려니 하니 모두들 완전히 인도생활에 젖어들고 있었다. 20여 일 동안 여행한 우리들의 모습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옷도 적절히 빨아 입지도 못한 처지로 깨쬐쬐 하기가 이를 대 없다.


보팔 역 플렛포옴에서 오랜만에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집에는 아무 일 없으니 건강하게 여행을 잘 마치고 오라는 남편의 따스한 말 한마디에 눈물이 났다. 집에 가면 가족들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나라, 내 집, 내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번 인도 여행에서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으니 정말 의미 있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긴 여행으로 일행들은 조금씩 지처가고 환자도 여기저기 생겨났다.
몸살 ,감기, 피로에 설사까지 하는 것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는데 나는 그 흔한 감기조차 걸리지 않으니 다들 나에게 인도체질(?)이라고 말한다.
이참에 아예 인도에서 눌러 살아버려? 하지만 그리운 가족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 무엇과 바꿀 수 있으리오...
웃자인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자꾸 가족들 생각이 났다 특히나 한 달간 엄마의 보살핌을 못 받는 아들이 간절히 보고파졌다.


"사랑하는 딸아! 아들아!
 조금만 기다려라...  엄마가 곧 너희에게로 달려갈게……. 


>글:예슬